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작
기억의 시작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일까?
아주 어릴 적 몇몇 장면이 떠오르긴 하지만,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추수하는 날이었다. 탈곡기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였을까. 밤 열 시도 훌쩍 넘은 시간, 모든 가족이 논 가운데 가득 쌓인 벼 다발을 탈곡하고 있었다. 춥고 어두웠다. 어린 나는 아직 마르지 않은 흙냄새와 풋내가 가시지 않은 벼 냄새를 맡으며 볏짚더미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탈곡기의 동력은 발동기였다. 탕탕탕, 발동기 소리는 아직 마르지 않은 논바닥과 여물지 않은 내 가슴을 힘차게,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탈곡기와 발동기는 무른 논바닥에 나무 말뚝으로 겨우 고정해 놓은 터라 둘을 연결하는 벨트는 수시로 벗겨졌다. 그래서 그 시절의 탈곡은 더디기만 했다.
나롱나롱.
탈곡기가 발동기를 만나기 전, 탈곡기의 동력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드럼통 크기의 원통에 U자 모양의 철핀이 촘촘히 박힌 기계를 사람의 힘으로 돌리는 장치였다. 발의 움직임에 맞춰 원통이 돌아가며 내는 소리가 나롱나롱이었다.
발동기는 사용 목적에 따라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특히 동네 방앗간의 발동기는 그 크기부터가 남달랐다. 검은 기름을 잔뜩 머금은 무쇠 괴물 같았다. 그 발동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 손으로 그 무쇠 괴물을 순한 양처럼 다루는 방앗간 집 막내 아들이었다. 그는 커다란 무쇠 원을 거침없이 돌려 시동을 걸었다. 처음엔 쇳덩이가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다, 일단 미동하기 시작하면 제 움직임에 흥이 난 듯 가속을 붙여 돌았다. 탕~ 탕~ 탕~ 1초에 한번 정도의 속도로 소리를 내며 더디게 돌다, 곧 탕탕탕탕 경쾌한 연음을 내며 돌아간다. 그러면 발동기와 연결된 벨트로 동력이 전달되어 잠자고 있던 거대한 방앗간이 살아 움직인다.
만수는 방앗간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골탕 먹이려 들었다. 그래서 내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만수였다.
방앗간 집 막내 아들, 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