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밴드의 첫 해외 공연 경험기 #5

둘째 날공연 in안티노크신주쿠

by 핵보컬

둘째 날 공연은 원래 덤이었다. 기존에 처음부터 계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왕 간 김에 한 번만 하고 돌아오기엔 아깝다고 생각돼서 추가로 잡은 공연이다. 그러기에 그냥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하기로 했으나, 문제는 공연 라인업이었다. 우리 음악은 동요 & 팝처럼 들릴 정도로 잡혀있는 모든 팀들이 다 지독하게 헤비한 음악을 하는 팀들이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보통 관객들이 밴드의 분위기를 따라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빡센 음악을 하는 밴드들의 고정 관객일수록 그만큼 빡세지 않은 밴드에 대한 시선이 안 좋을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팀 개수가 11팀이었다. 지독하게 긴 공연이 될 예정이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05.jpg Antiknock의 무대 전경

물론 우리 측에서도 마냥 안일하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은 아니었고, 나름 준비를 했다. 첫째 날 곡 라인업에 비해 둘째 날 라인업은 우리 곡 중에 더 '쎈' 곡들을 중심으로 구성했고, 이 날 서는 팀 중 한 팀인 NILIEKANAI와 미리 컨택해서 콜라보/합동 무대도 준비했다. 우리 곡 중 한 곡의 가사를 일부분 일본어로 개사해서 직접 녹음해서 그쪽에 보내주는 등 사전 준비를 마쳤다.


규탕(우설/소의 혀를 요리한 것)을 사랑하는 키보디스트 정헌 군의 의지로 점심식사를 백화점 식당가 규탕 집에서 마치고 공연장에 도착하였다. 안티노크는 꽤 큰 공연장으로 밖에는 다수의 관객이 식사를 하며 대기할 수 있는 꽤 큰 홀이 있고 내부 공연장도 Crescendo에 비해 1.5배 정도 큰 규모였다. 첫날 그랬듯이 번역기를 돌려 겨우겨우 큐시트를 작성하고 리허설을 위해 무대로 올라갔다. 합동 무대를 할 NILIEKANAI의 보컬 분과 이때 처음 인사를 했는데 너무나도 예의가 바른 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리허설을 시작하자 기대했던 것보다도 너무 열심히 준비한 모습에 놀랐다. 함께 곡을 맞춰볼 수 있는 시간이 리허설 때밖에 없었기 때문에 약간 걱정했는데, 이미 수십 번 곡을 듣고 모든 파트를 완전히 숙지한 것 같은 느낌이라 수월하게 진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18.jpg 함께 콜라보 무대를 진행했던 NILIEKANAI의 보컬 분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꽤 많은 관객이 들어왔음에도 정작 무대 주변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이들은 적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밖에 나가보니 상당수의 관객이 홀에서 식사만 하고 있었고, 본인이 보고 싶은 팀의 공연만 보기 위해서 대기 중이었다. 급격하게 내적 긴장도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해외에서 온 이름도 없는 우리 팀을 보기 위해서 이들 중에 몇 명이나 들어오게 될까, 혹시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빈 객석을 바라보면서 공연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10.jpg 씐나 보인다


이에 대해 내가 세울 수 있는 대책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 대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지만)이라는 것은 바로 모든 밴드의 공연을 맨 앞에서 감상하는 것이었다. 맨 앞에서 공연하고 있는 팀 멤버들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나는 너희의 공연을 보고 있다. 너희도 있다가 우리 할 때 밖에서 밥 먹지 말고 꼭 들어와서 봐라!'라는 메시지를 무언으로 눈빛으로 전달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07.jpg 역동적인 무대의 순간!

첫날의 공연에 비해 관객들의 분위기가 다소 싸한 것도 긴장을 끌어올리는 요인이었다. 호기심에 들어온 관객이라도 무대에 올라온 밴드의 공연이 취향에 맞지 않으면 바로 나가버리는 이들이 상당수였고, 정작 본 무대에서 호응을 유도해도, 멘트에서 뭔가 개그를 쳐도 거기에 웃거나 응하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상당히 까다로운 관객들인 걸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만화 BECK에 보면 호기롭게 해외 투어를 간 주인공 밴드가 관객이 던진 맥주병에 맞고 그러던데 그 일이 오늘 나에게 벌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타국의 인디밴드들의 공연을 보는 일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인데 이 날도 독특한 팀들이 많았다. 그로울링/스크리밍 보컬만 세명인 9인조 밴드도 있었고, 대체 어디까지 빡세질 수 있을까 싶은 느낌의 그라인드코어 밴드, 시종일관 "여고생이 좋아!!"라고 외치는 독특한 아저씨들로 구성된 펑크밴드(위험한데...?) 등 각양각색의 팀들의 공연이 펼쳐졌다. 꽤나 탄탄하고 세련된 트랜스코어 음악을 선보이는 팀도 있었고, 다소 연식이 있어 보이는 음악을 하는 팀도 있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08.jpg 허... 허리가!!

