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운동회 풍경
달리기와 악몽
초등학교 운동회는 면민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청군, 백군, 소고, 기마전, 박 터뜨리기, 그리고 100미터 달리기! 조별로 3등 안에는 들어야 공책 한 권이라도 받아 갈 수 있었는데 초등학교 6년 내내 한 번도 순위권 안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가 싫었다.
아무리 멀리, 빨리 달려 보려 해도 친구들은 늘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달리기에는 애초부터 소질이 없었다. 초등학교 취학 전 나를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학교에 가는 누나들을 뒤 쫓아 갈 때는 꾀나 발이 빨랐다고 한다. 그 후로 내 달리기 실력은 급격히 퇴화했다.
달리기는 내 어린 시절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꿈에서도 나는 가끔 달렸다. 꿈속 달리기 역시 최악이었다. 아무리 발을 멀리 뻗어도, 아무리 팔을 힘차게 휘저어도 허공에 매달려 헛발질하는 것처럼 나는 전진하지 않았고 발은 무거웠다. 마치 슬로 모션으로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끝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봄 운동회는 들판에 모내기 한 지 얼마 안 된 벼들이 연두색 어린 빛을 벗고 진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으려는 시기에 열렸다. 이때가 시골은 조금 한가해지는 시기였다. 열병식에서 사열하는 병사들처럼 줄지어 자리 잡은 어린 모들은 단단하고 씩씩했다. 논바닥은 가뭄 후 비로소 풍족해진 물들로 가득 차 있다. 꽉 채워진 물을 믿고 벼는 더욱 곧게 설 수 있었으리라. 벼 논은 파란 하늘과 구름을 거기에 담아 또 다른 우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우주는 물을 가둔 논의 수만큼 많았다. 그 시절 오후 늦게 집에 가는 길에는 논에 비친 검은 앞산의 그림자가 구름 대신 나를 소리 없이 따르곤 했었다.
점심시간
모내기 후 열리는 운동회는 마을 잔치였다. 운동장의 가장자리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많았다. 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는다. 그 순간은 고된 노동의 기억도, 어떤 아픔도 사라지고 없었다. 깔깔대는 웃음과 시원한 바람과 서로 뒤섞여 하나가 된 음식 냄새만 있었다. 철없던 저학년 시절 운동회는 내게 그랬다.
식사 장소에는 선생님들도 번갈아 들러서 음식을 함께 나누곤 했다. 부모님들은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자식의 선생님이니까!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면 소재지가 관광지로 개발된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읍내로, 시내로 가는 버스 운행 횟수가 늘고 필요 없어 보이는 신규 노선도 생겨났다. 학교 주변으로 식당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그중의 하나가 자장면 가게였다. 다들 거의 처음이었을 자장면을 먹어 본 경험담을 늘어놓는 친구들의 숫자가 늘어 갔다. 학교를 마치고 자장면 가게 앞을 지나면 주방장은 유혹이라도 하듯 하얗고 길고 두툼한 밀가루 반죽을 양손 끝까지 늘렸다가 도마 위에 내치기를 반복했다. 그게 면이 되는 것이 신기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운동회 때도 손수 준비한 가정식 대신 학교 밖 식당을 쉽게 이용했다. 나는 운동회를 계기로 자장면을 꼭 먹어 보고 싶었다. 그때는 운동회에 어머니의 참석이 뜸해졌지만 나는 어머니가 운동회에 와서 자장면을 사 주기를 바랐다.
어머니와 자장면
그해 운동회에 농사일로 바쁜 어머니를 자장면 하나 때문에 점심시간에 맞춰 학교로 오게 했다. 자장면 가게는 대목을 맞아 무척 붐볐다. 자장면은 한 그릇, 어머니는 드시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익숙한 GOD의 노래 가사와 같은 상황있다. 내 앞에 놓인 자장면은 혼자 먹기에 너무 많은 양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나의 고집으로 일부러 시간을 내 자장면을 사 주러 오신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자장면은 목을 꽉 막고 들어가지 않았다. 남기지 않으려고 억지로 밀어 넣은 자장면은 게워내 다시 나올 것만 같이 내 속을 불편하게 했다. 어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짤막한 한마디만 건네신 후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맛있냐?”
자장면 한 그릇 때문에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를 오시게 했으니 맛있게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어머니께 미안했다.
‘자장면이 뭣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