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였기에 더 매력적이었던 것들

호러, 애니 & 메탈

by 핵보컬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청소년이었다면 호러, 일본 애니메이션, 락/메탈에 한번 이상은 관심을 가져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세 가지는 메이저 언론에서 다룰 정도로 당시에 열풍을 몰고 왔다. 지금도 인기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요즘은 특정 매니아들에게만 어필하는 이 세 가지가 당시에는 훨씬 많은 이들에게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었다. 더 신기한 점은 지금처럼 이것들의 보급이 보편화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역으로 구하고 보고 듣기 훨씬 힘들었다는 것이다.


호러 영화는 짙은 폭력성으로 인해 아예 국내에 수입이 안 되거나 수입되더라도 잦은 검열에 시달렸고, 등급은 대부분 항상 청소년 관람불가였기에 당시 우리가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애니의 경우에는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아예 수입이 되지 않거나 극히 제한된 수준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역시 일반적인 경로로 관람하기 어려웠다. 락/메탈 음반들 역시 청소년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선입견 탓에 금기시되는 경우가 많았고, 악마를 숭배하는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늘 따라다녔다.


이제는 보이밴드를 결성해버린 당대의 호러 아이콘들


뭐 제약이 있어봤자 얼마나 심했겠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됐던 때도 아니었던지라 정식 수입이 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없다고 봐야 했다. 1996년에 만들어진 영화 '스크림'은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 흥행을 하면서 명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학생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비윤리적인 스토리를 가진 영화라는 이유로 수입이 금지되었다가 3년이 지난 1999년이 되어서야 국내에 개봉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1998년부터 서서히 일본 문화 콘텐츠에 대한 제한이 풀리긴 했지만 무려 2004년까지 6년 동안 4차에 걸쳐 단계적으로 풀렸기에 정식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음악의 경우에는 당시에 소리바다도 있고 해서 더 낫지 않았겠나 생각할 수 있지만 p2p의 경우 구조상 누군가는 업로드를 해야만 받을 수가 있는데 애초에 많은 이들이 듣는 인기 아티스트의 음악이 아니라면 공급 자체가 되지 않았기에 매니악한 메탈일수록 신비의 영역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나 구하고 보고 듣기 힘들었을 지라도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이 금기의 영역의 콘텐츠들을 다루지 않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들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엄청났다. 미디어에서 무슨무슨 호러 영화가 짙은 폭력성으로 수입이 금지되었다느니, 일본 애니메이션이 폭력과 외설 논란을 불러일으킨다느니, 일본 어린이들이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집단으로 발작을 일으켰다는 뉴스, 사탄주의 음악을 몰래 공유하다가 누가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퍼뜨릴 때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럴까' 하는 호기심은 커져만 갔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에는 극히 제한된 정보를 접하며 이것들에 대한 흥미를 키워갔던 것 같다.


여기 나오는 음반의 주인공 카니발 콥스는 이후 두 번이나 내한공연을 했다.


지금은 '익스트림 무비'로 알려져 있는 사이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호러존/호러 익스프레스에서 당시에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공포 영화들의 대략적인 스토리, 본 이들의 감상을 읽으며 혼자 머릿속으로 '아 이 영화를 실제로 보면 얼마나 재밌고 끝내줄까'라고 스스로 영화를 상상력으로 그리기도 했다. 공각기동대, 아키라,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만화의 주제가 뮤직비디오나(이따금 m.net이나 kmtv 등에서 영화/만화 음악 뮤직비디오들을 틀어주는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스크린샷 같은 것이 뜰 때마다 보면서 실제로 이 작품을 감상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했고, 정말 가끔 교실에 무슨 락밴드의 CD를 갖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하면 그 친구에게 CD를 빌려서 테이프에 녹음하곤 했다.


인터넷이 지금만큼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늘 어둠의 경로는 존재했고 우리는 이것을 자주 이용했다. 학교 근처 문방구에서 이따금 유명 애니메이션의 VCD(정말 조악한 화질의 캠버전인 경우도 있었다)를 몰래 판매하는 걸 사서 보기도 했고, 음반의 경우에는 당시에 정말로 정식 판매하지 않는 bootleg 버전들을 어디서든 사 오는 이들이 있거나 X-Japan의 Art of Life나 Dahlia의 경우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친구들이 구해와서 친구들에게 생색을 내며 빌려주곤 했던 것 같다. 호러 영화 같은 경우에는 성숙한 외모의 친구가 어른인 척하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오거나 자주 가서 주인아저씨나 알바생 형/누나와 친해지면 몰래 빌려주기도 했던 것 같다.


일본 애니의 대표주자 공각기동대...그러나 개봉 당시에는 이미 어둠의 경로를 통해 다들 봤기에 흥행실패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공연을 여는 게 아니라 락/메탈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것만으로 어필해서 매니아들에게 장사를 하는 술집도 꽤 있었고,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조악한 캠 버전을 갖고 상영회를 열어서 전국의 마니아들이 결집해서 함께 관람한 사례도 있었다(실제로 아는 동생 한 명은 그걸 보기 위해서 집에는 수험 정보 알아본다고 거짓말하고 대전에서 상경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될 무렵에는 시험 끝나는 날에 누군가가 공포 영화 비디오를 2~3개 빌려오면 집에서 다 함께 밤새 호러영화 상영회를 여는 것이 항례의 행사였다(다들 졸려서 중간쯤에 늘 잠들게 되었지만).


이제는 넷플릭스나 기타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휴대폰이나 PC로 언제 어디서나 유명 애니메이션이나 호러 영화를 쉽게 감상할 수 있고, 애플 뮤직이나 멜론으로 웬만한 음반은 다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역에 도달하니 호러, 애니메이션과 락/메탈 음악은 매니아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전히 이것들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돌아볼 때에 나는 한결같은 취향/취미를 잘 지키고 있는 건전한 매니아인지, 아니면 어릴 때의 흥미에 고착되어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애어른인 것인지 스스로 의구심이 들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있을까. 이제는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려 각자의 인생에 충실한 삶을 보내고 있는 당시의 친구들에게 조만간 연락이나 한 번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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