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서막을 알리는 또 다른 비극
드러머의 갬성(?) 가득한 푸념과 기타리스트 형의 코골이로 잠을 설친 채, 아침에 일어나 대략적인 준비를 마친 밴드 멤버와 스탭 총 11인은 첫날 공연 장소인 기치조지로 향했다. 우리가 공연하기로 한 Crescendo 라이브하우스는 이전에도 현지 메탈 뮤지션들에게 개인적으로 추천을 받은 장소로,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연장은 아니지만 현지 인디 메탈 씬에서는 꽤 대표적인 공연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라이브하우스가 위치한 기치조지 역시, 도쿄 도심지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는 위치에 있으나, 2008년 드라마 '구구는 고양이다'로 대중들에게 친숙해지고, 2016년 드라마 '키치죠지만이 살고 싶은 거리입니까'의 제목에도 들어갈 정도로, 한 때 도쿄의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지역으로도 꼽혔던 곳이다.
기치조지 역 근처에는 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많았으나, 주말이라 그런지 지금처럼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없었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11명이 함께 앉을 만한 곳이 없었기에, 2~3인씩 찢어져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약 10년 전부터도 이미 유명했던 지역 명물인 사토우의 멘치까스를 먹고 싶었지만 일단은 리허설에 집중하기 위해 간단히 식사를 때우고, 리허설 2시간 전에 다시 역 앞에 모인 우리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키보드/FX 멤버가 공연장이 저쪽이라며 동쪽을 가리켰으나, 나의 휴대폰으로 위대하신 구글맵을 이용해 검색한 결과 크레센도는 서쪽에 위치했다. 그쪽으로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약간의 무안을 주고, 이래서 역시 구글 맵이 최고라고 되뇌며 모두를 이끌고 열심히 서쪽으로 걸어갔다. 공연장은 역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고, 평소라면 걷기에 무리가 없었겠지만, 한여름의 도쿄의 더위는 이전 글에도 이야기했듯이 어마무시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의 "언제 도착합니까?" "너무 덥습니다." "쓰러질 것 같습니다."라는 호소를 싹 다 무시하고 열심히 걸어간 끝에 GPS에 해당하는 위치에 도착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도착하자마자였다. 만국 공통으로, 공연 시간 전이라도 리허설 무렵의 라이브하우스 앞에는 특유의 공기가 있다. 리허설을 위해 모인 뮤지션들의 담배연기, 근처에 흩뿌려져 있는 공연 홍보 판촉물, 유독 검은 옷을 입은 인구의 밀도가 짙어진 듯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우리가 도착한 장소의 기운은 평범한 동네 골목의 사모님들의 향기가 진했다. 그 순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간판의 문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간판에 적혀있는 공포의 문구는 'Crescendo Hair Salon'이었다(...).
분노의 5단계의 첫 번째인 부정에 놓여있던 나는 열심히 '그래. 같은 건물 한쪽에는 헤어샵, 다른 쪽에는 공연장이 있을지도 몰라. 합정 모 공연장도 1층은 미용실, 아래층이 공연장이잖아?'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라이브하우스를 찾아 헤맸지만 (당연하게도) 헤어샵 외에 다른 상호는 건물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검색해보니 검색 상단에 나온 Crescendo 아래에 Live House Crescendo라는 상호가 지도에 나타났다. 키보드/FX 멤버가 처음에 얘기했던 역으로부터 동쪽으로 1.5km 위치한 곳에.
반대 방향으로 다시 3km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 일행은 정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언으로 뒤돌아서 라이브하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구글맵에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나는 조용히 일행의 맨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갔지만, 모두가 나에게 무언으로 험한 말을 외치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따금 다른 멤버나 일행의 "(처맞아도) 괜찮아. (착하지만 매우 모자란 친구라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위로와 격려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왠지 진심이 실려있지 않은 느낌이었달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공연장이었지만, 워낙에 여유를 두고 출발한 덕에 큰 차질은 없었다. 판매할 CD와 열쇠고리, 티셔츠를 판매 데스크에 깔아놓고, 한국에서 미리 작성해온 큐시트(공연 중 음향, 조명, 연출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곡별/시간대별로 기록해서 음향/무대 스태프에게 전달할 내용을 적은 문서)를 종이에 옮겨 다시 작성해서 전달하고 리허설을 위해서 무대에 올랐다.
현지에서 공연을 한국 측과 공동으로 주최한 아키야마 아저씨와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고 인사를 나눈 후에, 당일 공연의 영상을 촬영해주기로 한 분과도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리허설을 시작했다. 타지에서 하는 공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행히 현장 스태프와의 커뮤니케이션은 꽤나 원활했고, 메탈 공연 문화 자체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정착되고 발달한 일본인지라 사운드를 잡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리허설이 끝날 무렵 아키야마 씨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가운데 있는 발판을 가리키며 이게 버튼을 누르면 불도 켜진다며 웃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일본의 라이브하우스는 이런 화려한 디테일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구나 정도의 감상으로 나도 웃으며 호응해드리고 리허설이 끝난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후 준비도 시간 여유를 둔 덕에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몇 멤버는 필요한 얼굴 메이크업을 진행하고, 멤버와 스탭 중 여유가 되는 이들은 앞에 얘기했던 멘치까스를 먹으러 다녀오기도 하고, 적당히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고 함께 공연하는 현지의 타 밴드 멤버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준비는 원활했지만 처음으로 익숙한 한국을 벗어나 타국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었기에, 공연 시간이 임박할수록 긴장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이 공연 전에 있었지만, 어쨌든 도쿄에서의 첫 공연이 이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P.S.1 아키야마 아저씨가 웃으며 자랑하던 불 들어오는 발판은 당일의 본 공연에서는 본인이 당시에 매니지하던 밴드의 무대 이외의 순서에선(우리도 포함) 볼 수가 없었다. 그냥 정말로 자랑이었던 것인가. '우리는 이런 거 있지롱. 너네는 못 써.' 이런 거였나.
P.S.2 본래 3~4편 이내에 쓸 계획이었는데 아직도 본 공연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네요. 미리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작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억을 되짚으며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다 보니 쓸수록 구구절절 길어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추후 업데이트라도 조금 빨리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