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다들 그랬지
코로나 팬데믹, 지구 온난화와 실체 없는 메타버스의 도래로 요즘 세상에는 혼란이 가득한 느낌이다. 날이 갈수록 더 팍팍해지기만 하는 일상과 프로레슬러 이상의 엉터리 싸움으로 편 가르기에 앞장서는 정치인들, 마치 디스토피아 SF 소설보다 더 나쁜 것 같은 요즘이지만 30대가 넘은 밀레니얼 세대의 구성원이라면 이런 상황에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우리는 90년대 말, 속칭 세기말 시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로 넘어가기 이전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90년대 후반부가 어땠는지 제 나름대로의 기억과 인상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를 흔히 세기말이라 칭했고, 당연하게도(?) 거기에 깔린 문화적 코드의 농도는 마지막 연도인 1999년에 가장 진하게 나타났다. 다양한 공상과학 소설이나 소년잡지 등에서 미래 세계의 시작으로 지정했던 21세기가 도래하기 직전이었고, 다가올 장밋빛 미래에 대한 설렘을 느끼는 낙관주의자보다는 세계의 무너짐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비관주의자가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제는 그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2000년이 되는 순간 전 세계의 전산망이 마비되어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 하였고, 많은 책자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1999년 세상은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1999의 999를 거꾸로 돌리면 악마의 숫자인 666으로 바뀐다느니, 적그리스도가 탄생할 거라느니 하면서, 막연한 공포감에 휩쓸리거나 이를 즐기거나 하며 어린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음모론에 파묻히던 시기였다.
90년대 중후반은 이런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여 공포와 SF 콘텐츠를 마구 양산하던 시기이다. 1996년에 스크림으로 시작하여 슬래셔 호러 무비가 부활했고, 전형적인 슈퍼히어로가 아닌 크로우나 스폰, 블레이드 같은 다크히어로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특정 장르로 규정지을 수 없는 하이브리드 장르의 영화들이 유독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무렵이다. SF 액션이지만 호러의 성향을 끼워 넣은 작품들(블레이드, 스폰, 엔드 오브 데이즈 등), 호러이지만 틴 로맨스와 코미디이기도 했던 영화들(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 호러인지 액션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마냥 재밌거나 괴랄한 작품들(파이트 클럽, 블레어 위치, 제5원소)이 퀄리티에 무관하게 양산되었고, 이 중에는 명작도 있고 평작 이하의 것들도 많았으나 당시에 어린 청소년이었던 내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런 영화들이 꽤나 자극적이었기에 항상 화두에 올랐다.
이런 영화들이 대부분 갖는 공통점은 영화의 퀄리티는 어땠을지 몰라도 사운드트랙만큼은 죽여줬다는 거다. 힙합, 메탈, 일렉트로닉, 모던락 등이 하나로 버무려져서 흥미로운 트랙리스트를 구성했고, 어떤 앨범들은 단순한 장르 히트곡의 컴필레이션 모음집에 그치지 않고, 아예 영화를 위해 새로 작곡한 신곡이 대거 수록되거나, 서로 다른 장르의 일인자들을 1:1로 매칭시킨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자랑하기도 했다. 특히 이 중 힙합과 메탈의 아티스트들의 콜라보로 이루어졌던 Judgment Night(엄밀히 말하면 이 시기보다 약간 전 앨범이다), 락과 EDM의 조합을 보여준 Spawn, 힙합과 일렉트로닉을 접합한 Blade II(따지자면 이 시기보다 약간 뒤 앨범이다)의 사운드트랙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반이고, End of Days나 Blade 1편, The Crow의 사운드트랙은 유명 아티스트/밴드들의 오리지널 곡을 포함함으로 인해 그 가치를 높였다.
