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 Jovi - Crush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왠지 그중에서도 락이나 메탈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미군 전용 채널(아마 2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AFKN에서 토요일 오전에 방영되던 프로그램 중 하나에 프로레슬러 얼티밋 워리어를 닮은 4인조가 기타를 들고 돌아다녔는데 보면서 '오 멋있다! 얼티밋 워리어가 기타도 치는구나!!' 하면서 락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워리어가 아니라 KISS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몇십 년이 지난 후였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 잠시 살았던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이 제일 좋아했던 곡은 Green Day의 Basket Case였고 당시 VCR이 닳도록 돌려본 액션 영화 스피드의 엔딩곡은 Billy Idol의 Speed였다.
이후에 Green Day의 Dookie, Nirvana의 Nevermind를 통해 락의 세계에 빠지고 뉴메탈이든 펑크든 닥치는 대로 들으면서 자연스레 밴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슬프게도 어렸을 때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어린이였던 내게 청소년기에는 독한 변성기가 찾아왔고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나는 고음불가 음역의 소유자였다. 그 탓에 락 보컬은 커녕 일반적인 노래를 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악기라도 배우고 싶었지만 그런 건 일단 대학부터 간 이후에 하라는 부모님의 명이 떨어졌기에 일단 나의 밴드 생활은 성인기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거짓말처럼 변성기는 끝나버렸고 본래 성량만큼은 큰 편이었기에 이후 나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는 노래를 꽤 잘하는 편이 되었다. 문제는 목소리가 크고 깨끗할 뿐인 내 음색이 락이나 메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밴드부 입부까지는 성공했으나, 당시에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The Calling의 'Wherever You Will Go',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정도가 전부였다. 내가 동경하는 쪽은 허스키하고 매력적인 상남자 보컬이었는데 이런 고민을 얘기하면 돌아오는 선배들의 대답은 "담배 펴볼래?" 수준에 그쳤다. 변성기가 끝나 고음불가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Steelheart나 Stryper의 아성에 미칠만한 고음은 나지 않았기에 당시 락 쪽에서 만연했던 '고음보컬 = 노래왕'이라는 법칙에서도 벗어나 있던 나는 다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내가 당시 시도해 볼 만하다고 느낀 게 바로 Bon Jovi였다. 어느 정도 허스키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탁성이라기에는 꽤나 맑은 음색, 팝과 락과 메탈의 영역 모두에 미묘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음악 등 락 보컬 입문자에게는 꽤나 좋은 선택지였다. 당시 유행해서 TV나 라디오에 많이 나오던 'It's My Life'를 열심히 연습한 결과 본래의 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꽤나 비슷하게 모창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허스키 톤을 모창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막 그로울링, 샤우팅, 스크리밍하는 방법을 '근본 없이' 스스로 터득한 덕분에 Limp Bizkit의 'Eat You Alive', 피아의 '소용돌이'까지도 공연 레퍼토리 후보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원하던 대로 학교 축제 때 'It's My Life'와 '소용돌이'(나머지 곡은 Suede의 Beautiful Ones나 Muse의 Time is Running Out이었던 거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를 포함한 3~4곡을 연습하기로 정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던 어느 날, (지금은 절대 하지 않는) 이른 아침의 합주 시간에 문제가 터지고야 말았다. 목이 채 열리지도 않은 이른 오전 시간에 무리하게 여러 스타일의 곡을 기본기도 없이 모창하듯 톤을 바꿔가며 연습하다가 인생 첫 성대결절이 온 것이다. 당시엔 성대결절이 뭔지도 몰랐던 탓에 그냥 '아 오늘 좀 컨디션 별로네?' 하고 귀가했는데 문제는 1~2주일이 지나도 제대로 노래가 불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가온 축제 당일날, 나는 곡의 하이라이트인 'Like Frankie Said I Did it My Way' 부분을 적당히 낮춰서 부르는 타협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노래가 아예 불러지지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미봉책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날 공연이 정말로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이었다. 장소+시간 추첨에서 좋지 않은 슬롯을 받아 시무룩했지만 초장부터 성량으로 조져댄 덕분에 캠퍼스를 지나던 많은 사람들을 무대 앞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고, 가요 발라드를 잘 부르지 못한다고 무시하던 과 동기들이 처음으로 "현석이 노래 잘하네?"라는 말을 하게 만든 곡, 당시에 잠시 축제에 구경 오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얘가 락 노래해서 장차 뭐가 될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시게 만든 곡이 음 바꿔 부른(...) 'It's My Life'라는 점이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Bon Jovi의 Crush 앨범은 2000년에 출시되었지만 수록곡이었던 It's My Life는 이후 몇 년 동안 꾸준히 TV를 비롯한 미디어에 등장하며 히트했고, 심지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리메이크 버전이 나오면서 그 건재함을 뽐내고 있다. 그 외에도 청량함이 빛나는 곡 'Just Older', 본 조비 음악 후반기의 락 발라드 스타일을 정립한 'Thank You for Loving Me', 맥주 CF에 나오면 딱일 듯한 시원스러운 곡 'One Wild Night' 등 훌륭한 트랙들이 앨범 전반에 포진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80, 90년대에는 팝 메탈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본 조비가 Crush에서 얼터너티브와 포스트그런지 등의 모던록적인 색채를 본인들의 기존 음악에 훌륭하게 섞음을 통해 다른 메탈 밴드들에게도 길을 열어주었다고도 생각한다.
어쨌든 이 시기의 무리한 연습과 무지막지한 의욕 덕에 밴드맨으로서의 미래가 함께 활활 불타버릴 뻔했으나 이후 다행히도 나는 20년 가까이 밴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한 번도 마음속에서 최애 1순위였던 적은 없으나, 꾸준히 청소년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따금씩 좋은 음악으로 함께해 주고 밴드보컬 연습의 시작을 열어준 본 조비 형님이 어떻게 보면 나의 락 보컬 멘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 와서야 해본다.
Bon Jovi - Crush (2000)
01. It's My Life
02. Say It Isn't So
03. Thank You for Loving Me
04. Two Story Town
05. Next 100 Years
06. Just Older
07. Mystery Train
08. Save the World
09. Captain Crash & The Beauty Queen from Mars
10. She's a Mystery
11. I Got the Girl
12. One Wild Night
13. I Could Make a Living Out of Lovin'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