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벽에 대한 체감, 처절히 좌절하기
그런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홍대 인디씬이 주류 음악씬을 위협하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언론에서 나날이 기사를 올리고, 밴드를 업으로 하는 뮤지션도 일정 레벨 이상으로 올라가면 음악만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던 시기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메탈 음악이 영화와 CF를 지배하고 국내에도 유명 뮤지션 및 아이돌 그룹이 메탈을 기반으로 한 음악을 선보이고 인기를 얻었다. 뉴메탈 밴드 Linkin Park의 멤버인 Joseph Hahn이 한국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실제로는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상을 수상하여 한민족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신문에서 대서특필하여 떠들고, 드라마에서도 주인공들이 라이브 클럽에 가서 공연을 보며 춤추고 떠드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오던 그런 시절이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에도 존재했다.
그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에게 있어 록밴드(그중에도 특히 메탈밴드)는 일종의 로망이었으며 숭배의 대상이었고, 언젠가는 나도 저들처럼 무대에 올라가고 음반을 내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착한 아들이기도 했으니 아버지 어머니 속을 썩이지 않고 표면적으로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면서 밴드 보컬을 겸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비현실적으로 원대하게 느껴지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30대가 된 지금 그 터무니없는 꿈을 어쩌다 보니 이루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장밋빛 인생인 건 결코 아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그 초라한 시작에 관한 나름의 되돌아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궁상맞은 현실에 대한 씁쓸한 고찰이다.
록밴드를 동경하던 청소년기가 지난 후 대학에 진학한 나는 자연스레 학교 내의 밴드 동아리를 무려 3개나 가입하고 활동하게 되었다. 3~4년 동안 학교 축제 무대도 서보고 회장, 공연 디렉터 등의 동아리 내 직책을 겪어본 후 '아, 이제는 나도 인디 씬에 발을 들여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4년간의 동아리 생활에서 나름 정예 멤버라 생각되는 친구 및 지인 5명을 모아서 6인조 밴드를 창설(?)했다. 우리 정도 실력이면 라이브 클럽 데뷔하고 6개월 이내에 홍대 인디씬 안에서는 유명 밴드가 될 것이라 자신하고 당당하게 클럽 오디션을 신청했다.
홍대 인디 공연이라고는 유명 밴드의 특별무대나 라이브클럽데이밖에 가보지 않았던 당시의 나는 라이브클럽에서 공연만 열리면 자연스레 사람이 몰리는 줄 알고 있었다. 첫 오디션 공연 날 관객이 우리가 부른 친구 두 명 외엔 없다는 사실에 다소 당황하고 실망했지만, 모 CF에서 당시 유명했던 밴드 중 하나가 "우리는 관객이 한 명도 없는 공연에서도 객석이 꽉 찼을 때와 똑같이 뛰고 노래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그래!! 열정적으로 하면 다 되는 거야!!'라는 마인드로 좋게 말하면 순수하게, 나쁘게 말하면 생각 없이 공연을 진행하고 마쳤다. 당연하게도 그 오디션은 철저히 실패로 끝났고 다시는 그 클럽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오디션만 두 곳을(당시에 제일 잘 나가고 유명했던 곳들만 골라서) 더 신청했고 그 어느 곳에서도 오디션 후에 추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울며 겨자 먹기로 집 근처 골목 구석진 곳에 있던 작은 클럽에 오디션을 신청하고 내심 '그래도 여기는 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2주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되돌아보면 당시에 우리가 떨어졌던 건 당연한 것이었다. 고정 관객도 전혀 없고 자작곡은 꼴랑 두 개밖에 안 되면서 의욕과 패기만 갖고 매번 덜 준비된 상태로 학생인 티가 팍팍 나는 아마추어들이 무대에 올라갔으니 클럽 사장님들이 우리를 좋게 볼리 만무했다. 그렇지만 당시에 나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냥 '생각보다 인디씬의 문턱이 높구나.'라는 모호한 생각 말고는 아무 아이디어가 없었던 상태였다.
최후의 보루였던 소규모 클럽 오디션마저 실패한 상태에서 '이제 어쩌지'라고 생각할 무렵,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봤던 클럽에서 2주가 좀 지난 후에 연락이 왔다. 이번 주에 공연하기로 한 밴드가 펑크를 냈는데 시간이 맞으면 와서 공연을 좀 하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오디션 안 보고 놀고 있던 사이에 자작곡 몇 개가 더 완성된 상태였고, 다소 부족하게나마 '밴드'의 구색을 갖추게 된 우리는 그 날 죽을 것 같은 기세로 공연을 했고, 덕분에 그 날 클럽 실장님의 눈에 들어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공연을 서는 밴드가 되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나는 당시에 '아, 이제 드디어 됐어. 이제 시작이니 올라갈 길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이 철저히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건들이 이후에 쭉 이어지게 되는데...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