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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Jun 13. 2019

가끔씩 생각나는 그곳: 구라시키

인간미와 아담함의 미덕이 있는 따뜻한 관광도시

일본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은 흔히 두 가지 부류, 본인에게 익숙해진 코스를 편한 마음으로 반복적으로 왕래하는 사람과 여행객에게 덜 알려진 코스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유형으로 분류된다. TV 방송에 한 번 나온 이후에 이전보다 유명해져서 이제 일본의 숨겨진 여행 명소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엔 어려운 감이 좀 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부류의 여행객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장소가 바로 이 구라시키라는 곳이다.

구라시키는 일본의 소도시 오카야마 근처에 위치한 곳으로 일본의 타 유명 관광지에 비해서는 접근성이 다소 까다로운 편이다. 한국에서의 비행기 왕복이 잦지 않은 오카야마 공항으로 접근하는 사람보다는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여 오사카/교토 여행과 겸해서 스케줄을 잡는 사람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사카에서 오카야마까지 45분, 오카야마에서 구라시키까지 20분,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까지 더하여 총 1시간 30분 정도면 철도를 통해 접근할 수 있으니 간사이 지방 여행객에게 근교 여행으로는 썩 나쁘지 않은 코스이다. 물론 교통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JR 패스는 미리 사놓는 편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라시키의 관광포인트가 되는 중심가는 미관지구라고 불리는데, 이 지역은 국가에서 보존지구로 선정되어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그 가운데를 작은 구라시키가와 강이 운치 있게 흐르고 있어 계절과 상관없이 고즈넉하고 그윽한 경관을 자랑한다. 시간과 예산에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강 위의 나룻배 관광선을 타고 즐길 수도 있다. 거리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위치해 있고, 작은 박물관과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들, 1700년이 넘은 신사 등이 있지만 어느 한 명소가 절대적으로 볼만하다기보다는 거리 자체, 그 전체가 하나의 관광 스폿으로 매력적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단,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그 어느 관광 명소보다도 필히 방문해야 하는 곳이 있는데, 이는 바로 오하라 미술관이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와 클로드 모네의 ‘수련’ 등 전시 작품들의 수준도 높은 편이며, 일본 최초의 사립 서양 미술관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는 명소이다. 다소 소박한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거리 가운데에 우뚝 높이 서있어 건물 자체도 눈에 띄는 편이다. 도쿄나 오사카의 대형 미술관에 비교해도 작품의 퀄리티나 미술관 자체의 분위기가 뒤지지 않는 곳이니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자주 일본 여행을 다니다 보면 현지인들과 이따금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을 할 때가 있는데, 구라시키는 적어도 내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이 가장 정이 많고 친절했던 곳이다. 흔히 도시 사람들이 어떻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고 하는 선입견을 많이 갖게 되는데, 구라시키의 사람들은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굉장히 세련되고 교양도 넓으면서, 대도시 도심에 거주하는 이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정이 많고 낯선 사람도 살갑게 챙겨주는 모습도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인지, 타지방 소도시에 비해 세련되고 안정된 역사의 흐름이 사람들을 여유롭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의 매력으로 나를 재방문하게 만든 지역은 구라시키가 유일하다.

구라시키는 소도시인만큼 볼거리가 엄청나게 많다거나 규모가 크다거나 쇼핑천국이라 할 만한, 통상적인 개념의 관광명소와는 거리가 있다. 규모만으로 봤을 때는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를 투자하면 다 돌아볼 만큼 작고, 오하라 미술관 정도를 제외하면 꼭 봐야 하는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일본의 옛 거리의 모습과 정서를 소박하면서도 세련되게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조용히 길거리를 거닐고 풍경과 분위기를 즐기다 보면 떠나기 아쉬워지고,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이따금씩 생각나는 곳이니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꼭 들러보길 추천한다.


P.S.: 개인적인 애정과 추억이 많은 소도시 구라시키는 2018년에 큰 홍수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이재민과 사망자/실종자들도 발생되었고 한동안 굉장히 혼란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안정되고 관광도 정상화되었다고 하니 방문의 의사가 있는 이라면 주저 없이 들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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