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공연 in 기치조지 Crescendo
무대에 서는 건 늘 긴장되지만 그것이 타지에서의 라이브라면 그 강도가 몇 배로 올라간다. 나름 고정 활동 영역인 홍대에서도 그 날 관객 분위기에 따라 반응이 다른데 생전 처음 접해보는 타국의 관객들이니 분위기가 어떨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날 우리의 순서는 두 번째 순서였고, 첫 팀의 공연 때 사람들이 거의 곡이 끝날 때 박수를 치는 것 외에는 큰 반응이 없기에 ‘아, 우리 무대도 딱히 신나는 분위기는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맨 앞에는 함께 스태프로 간 친구들이 서서 응원해줄 예정이었기에 ‘그래, 적어도 몇 명은 박수 치고 응원해주겠지.’라고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했다. 인트로 연주가 끝나고, 첫 곡을 시작할 타임에 맞춰 무대에 올라갔다. 다행히 목 상태, 몸 상태가 전 날 잠을 설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기에 첫 곡을 무사히 소화했다.
사실 이 날 노래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는 건 공연 때 곡 사이사이에 할 멘트였다. 모자란 일어 실력과 구글 번역기, 파파고를 총동원하여 1차로 작성을 하고, 나보다 일어 실력이 좀 좋은 친구의 도움 및 감수를 받아 겨우 일어와 영어를 섞은 대본을 미리 준비해서 머릿속에 외워뒀는데,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도 ‘과연 이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할까’ 하는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첫 곡은 무사히 마쳤으나, 긴장이 과했던 것인지 풀린 것인지 첫 멘트는 시작부터 거하게 말아먹었다. “What’s up, Tokyo?! We are Nuclear Idiots from Ja...Korea!!(왓츠업 도쿄?! 우린 일ㅂ...아니 한국에서 온 뉴클리어 이디엇츠입니다!!)” 이 한 마디로 나는 이 시국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매국 락커로 전락해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이없는 멘트 실수로 분위기가 확 풀어지고 관객들의 표정이 뭔가 밝아졌다. 이후 곡들도 (삑사리 없이) 무사히 부를 수 있었고, 다행히 대본의 80-90%는 잊어버리지 않고 멘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관객 호응도 괜찮았고, 비트에 맞춰서 손을 흔드는 관객들도 꽤 있는 만큼 걱정했던 것보다 흥도 나고 즐거웠다.
멤버들의 흥이 과했던 것인지 곡 중간중간에 기타리스트 형과 드러머의 엉터리 일본어가 곡 사이 멘트 타임에 랜덤하게 작렬했다. “니뽄 라멘 이치방 오이시데스(일본 라멘 제일 맛있어용)”라든지 “비루 다이스키(맥주 제일 좋아)” 같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통으로 통탄할만한 문구들이 이어졌고, 다행히 현장에서는 소소한 웃음이 터졌다.
마지막 곡에서는 항례의 퍼포먼스인 기타리스트의 관객석으로 내려가서 호응 유도하기를 시전 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일본인 둘이 기타리스트 형을 둘러싸고 팔을 위로 치켜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호응을 해주었다. 사실 다른 곡 중간에도 같은 관객들이 똑같은 모션을 취했었는데, 생소한 모션이라 사실 보면서 속으로 ‘뭐지...우리에게 저주를 거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는데, 기타 리프가 좋다는 나름의 응원이었나 보다.
공연을 끝나고 대기실로 갔더니 함께 공연하는 다른 팀 보컬이 노래가 좋다며 인사를 와서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첫째 순서였던 팀 드러머는 자기의 또 다른 밴드 영상을 보여주면서 나중에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또 같이 공연했으면 좋겠다고 해주었다. 거기에 더해, 예전에 한국에 내한공연을 위해 왔을 때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의 밴드 Vorchaos의 멤버들이 합주를 마치고 응원차 들렀다며 찾아왔다. 처음 본 사람들, 혹은 한 번밖에 만나보지 못한 이들의 응원과 그 마음이 고마운 순간이었다.
몇 명의 관객이 CD를 구매하였고, 트위터에서 접하고 우릴 보러 왔다며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첫 해외 공연은 그렇게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다음 날의 두 번째 공연이었다. 어차피 첫날 공연은 무사히 마무리되었으니, 여기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갖고, 다음 날은 그냥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런 착각을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