누군가의 사정
눈을 뜨자 알람이 울리고 있다. 몇 시지. 혹시나 늦게 일어났을까 봐 심장이 잠시동안 요동친다. 시계를 보니 적당한 기상 시간. 알람아 고맙다. 덕분에 매일 지각을 면한다. 알람을 끄고 생각해 본다. 양치하고, 세수하고, 로션 바르고, 선크림 바르는 시간 대충 10분. 옷은 금방 입고, 머리도 묶는다. 속도를 더 빠르게 하면 10분은 더 잘 수 있다. 바로 10분 뒤에 일어나는 알람을 맞춘다. 아침에 10분은 진심으로 소중하다.
또 눈이 떠진다. 이번엔 찜찜한 상태로 눈이 떠졌다. 사실 처음 눈 뜬 것도 그렇게 개운하진 않았다. 내일의 나를 믿고 어제의 내가 늦게 잤기 때문이다. 왜 자기 전에 그렇게 재밌는 영상들이 알고리즘으로 뜨는 건지. 유튜브야. 해명해라.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출근이란 뭘까. 회사는 왜 다니는 거지. 난 왜 돈 많은 백수가 아닌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서민으로 태어난 걸까. 흙수저는 동수저도 될 수 없는 건가. 매일 아침 이렇게 불행하면 안 되는데. 그럼 회사를 관둬야 행복할까? 고정지출 없이 살아갈 수 있어, 나 자신아? 세수하러 가는 그 짧은 시간에 뇌를 관통하는 생각들. 내일 아침에도 똑같이 관통하겠지. 사람은 참 일정하다.
그래도 양치를 하고 나니 잠이 달아나고 한 4분 전보다 밝아졌다. 물론 긍정적으로 변한 건 아니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튼다. 잔잔하지 않고, 적당히 빠른 템포여야 준비할 때 속도를 맞출 수 있다. 이럴 땐 팝송이 좋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를 수 있다. (정확한 가사가 아닌 허밍 정도)
옷을 껴입는다. '껴입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껴입지 않고서는 세상에 맞설 수 없다. 아. 세상이 아니라 추위에. 그래도 지난주까지는 따뜻했는데, 비가 며칠 오더니 바람도 춥고 공기가 추워졌다. 올해 겨울은 진짜 춥다던데.
문 밖을 나서는데 이상하다. 북극에 온 것 같다. 나 분명 세 겹 이상 껴입었는데 이거 실환가? 거짓말. 아직 실내인데 이렇게 추울 리 없어. 현실을 부정하며 역으로 향한다. 아직도 부정 중이다. 아마 퇴근 전까지 부정하겠지. 내 삶을 부정할 순 없으니까 이 갑작스러운 추위를, 모두 같은 표정으로 서있는 지하철을, 내 옆에서 나에게 일을 시키는 사수를 부정한다.
점심시간은 고통이다. 나에게 희망을 주니까. 이제 밥을 먹고, 자리에서 조금 졸면 네 시. 두 시간 뒤면 퇴근이다. 퇴근. 퇴근이래! 내 안의 내가 소리를 지른다. 퇴근하면 뭐하지? 퇴근하고 카페 갈까? 할리스에 가서 시원한 바닐라 딜라이트를 마시면 다음날 출근을 버틸 수 있을지 몰라. 할리스에서 나와 시장에 들러서 맛있는 반찬을 사가자. 자주 가는 반찬가게에 들르면 가끔 서비스를 주시니까, 이번에 조금 기대하고 가볼까? 추우니까 따뜻한 찌개도 땡기는데 찌개는 배달의 민족으로 시킬까?
일도 끝내고, N스러운 상상도 끝내고 나니 퇴근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힘이 빠진다. 지금, 몇 분째 지하철이 안 온다. 와야 할 지하철은 안 오고 사람들만 늘어나고 있다. 여기 에버랜드인가? 폭탄세일을 앞둔 마트인가? 계단까지 줄 서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뒤에서 누군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 지하철 파업이라고?
하필 오늘? 약속도 없지만 하필 오늘 지하철 파업을 했단다. 하늘도 무심하셔라.. 1초 2초 3초. 현실을 자각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래. 하염없이 오지 않는 지하철을 기다려봤자다.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오른다. 세상에 이동수단이 지하철만 있는 건 아니다. 버스도 있고, 택시도 있고, 좀 더 가성비로는 따릉이도 있지. 그치만 반찬가게에 들러야 하니 힘을 빼면 안 된다. 버스를 타기로 한다. 사실 지하철보다 버스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하철을 못 탄 사람들이 다 올라왔는지 버스도 꽉 찼다. 지하철로 15분이면 가는 거리를, 버스로 25분 간다. 10분을 포기한 거다. 그치만 어쩔 수 없지. 아마 지하철을 기다렸으면 10분에 10분을 더하고, 또 10분을 더했을지도 모른다.
버스로 더 걸리는 10분 동안 생각했다. 누군가의 파업은 이유가 있는 파업이다. 나도 을, 아니 병, 아니, 정의 정의 입장으로서 그들의 사정이 이해가 된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순 없지만, 노조가 파업하는 이유가 뻔하지. 근무환경 개선과 관련된 것 아니겠어. 양쪽의 입장차이가 있으니 파업을 했겠구나 싶다. 그쪽도, 저쪽도 다 이해가 된다. 양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겠지. 모쪼록 잘 해결되길 바란다. 그동안 나는 버스를 애용해야겠다. 악. 버스도 파업하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