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겨진 숲 속

by Anton Choi
숲은 나의 첫 친구

또 다른 오래된 기억!


나는 아버지의 양팔에 안겨 가파른 밭길 사이를 지나 산으로 향하고 있다. 아버지는 나를 안은 채 지게까지 지고 계신다. 아버지가 나를 가슴에 안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셨으니,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인가 보다. 누나들은 학교에 갔을 것이다. 막내 누나와 네 살 차이였으니, 누나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아버지와 어머니 외에는 어린 나를 돌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안았다가 힘에 부치면 내려놓고, 조금 걷게 했다가 다시 안고, 또 내려놓는다.

나는 황톳빛 돌 부스러기가 자잘하게 깔린 산길에서 부지런히 행진하는 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봄날의 따스한 햇빛에 반사된 무지개 빛 날개를 뽐내는 풍뎅이를 잡아 보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멀리 앞서가는 아버지를 놓칠까 봐 뛰어가 다시 안긴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며 숲 속으로 들어간다.


숲에 들어서면 나는 개울가에 홀로 남겨진다. 개울 가장자리에 축축이 젖은 낙엽을 밟고 앉아 물놀이를 하고, 모래를 만진다. 아버지가 집채만 한 나무짐을 지고 숲을 내려올 때까지 반나절을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낸다.


놀다 보면 등 뒤에서 서늘하고 어두운 뭔가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아버지를 큰 소리로 부른다.


“아부지, 아부지 어딨어? 언제 와?”


그러면 골짜기 저편에서


“어, 다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그러고도 한참 있다 당신 몸보다 큰 나무 다발을 한 짐 짊어지고 내려오신다. 개울에는 가재도 있었고, 다슬기도 있었다. 숲을 울리는 아버지의 육철낫 소리도 있었다.

숲에서 가장 흔한 땔감은 소나무였다. 잡목은 땔감이 되지 못했다. 오래 타는 장작도 소나무, 중간 불을 만드는 것도 솔가지(소나무 가지), 화력이 좋고 휘발성이 강한 땔감 역시 솔가리(소나무 잎)이었다.


솔가리를 모아 커다란 뭉치로 만드는 일은 예술에 가까웠다. 솔잎을 갈퀴로 모아 시루떡 모양의 직육면체로 만든 뒤, 그것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 커다란 한 개의 덩어리로 만든다. 그 덩어리를 칡넝쿨등으로 단단히 묶으면, 원통형의 가리나무 뭉치가 된다. 그 큰 나무 뭉치를 머리 위에 이고 집까지 옮기는 일은 온전히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산감이라도 나타나면 논두렁 한구석에 숨을 죽인 채 가리나무와 함께 몸을 숨겨야 했다.


산감은 그 시절 내가 알던 공권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풍성한 산림 조성을 위해 솔잎은 소나무에게 최고의 거름이었고, 연탄이나 석유 보일러가 보급되기 전에는 최고의 불쏘시개이자 연료였다. 산감이 떴다는 소문은 자주 들었지만, 누가 적발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은 없었다. 간혹 신작로를 오른던 동냥아치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불을 피웠다가 산을 몽땅 태워 먹고 잡혀갔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산감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산감은 내게 보이지 않는 공포였다. 산감은 산림감시원의 줄임말이었다.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일까. 그런데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기억이 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일까. 어머니에 대한 첫 기억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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