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을 미스테리로 돌파한 감독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정공법으로 위기를 극복한 작품들

by 핵보컬

아무리 잘 나가는 창작자, 예술가라도 위기의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작품 외적인 사생활로 인한 이슈가 인기를 하락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뜨고 있던 유망한 신인 아티스트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이른 너무 큰 프로젝트를 떠맡거나 자신과 맞지 않는 색깔의 작품을 시도했다가 엎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스스로의 슬럼프로 인해 이전 작품들에 비해 실망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아 대중들에게 외면받기도 한다. 이제부터 소개할 세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위기의 순간에 봉착한 감독들이 정통 추리 스릴러물을 내놓으며 정공법으로 이를 극복한 경우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추리 스릴러라는 장르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돈은 덜 들지만 한정된 스케일 안에서 관객의 흥미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결말까지도 이전의 떡밥들을 깔끔하게 회수하면서 약간의 반전도 주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의외로 성공적으로 잘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아래 소개할 세 작품들은 이 과제를 꽤나 성공적으로 완수하였기에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고자 한다.


스타워즈로 인한 설움, 정통 추리물로 날려버리다

나이브스 아웃 (2019) (감독: 라이언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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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브릭'이라는 작품으로 현대식 추리물의 기대받는 신성으로 떠오른 감독 라이언 존슨은 2012년 조셉 고든 레빗과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루퍼'라는 SF 액션물을 성공시킴으로써 장르와 스케일과 무관하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크리에이터임을 스스로 증명해 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커리어에서 정점이 되어야 했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8편, '라스트 제다이'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비록 해당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은 호평이 우세했고 독립적인 영화로 떼어놓고 보면 꽤 재미있었지만, 시리즈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앞선 작품들의 설정은 파괴하고 뒤에 이을 사람들의 손발을 묶어놓아 버린, 스타워즈라는 거대한 프랜차이즈에 제대로 엿을 먹여버린 논란의 문제작이었다.


결국 그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팬들의 공공의 적이자 공식적 욕받이로 전락했고, 마치 외딴섬에 어느 날 급작스럽게 고립되었던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처럼 하루아침에 헐리웃의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거대 프랜차이즈의 기대작을 보기 좋게 말아먹은 그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다시 스케일을 줄여 자신이 제일 잘하는 분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절치부심한 그의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2019년작 '나이브스 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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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고스포드 파크' 이후에 메이저 영화계에선 많이 시도되지 않았던 고전적 포맷의 정통 추리물인 이 작품은 탐정 역할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 및 주조연 배우들의 코믹함과 진지함을 오가는 열연과 흥미를 유발하는 미스테리, 그러면서도 시작부터 범인을 아예 까발려놓고 전개를 뒤엎어버리는 과감함 등의 요소가 관객들에게 어필하면서 새로이 추리물에 대한 사람들의 흥미를 다시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치 슬래셔 호러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시체가 쌓여가는 자극적인 전개도 아니면서, 한정된 범위 안에서 느린 호흡의 정공법만으로도 꾸준히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명작 추리물이다.


이로 인해 거둔 성공으로 후속작인 '글래스 어니언'까지 제작이 이어졌고, 속편 역시 좋은 평가를 얻으면서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앞으로도 추리 장르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프랜차이즈 중 하나로 기억될 가능성이 꽤 크며, 추후 3편 역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나이브스 아웃'의 가장 큰 강점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 시리즈나 '소년탐정 김전일'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추리 장르의 포맷을 유지하며 장르 팬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의 핵심적인 요소들은 또 뒤엎어 버림으로 인해 신선함도 가져다준다는, 즉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라이언 존슨 감독의 출중한 연출력과 발칙한 시도 및 실험성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진 특유의 반골 기질과 똘끼가 스타워즈 같은 거대한 프랜차이즈에선 독이 되었지만, 자신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추리물이라는 무대에서는 극강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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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갈릴 만한 요소: 앞서 언급했듯이 자극적이지 않고 고전 추리물의 틀 안에서 일관된 호흡을 유지하는 작품이기에 보는 이에 따라 평범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명장면: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명탐정 베누아 블랑이 등장하며 작중 인물들을 뒤흔들어놓는 첫 취조 및 대면 씬이 대번에 관객을 확 끌어들이는 맛이 있다.