우리 바로 전 팀이 무대에 올라갔고, 우리는 무대 준비를 위해 대기실로 들어가 있던 시간, 밖에서 우리 머쳔다이즈 일을 도와주던 친구가 들어와서 앞 팀이 방금 멘트에서 우리 얘기를 했다고 전달해주었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 놈들을 조져버리자!!"같은 멘트를 했을 줄 알고 긴장했으나, 전달받은 내용은 그 반대의 내용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Nuclear Idiots라는 팀이 공연하러 와주었는데, 여기에서 양국의 정치적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야유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매우 저질스러운 행동이니 온전히 관람하고 응원해주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06.jpg 공연 준비 타임... 이때만 해도 객석이 텅 빈 줄 알았다

긴장을 가득 품은 채로 무대에 올라가니 준비하는 시간 동안 객석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아,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건가.'라는 생각에 체념하고 있을 무렵, 무대 시작이 임박하니 관객들과 이전 공연 팀 멤버들이 들어와서 객석이 꽉 차게 되었다. 우리의 공연이 그들 보기에 괜찮았던 것인지 이전 밴드의 멘트 덕인지 다행히 분위기는 매우 좋았고, 어설픈 일본어와 영어를 섞은 멘트임에도 관객들이 잘 호응해주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09.jpg 허... 허리가! -2

문제는 세 번째 곡이 끝날 때 즈음에 발생했다. 갑자기 드럼 하이햇 페달이 고장 난 것이다. 다행히 고칠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수리하는 시간 동안의 딜레이와 공백이었다. 이때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침묵이 유지된다면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고, 정말 있는 말 없는 말을 총동원하여 지옥의 멘트 타임을 시작했다. 뭔가 '오늘이 일본 첫 번째 아니고 두 번째 공연인 밴드 뉴클리어 이디엇츠입니다.'와 '긴장 레벨 마구마구 상승중!!' 이런 류 멘트를 남발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 나의 노력과 절박함이 전달된 덕인지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적당히 웃어주면서 반응해주었던 것 같다(지금 막상 쓰고 보니 저거에 왜 관객들이 웃어준 걸까).


이후에는 분위기가 더 좋아져서 첫날보다도 관객들의 호응도가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관객들이 다 같이 점프도 하고 함께 손도 흔들고, 마지막곡 때 기타리스트 형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분위기가 거의 절정에 무르익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덕인지 우리가 마지막 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앵콜까지 나와서 뭔가 '이게 현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맙고 감사한 기분이었다. 물론 나의 흥분한 목은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기에 앵콜곡은 삑사리의 연발이었지만.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11.jpg 딸들아... 보고 있지?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해주었다. 이전에 한국에서 한 차례 같이 공연했던 일본 팀인 THE MORGUE의 드러머 다이스케 군과 Calaveras의 켄 상이 우리의 도쿄 공연을 응원해주기 위해 이 날 방문하였고, 함께 공연했던 팀인 NILIEKANAI의 멤버 전원이 우리의 CD를 구매했다. 또 다른 공연 팀인 Perseverance의 기타리스트 Bobb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맨 앞자리에서 응원해주며 관객 호응을 유도해줬고, 이 외에도 라인업에 있는 모든 팀, 그 자리에 온 관객들이 우리에게 호응해주었고 우리의 물건을 구매해주고 열광해주었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13.jpg NILIEKANAI의 멤버들과 함께

지금 되돌아보면 아득하고도 먼 일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많은 팀들이 해외 무대 진출을 위해서 준비를 하고 크고 작은 무대에 선다. 단지, 안일한 생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간다면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삐끗하고 망신과 의욕상실의 길을 걸을 수 있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하고 갔고, 준비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고 왔을 뿐이다. 그냥 혹시라도 미래에 다시 해외 길이 열려서 타국의 무대에 서고 싶은 밴드가 있다면 이 글을 읽고 '아 이럴 수 있구나. 이런 돌발상황이 생기는구나. 이런 건 미리 준비해야 되는구나.'라는 정보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뿌듯할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이 날의 기억들이 흐려지기 전에 기록하기 위해 이 글을 썼을 뿐이니 읽으시는 분들이 여기에서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진 마시길 부탁드린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12.jpg 씐이 난 그들의 교감

막상 다시 그 시기를 돌아보며 글을 쓰다 보니, 생각보다 쓸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고, 정작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 부분이 많아져서 기억을 더듬다 보니 마지막 글이 늦어졌다. 다 쓰고 보니 '이게 이렇게까지 쓸 내용인가? 너무 별거 없는데.'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쓴 것은 추억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2년이나 지속되어 밴드가 해외에서 공연을 하는 게 불가능해진 지금, 밴드가 공연을 하며 활동 반경을 넓히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 이 시점에서 그렇지 않았던 시기에 우리가 느꼈던 기분과 쌓았던 경험,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 더 흐려지고, 더 아득하고 모호한 과거에 방치되고 잊히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KakaoTalk_20210923_101105503_14.jpg THE MORGUE의 드러머 다이스케 군과 함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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