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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May 04. 2023

나의 피카츄는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포켓몬 세대는 아니다. 포켓몬스터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시기는 아마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에 일본에서 어떤 애니메이션을 보던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발작을 일으켰다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그 해당 만화가 바로 '포켓몬스터'였다. 당연히 심각하고 큰 일이었지만 당시 내 또래들은 일본의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병원에 실려갈 만큼의 증상을 겪었다는 것보다 '그 많은 인구를 TV 앞에 묶어두고 발작하게 만든 그 애니메이션이란 얼마나 대단할까'라는 부분에 관심이 쏠렸다. '아키라'나 '공각기동대', '토토로'보다 더 대단한 인기를 끄는 만화라니 얼마나 끝내줄까 하는 생각으로 그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나, 정작 그것이 국내에 공개되었을 때에는 "뭐야? 그냥 애들 만화잖아?"라는 실망감에 내 또래 친구들은 등을 돌리고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발작사건으로 흑역사가 되어버린 비운의 포켓몬 폴리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고 동년배에서도 닌텐도 게임보이를 갖고 있는 친구들은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씰 모으기에 열중했던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나보다 세 살 이상 어린 친구들은 이 프랜차이즈에 미친 듯이 열광했고, 역으로 관심이 없었던 나 같은 이들은 (불과 우리보다 몇 살 어릴 뿐인) '잼민이들의 꼴깝 떠는 모습'이 왠지 꼴 보기 싫다는 생각에 더 멀리했던 것 같다. 그렇게 포켓몬스터와는 평생 접점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랜만에 마리오 카트나 다른 추억의 게임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우리 밴드 베이시스트인 최낙현에게 닌텐도 스위치를 빌리면서 뒤늦은 피카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그냥 마리오카트나 SNES/슈퍼패미컴 버전의 동키콩 컨트리 정도를 하면서 '그래. 이 시절 이 게임이 참 재미있었지.', '아니, 이 정도로 그래픽이 좋다니? 내가 아는 마리오카트가 아니잖아?' 정도의 감상으로 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최낙현이 "형, 그 포켓몬스터 레츠고 피카츄도 한 번 해보세요. 쉽고 적당히 재밌을 듯?"이라고 권하길래 시작했던 게 모든 것의 원흉(?)이었다.

스위치 이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마리오카트

처음에 게임을 켜니 파트너 피카츄의 이름을 지으라길래 고민을 잠깐 한 후에 친한 형 이름인 '명식'으로 정하고 다른 것들을 적당히 커스터마이징한 후에 시작했다. 초반 30분에서 1시간 동안은 '뭐야. 더럽게 재미없네. 역시 포켓몬은 좀...'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2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3~4시간 연속으로 게임에 빠져있었다. 처음 접한 포켓몬이라는 IP의 포맷 자체도 생각보다 매력적이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강하게 어필한 것은 피카츄 자체의 미칠 듯한 귀여움이었다. '명식'이 애교를 부리고 적을 쓰러뜨리고 '현석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버틸' 때마다 점점 스스로가 무장해제되는 느낌을 받았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피카츄와 포켓몬스터의 '찐 팬'이 되어있었다.

이후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나만의 닌텐도 스위치 기기를 구매하고, 이전에 빌린 스위치에서 했던 게임 데이터를 옮기고(쌓은 추억들을 지우고 리셋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시리즈의 다른 게임들 및 후속작들을 진정한 흑우답게 두 버전씩 모두 구매하며(특정 버전에만 나오는 포켓몬들이 있기 때문에 도감을 채우려면 두 버전 모두가 필요했다...) 뒤늦은 포덕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 후속작들을 할 때도 항상 내가 키우는 피카츄의 이름은 '명식'이었고 다른 중요 역할을 하는 스타팅 포켓몬이나 주요한 캐릭터들 역시 나의 밴드 멤버들과 절친들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때 포켓몬에 내가 어느 정도로 빠져있었냐 하면 지금의 와이프와의 첫 만남에서 무려 30분간 쉴 새 없이 당시에 하고 있던 포켓몬 게임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게임 캡처 화면을 보여주면서 마치 무슨 애완동물이라도 자랑하듯이 '얘가 명식이에요', '얘가 낙현이에요' 하면서 떠들어댔다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린다(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서 다른 화제도 아니고 포켓몬스터 이야기를 한다니 그 정도면 진정한 덕후 인증이 아닐까.

The legacy of 명식

물론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고 결혼 준비와 밴드 일 및 기타 등등으로 생활이 바빠지고 다른 게임이나 취미에 새로 흥미를 갖게 되면서 뜨겁게 불타오르던 포덕의 열정(?)은 어느덧 조금 수그러들게 되었다. 여전히 새로운 후속작이 나오면 구매하고 플레이를 하지만 예전만큼의 짜릿함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개중에는 하다가 중간에 접은 게임도 있으며, 꽤 오랜 시간 동안 다마고찌 키우듯 며칠에 한 번이라도 의무적으로 켜서 안부를 확인하던 나의 첫 피카츄와의 만남도 이제 끊긴 지가 좀 되었다. 물론 디지털 메모리일 뿐인 존재이지만 왠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관동지역 태초마을의 나의 피카츄 '명식'은 그 세계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난 포켓몬이 이렇게 재미있는 건지 몰랐어. 남들이 다 할 때 무시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애기들 하는 거 왜 어른이 해? 아니었어. 어른을 위한 거였어." -침착맨 Youtube 방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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