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님이의 겨울

죽은 이와 살아 남은이의 겨울

by Anton Choi
죽은 이와 살아 남은이의 겨울

지워진 줄만 알고 있던 기억이 문득 살아난다.

고리처럼 이어진 시간을 더듬다 보니 없어진 줄만 알았던, 기억 속에 없다고 믿었던 기억들이 줄줄이 역여 올라온다.

방앗간 앞 너른 마당에서 내가 한눈팔고 놀고 있으면 만수는 어디서 왔는지 어김없이 등 뒤로 다가와 내 바짓가랑이를 내려버리곤 했다. 요즘 같으면 성추행으로 고발하고도 남을 일이지만, 그때는 그저 상대를 놀라게 하고 웃기려는 짓궂은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그곳은 방앗간이 아니라 정미소였다. 용도는 같았지만 풍경은 전혀 달랐다. 정미소 안에는 수많은 벨트와 톱니바퀴가 맞물려 제법 그럴싸한 플랜트를 이루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덕지덕지 감싸 안은 녹슨 양철 조각들이 그곳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정미소 앞마당은 볏짚과 왕겨가 바람에 날려 굴러다니는 흙바닥이었다. 우리 집 앞마당보다 조금 넓은 그곳은 운동장이었고 놀이터였으며, 명절이면 콩쿠르가 열리고 꽹과리와 징이 함께 울어대던 자리였다. 때로는 누군가의 영혼을 달래는 굿판이 되어주기도 했다. 정미소 뒤편 조그마한 슬레이트집에는 어머니를 누나라 부르던, 나보다 두 살 많은 종인이 삼촌이 살고 있었다. 남자아이들보다는 여자 아이들과 더 잘 어울려 놀았기에 우리는 그를 꽃님이라 불렀다. 그는 잘 웃었고 몸이 유연했으며, 움직임이 민첩했다.


꽃님이의 집은 작고도 작았다. 손바닥만 한 마루의 절반은 못과 대패, 톱과 장도리, 먹줄 같은 목수의 연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꽃님이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목수가 제 집은 못 짓는다더니, 소 마구간으로나 족할 만큼 경사지고 길고 좁은 터에 집을 올려놓았다. 그 때문이었던 걸까? 꽃님이는 그의 집 좁은 마당 대신 늘 정미소 앞마당으로 나와 놀았다. 꽃님이는 마당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놀이를 잘했지만, 특히 고무줄놀이와 독집기, 그러니까 공기놀이에 능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공기 여섯, 일곱 개 정도는 실수 없이 집어 올렸다. 오자미 놀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날렵한 몸짓으로 콩주머니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와의 놀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차츰 뜸해졌다. 그가 다시 내 기억 속으로 선명히 들어온 건, 그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더운 여름날, 우리는 여수 전남병원으로 그를 면회하러 갔다. 어린 시절 정미소 앞마당에서 함께 뒹굴며 놀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여수행 버스에 올랐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거칠고 벌건 속살이 실금 사이로 드러난 손을 맞잡고 놀던 아이들이었다. 가는 길 내내 문병길도 여행은 여행인지라 설레었다가, 꽃님이 걱정에 침묵하기를 반복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생전 처음이었다. 벽은 온통 하얗고 소독 냄새가 가득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꽃님이는 입술이 조금 말라 있었을 뿐 여전히 쾌활했고 수다스러웠다. 신장이 안 좋다는 말만 들었다. 신장이 심장과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알지 못했다.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병원을 떠나왔다. 그리고 그와의 놀이가 끊어진 뒤 그동안 각자 무심히 살아왔던 것처럼 그는 또다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잠시 멀어졌다.


그해 늦은 가을, 그는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같으면 돈만 있으면 남의 신장을 사서라도 이식한다지만, 형제가 위로 넷이나 있음에도 그가 이식을 받지 못한 건 당시의 의술과 감당하기 어려운 수술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왕겨 날리던 정미소 마당이 아닌, 손바닥만 한 목수집의 어두운 아랫목에서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를 벗 삼아. 겨울 처마 밑에서 녹아내리던 고드름은 그에게 남은 시간만큼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비록 아픈 몸으로 살아가더라도, 차가운 고드름이 되어서라도 녹아내리지 않고 봄을 맞이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드름은 약한 존재였다. 약간의 기온 상승에도 쉽게 녹아내려 없어지거나, 용케 길이를 키우더라도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조각나고 말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유를 사 들고 그의 집에 문병을 다녀왔다. 얼기설기 대나무를 격자로 엮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마루 건너 방문을 열어보니 방 안을 차지한 어둠보다 더 검은 낮 빛을 한 채 그가 누워 있었다. 그는 퉁퉁 부은 얼굴로 한참을 누워 있다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누나 왔는가? 나는 누나가 문을 열기도 전에 뭘 사 왔는지 알고 있었다니까, 냄새가 났어, 비릿한 우유 냄새가.”


그렇게 꽃님이는 그 겨울을 견뎌내다, 쌀보리 잎이 찬바람의 손아귀를 벗어나 보드라운 윤기를 드러내고 졸졸 흐르는 냇가 바윗돌 사이에서 버들강아지가 탐스럽게 몸을 부풀리던 무렵 세상을 떠났다. 소년 티를 갓 벗은 열일곱 청년은 상여도 없이 최소한의 의식만 치른 채 하늘나라로 갔다. 녹슨 정미소와 허물어져 가는 마을 앞 게시판을 지나, 아무도 뒤 따르는 이 없이, 상여를 어깨에 멘 형제들의 곡소리만 남긴 채 묘지로 향했다.

그가 떠난 지 30년도 더 지났건만 나는 아직 여기 있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다’, ‘재미없다’, ‘살기 힘들다’, 심지어는 ‘살기 싫다’고 투덜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