이 흐름을 타고 세기말에 가장 크게 대박을 터뜨린 영화가 바로 매트릭스이다. 버블 경제 시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비주얼, 사이버펑크 코드와 호쾌한 액션, 디스토피아 SF를 한 데에 버무린 이 작품을 보고 나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 어떻게 영화를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지?'라고 생각하며 감탄하기에 바빴고, 마지막 장면에서 Rage Against the Machine의 Wake Up이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올 때 많은 이들이 전율을 느꼈다. 사실 오리지널 신곡도 없고, 유명 아티스트들의 기존 히트곡들의 모음집에 그치는 매트릭스 사운드트랙은 그 자체의 가치로만 보면 그리 높다고 할 순 없으나, 당시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뭘로 메탈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당시 리스너들의 적지 않은 비율의 사람들이 매트릭스 OST를 꼽았을 테니 말이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러한 OST를 통해 초기에 메탈 음악을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뉴메탈을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이 얘기를 들으면 "아니 마릴린 맨슨의 Rock is Dead나 랍 좀비의 Dragula는 뉴메탈이 아닌데 무슨 말이야?!"라고 반응을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에는 마릴린 맨슨이나 콘이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나 다 같은 부류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런 음악(힙합, 락, EDM 중 둘 이상을 짬뽕시킨 하이브리드)을 싸잡아서 미디어에서는 '하드코어'라는 한 장르로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진성 하드코어 밴드인 Agnostic Front나 Sick of It All의 팬들이 들으면 경악하겠지만 90년대 후반 우리에게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림프비즈킷, 마릴린 맨슨이 하드코어였다.
영화적으로 세기말을 상징하는 원픽으로 매트릭스를 꼽을 수 있듯이, 아마 음악적으로는 (이견이 있겠지만) 림프 비즈킷의 2집인 Significant Other를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9년 여름 발매되어 당시 락 씬뿐만 아니라 음악 씬을 뒤집어버린 이 앨범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까내려지는 측면이 있으나, 당시의 기준으로 메탈과 힙합을 가장 쌔끈하게 섞은 음악을 선보였다. 저속한 가사와 잘 빠진 사운드, 날라리/양아치 느낌의 경박한 래핑과 특유의 블랙 유머 코드가 어우러진 Significant Other는 당시에 얼터너티브 장르 이후에 딱히 이렇다 할 것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락씬에서 새롭게 메탈을 다시금 메이저 반열에 오르게 했고, 프론트맨이었던 프레드 더스트는 하루아침에 그저 그런 뮤지션에서 벗어나 레이블 간부 자리까지 차지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후 많은 밴드들이 제2의 림프비즈킷이 되고자 안달을 냈고, 더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들을 질투하거나 혐오했다. 어쨌든 이 앨범의 발표 이후, 당시에 이를 하드코어라 불렀든 핌프락이라 칭했든 상관없이 뉴메탈과 인더스트리얼이 대세로 여겨지는 영광의 시기가 도래했고, 이 불꽃은 2000년대 중반까지 짧게 활활 타오르고 꺼져버렸다.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기말 문화는 어떤 이에게는 악몽과 흑역사로(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라든지), 다른 이들에게는 추억 보정이 좀 섞인 찬란했던 시기로, 혹은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흥미로웠던 컬처쇼크의 시대로 각각 다르게 기억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다시 보면 너무 유치하거나 과할 수 있지만 요즘 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다 보면 어떤 의미로는 이때의 문화가 양질의 것은 아니었어도 어떤 의미로는 더 건강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시기의 영화나 만화, 음악에 공통된 점은 내재된 불안이나 응축된 불쾌함,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일종의 배출구로 문화를 활용하는 것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내는 것,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된다. 말 한마디의 실수,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농담 한 번으로 SNS의 세계를 통해 매장될 수 있는 시대에 솔직함은 더 이상 추천할 만한 가치가 아니게 되었다. 물론 예의를 갖추는 것, 내 말 한 마디나 글 한 줄에 누군가가 불쾌해지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당연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함을 전면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분노를 참기만 하는 사회에서 결국 불건전한 감정들은 다른 배출구를 찾아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또 다른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게 된다.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당선을 통해 인종차별이 더 심해졌고, 전 세계적으로는 젠더 싸움이 더 격해졌으며, 본래 차별과 혐오를 멈추는 데에 목표를 두어야 했던 PC주의는 반발과 논쟁과 이에 따른 피로를 불러오고 있다. 익명으로 타 젠더나 자기가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이들이 넷상에 범람하는 이 시대, 이따금씩 저속하고 유치했던 세기말의 문화가 약간은 그리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