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Hot Chili Peppers의 신보 Unlimited Love
6,7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락밴드는 젊음을 대표하는 상징에 가까웠다. 요즘엔 나이 든 락커들도 많고 나이가 어느 정도 차고 나서 밴드 활동을 하는 뮤지션들도(혹은 활동은 일찍 시작했으나 늦게 주목받는 경우)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락의 전성기였던 그 시대에는 참 모두 젊었다. 어릴 때 락/메탈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20대 형, 누나들처럼 느껴졌던 뮤지션들도 이제 40대에서 70대까지 접어든 이들도 있고 심지어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으니 시간의 긴 흐름을 깊이 체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포크나 재즈 뮤지션들의 경우 나이가 들고 원숙한 느낌을 내면서 중후한 멋을 음악에 녹여내고 존경받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락커들은 그렇게 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다. 일단 연주 퍼포먼스나 가창 자체가 젊은이의 체력을 요구하고 설령 몸 관리를 잘해서 기량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50-60대 중년에 학교폭력의 괴로움에 대해 부르짖거나 본인들의 이성교제 관계의 복잡성을 자랑하기는 좀 낯간지럽지 않은가.
초창기 메탈 밴드 중 살아남았던 Black Sabbath, AC/DC, Van Halen, Aerosmith, Metallica, Iron Maiden 등은 본인들의 전성기 시절의 사운드와 기량을 유지하고 그걸 새로운 앨범이나 무대에서 충실히 재현하는 데에 포커스를 맞추었던 편이다. 젊었을 때와 비교해서 느슨해짐이 없고 보다 타이트한 느낌으로 무대와 앨범을 꽉 채워 넣는 것이 곧 밴드의 죽지 않은 실력을 증명하는 길이었다. 초창기에 정립한 포뮬러를 충실히 따라갈 때에 팬들은 더 열광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지킨 팀들이 롱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보다 조금 젊었던, 80년대 중후반 혹은 90년대 이후에 데뷔를 한 팀들의 근래 노선은 약간 다른 듯하다. 몇 개월 전 발매된 Korn의 신보 Requiem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근래에 원숙미를 보이는 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는 그대로 유지하되 한 발짝 뒤에 서서 조금 힘을 뺀 음악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4월 1일 거짓말처럼 발매된 Red Hot Chili Peppers의 신보 Unlimited Love가 팬들의 기대를 이전 근작에 비해 더 높이 받는 이유는 전성기 RHCP 시절의 기타리스트인 존 프루시안테의 재합류 때문일 것이다. 그의 탈퇴 이후 선보였던 밴드의 사운드 변화를 별로 반기지 않았던 팬들은 그의 합류로 밴드의 한창때 사운드와 통통 튀는 매력적인 색깔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기대는 적어도 반 이상은 채워진다. 퀄리티는 양질이었지만 다소 심심했던 느낌의 지난 두 앨범과는 다르게 이번 Unlimited Love가 주는 느낌은 그들의 2006년작인 Stadium Arcadium의 후속편 같다는 게 앨범을 듣고 떠오른 감상이다. 베이스라인이나 기타 연주는 시종일관 손가락을 바쁘게 놀리고 드럼의 그루브와 보컬 라인도 빈틈없이 실하다. 전체적으로 근래 앨범들에 비해 업비트 성향이 느껴지고 흥겹다.
그렇지만 마냥 전성기의 사운드를 재현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Give It Away나 Suck My Kiss, Get On Top 등에서 보였던 통통 튀는 랩이나 메탈과 모던락의 경계선을 미묘하게 넘나들던 강렬한 사운드는 이번 앨범에서도 역시나 찾기 힘들다. 제2의 Coffee Shop 같은 트랙을 기대하고 듣는다면 이번 앨범을 청취하여도 역시 실망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전 Stadium Arcadium에서도 느껴진 바이지만 레드 핫 칠리 페퍼스는 더 이상은 랩메탈이나 뉴메탈에 강한 영향을 끼쳤던 젊은 시절의 사운드로 회귀하고 싶은 의지는 전혀 없는 듯하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의 음악적 색깔의 핵심적 요소는 유지하면서 보다 힘을 뺀, 성숙하면서도 조금은 느슨한 느낌의 음악이 이제는 그들의 색깔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과반수의 멤버가 환갑을 맞이하는 연배의 밴드가 아직 이 정도로 세련되고 활력 있는 음악을 하고 있고 건재하다는 점만으로도 이번 앨범은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성장을 멈춘 밴드가 거기에서 도태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성숙할 수 있고 그렇게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번 Unlimited Love는 락팬들에게 추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