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선이는 한참을 비상구 계단에 앉아있었다. 집에서 나온 게 몇 시쯤이더라. 지금은 몇 시지? 휴대폰을 꺼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일부러 책상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은 휴대폰이 생각났다.
- 그냥 가지고 나올 걸 그랬네.
휴대폰이 없으니 1초가 1분처럼, 아니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지루하다. 혜선이는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해본다. 좋아하는 가수가 다음엔 어떤 컨셉으로 컴백할지, 어떤 춤으로 챌린지를 하고 다닐지, 어떤 컨텐츠로 혜선이를 즐겁게 해줄지.
몇 층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또 열렸다가 닫힌다. 이 건물은 혜선이가 자주 오는 스터디 카페 건물이다. 4층에 스터디 카페와 1층에 프랜차이즈 카페, 2층에 한의원 외에는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 건물을 택했다. 비상구에 앉아있는 교복입은 학생을 마주칠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비상구 계단을 이용한지 좀 오래 됐다. 언제부턴가 혜선의 아버지의 퇴근 시간이 빨라졌고 그만큼 혜선을 괴롭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원래는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스터디 카페에 왔지만, 용돈을 줄일 거라는 아버지의 통보에 스터디 카페 이용권을 연장할 수 없게 됐다. 혜선은 이럴 때 친구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있었다면, 친구와 스터디 카페 같이 다녔다면, 이용권을 연장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을 게 뻔하니까.
아버지는 나라에서 받는 지원금의 일부를 혜선에게 줬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혜선은 그걸로 교복 수선을 맡기거나 체험학습비를 내거나 수행평가에 필요한 준비를 사거나, 생활용품을 사고는 했다. 스터디 카페를 연장하지 못한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혜선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괴롭힘은 집안일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혜선의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할 방법도 없었다. 혜선의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퇴근하면 밥솥에 꼭 밥이 있어야 했고, 싱크대에 설거지도 없어야 했으며 방도 항상 깨끗해야 했다. 어디서 일하는지도 알 수 없는 아버지 대신에 집안일은 혜선의 몫이었다.
혜선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옥상으로 향했다. 비상구 계단은 익숙했지만 옥상을 가본 적이 없다. 옥상문이 보이자 혜선은 스스로가 웃겼다.
- 나 꼭 삶을 포기하는 웹툰 주인공 같네.
혜선이 알고 있기론 웬만한 건물의 옥상문은 안전을 위해 닫아 놓는다고 했다. 근데 이 건물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건지 문이 한 번에 열렸다. 조금 허무했다. 마치 삶을 포기하게 하려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혜선을 이끄는 것 같았다. 점점 상황이 심각해졌다. 혜선은 무서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정말. 그렇다면 아버지는 슬퍼할까? 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래도 선생님은 날 위해 울어주겠지.
혜선이 걸음을 옮겨 건물 아래 쪽을 보려는데, 빨간색 문구로 된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추락주의'.
- 추락주의.
단어를 눈에 담으려던 혜선은 직접 말해봤다. 추락주의.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발을 헛디뎌서, 발이 미끄러져서, 발에 힘이 풀려서, 혹은 풀리도록 냅둬서? 아니면, 누군가 밀어서? 혜선은 이러다가 현실이 자신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너무 아까웠다. 혜선이 공부한 것들, 힘들게 유지한 성적, 가까운 시일 내에 컴백할 혜선의 최애 그룹. 광고 없이 영상을 보기 위해 우회해서 프리미엄에 가입까지 해놨다. 우리나라 계정이 아닌 외국으로 계정을 설정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프리미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초가을의 바람은 그저 시원했다. 그리고 혜선은 생각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현실이 자신을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더라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혜선은 언제나 그랬다. 항상 이겨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다시 옥상문을 닫았다. 혜선을 헷갈리게 하는 '추락주의' 문구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처음 비상구 계단에 왔을 때와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내려간다. 아까는 다른 방식으로 1층에 갈뻔했지만, 역시 스스로 걸어서 가는 게 옳은 방법이겠지.
밖으로 나오자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혜선이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혜선은 미소지었다. 이것 봐. 사람이 언제나 최악일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