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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Jun 08. 2019

일본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한국의 30대 남성이 일본 도시에서 찾는 어린 시절의 향수

몇 개월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사진 몇 장이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신촌, 홍대 거리의 90년대 모습을 촬영한 사진인데, 마침 그 지역은 내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이고 놀러 다니던 장소였으며, 20대에 대학생활을 하던 캠퍼스였고, 30대가 된 지금도 공연과 일 때문에 자주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장소는 모두 내가 익숙한 장소였으나, 내가 새삼 놀란 이유는 그 풍경이 주는 이질감 때문이었다. 너무도 자주 들르던 장소가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버린 현재 모습과의 괴리로 인해 한 눈에는 어디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았고, 몇몇 사진은 마치 도쿄나 오사카의 거리 같았다.

그 이질감에 대한 내 자의적 분석이 끝날 무렵, 그동안 내가 일본 여행을 그렇게 자주 가게 된, 아니 여행에서 돌아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장소임에도 다시 가고 싶다는 충동에 그렇게 자주 휩싸일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 큰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나는 일본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이 내게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일본이 한국과 공통점이 많고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하나 고향에서도 아니고 타국에서 향수를 느낀다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나는 일본 도시와 그 동네의 풍경이 내가 10대 시절을 보낸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서울과 매우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외국인이 출판이 5년 이상 지난 여행 책자를 들고 관광지나 맛집을 탐색한다면 그 장소에 실제로 도달하게 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당장 저 위에 언급한 홍대와 신촌 거리만 해도 내가 5년 전쯤에 즐겨 들르던 장소의 80-90%가 문을 닫거나 가게를 이전했다. 초등학교 시절 커다란 시장이었던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거리의 상징과도 같았던 제과점은 프랜차이즈 카페로 변했고, 공연하던 라이브클럽의 6, 7할이 치킨집으로 바뀌었다. 인디 문화와 젊음을 상징하는 홍대, 세련됨의 상징 청담, 고풍스러운 매력의 삼청동이라는 각 구역이 내세우는 표면적인 캐치프레이즈와는 무관하게 서울의 핫플레이스들은 실제로는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커플과 술 마시고 취하기 위해 나돌아 다니는 젊은이들의 지갑을 노린다는 공통점만으로 묶여있다.


 반면, 여행 장소가 도쿄라면 5년 전 여행 책자로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그 실패의 확률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 것이고, 오사카라면 큰 불편감 없이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는 일본 제1의 도시이니만큼 변화가 빠른 편이지만 전체적인 거리의 풍경이나 각 구역의 특색을 여전히 10년 전과 거의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오사카는 첫 방문이었던 2012년과 비교해봤을 때 자주 들르는 점포들의 특색이나 위치 등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대도시이니만큼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한국에 비해 아주 많이 느리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은 사람들의 생활습관이나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도쿄나 오사카의 지하철에서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20대, 30대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이 한 손에 핸드폰 대신 작은 책 한 권을 들고 읽는 모습을 꽤나 자주 볼 수 있다. TV를 틀면 나이 든 개그맨들이 20-30년 묵은 유행어를 외치고 있으며, 여전히 세일러문과 파워레인저가 지구를 지키고 있다. 대도시의 주요 길목에 포진한 유명 체인인 Tsutaya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DVD 대여를 주 업으로 삼는 곳이다.

 내가 오사카에서 단골집처럼 들르는 장소 중에 아라비야라는 커피 전문점이 있다. 무시무시하게도 첫 오픈 연도가 1951년도이다. 내가 처음 들르기 시작한 2012년도부터 지금까지 가게의 인테리어도, 커피의 맛도 한결같다. 특별히 그 커피의 맛에 중독되었다거나 아베 신조 총리와 닮은 얼굴의 주인과 딱히 친해져서 매번 들르는 것은 아니다. 깔끔한 외견의 최신식 커피 전문점이나 프랜차이즈와는 달리 허름하지만 한결같고 친근한 분위기가 있고, 거기에 뭔가 아련함이 있기 때문에 끌린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카페 근처의 유서 깊은 경양식 집 하리쥬에서는 오사카의 멋쟁이 노인들이 함박 스테이크와 카레를 앞에 두고 칼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바로 옆에 있는 가부키 공연장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풍경을 포착할 수 있다. 거기에서 도보 10-1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전자상가 및 오타쿠의 거리 덴덴타운에서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장식했던 전대물과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로봇들의 장난감을 구경할 수 있다. 오사카보다는 덜하지만 도쿄에서도 1923년부터 지금까지 운영되어온 클래식 LP카페인 시부야 라이온,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덴뿌라 전문점 등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온 수많은 가게들을 마주할 수 있다.

지인들과 이따금 서울에서 운전하고 다니다 보면 “앗, 나 여기 어릴 때 살던 곳인데. 그런데 지금 보니까 어디가 어디인지 하나도 못 알아보겠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는 비단 그들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서라는 것이 이유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일본 여행이 처음인 친구들을 데리고 일본 도시의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에는 “여기는 되게 예전 서울 같네.”라는 말을 또 듣는다. 일본 대도시의 시간은 한국의 대도시의 시간보다 느리게 흘러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나, 적어도 이따금 방문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끊을 수 없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DVD/비디오를 대여하고 문구점에서 부모와 자식이 함께 장난감을 고르고, 응답하라 1988에나 등장할 법한 오래된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담배를 물어 피우는 그들의 일상을 보면서 나는 이따금 내 어린 시절과 10대를 추억하게 된다.  그 한결같은 모습에는 파리나 피렌체의 고풍스러운 멋도, 뉴욕과 같은 거대 도시의 웅장한 맛도 없지만, 어딘가 설레는 마음으로 비디오 대여점에 걸어가던 길의 예전 동네 뒷골목을, 로봇 장난감을 많이 갖고 있던 위층 부잣집 형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던 내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련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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