몰락한 코메디 장인의 뒤틀린 미스테리 변화구

부탁 하나만 들어줘 (2018) (감독: 폴 페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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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페이그 감독은 남성임에도 여성 위주의 코메디물에 장기를 보이는 감독이다. 페미니즘 성향의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지루하거나 불쾌감을 주지 않으며 과도한 희화화로 느껴질 만한 부분에도 적당한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깊이가 없진 않은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특정 분야의 코메디 장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 중 '스파이'는 2000년대 이후 만들어진 코메디물 중 가장 영리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관한 일반 관객의 피로도가 다소 높아진 요즘이라도 그의 예전 작품들은 비교적 부담 없이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단, 그의 2016년작 '고스트버스터즈' 리메이크는 제외하고 말이다.


어떠한 각도로 보든지 간에 그가 만든 '고스트버스터즈'는 끔찍한 괴작이다. '스파이'에서 좀 모자라지만 정감 가는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 사이에 절묘하게 끼워 넣은 그럴듯한 액션과 은은하면서도 묵직한 메시지, 때로는 저속하고 우습지만 이따금 의외로 훅 치고 들어오는 영리한 유머 감각 등 그의 장기라고 할 수 있었던 모든 장점들이 이 작품에서는 단 한 개도 느껴지지 않는다. 쉴 새 없이 개그를 치지만 웃기다기보단 민망함을 유발하고,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남성에 대한 희화화에는 유쾌한 풍자보다는 악의만이 느껴지며, 페미니즘을 담으려는 시도는 하면서 흑인 여성은 여전히 노동 계층으로만 묘사하는 한계점을 노출한다. 유령을 사냥하는 액션 장면은 '스파이'의 액션씬과는 다르게 루즈하고 평이하며, 막판에 이르러 악당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남성" 유령의 남근을 조지는 클라이맥스 씬에서는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여전히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고스트버스터즈' 프랜차이즈의 부활을 알려야 했을 작품은 극장판 '이갈리아의 딸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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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이 여성판 '고스트버스터즈'는 흥행에도 실패하고 팬들에게는 외면받았으며, 감독 폴 페이그도 온몸으로 그 비난을 감내해야만 했다. 코메디 감독으로서 재기가 힘들어 보이던 상황에서 그가 차기작으로 내놓은 작품은 이러한 상황 때문인지 훨씬 어두운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전 그의 작품들에서 보였던 웃음기를 거의 걷어낸, 스릴과 미스테리가 극의 중심을 차지한 작품 '부탁 하나만 들어줘'가 이 글에서 소개할 작품이다.


폴 페이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생경할 정도로 차갑지만 세련된 느낌의 화면과 음악, 악랄하고 교활하며 속물적인 여성 캐릭터들, 그 사이에 얽혀있는 치정과 살인 등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철저히 차별화된 요소들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준다. 위에 소개한 '나이브스 아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 중 하나는 주연 배우인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안나 켄드릭의 연기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뿜어내는 매력에 있다.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카리스마를 지닌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캐릭터와 사랑스러우면서도 위선적이고 속물적이기도 한 안나 켄드릭의 캐릭터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얽히고 충돌하게 되는지를 전개하는 방식이 보는 이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코메디 분야에만 특화되었다고 여겨졌던 폴 페이그 감독이 자신이 실제로는 얼마나 다재다능한지를 증명한, 꽤나 잘 만들어진 준수한 스릴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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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갈릴 만한 요소: 아무래도 버릇이 남은 건지 중간에 생뚱맞은 개그씬들이 보는 이에 따라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적절한 양념이 될 수도 있으나, 몰입을 방해하는 옥의 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명장면: 작중에 안나 켄드릭이 과격한 갱스터 랩을 구사하는데,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나름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각본 유출 따위 거장은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리라

헤이트풀 8 (2015)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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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필모그래피에서 크게 오점이 없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거장 감독 중에 하나로 받아들여질 정도의 위치에 서 있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저수지의 개들'이라는 나름 저예산으로 볼 수 있는 영화로 소박한 스케일로 시작했지만, 이후 '킬 빌' 시리즈로 화려한 액션에 도전한 이후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장고: 분노의 추적자'까지 스케일 큰 작품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얽혀서 일으키는 좌충우돌 해프닝에 거대한 액션과 시대극까지 맛있게 버무려내며 일관된 자신만의 개성도 유지하며 매 작품마다 조금씩 무언가를 더해가며 재미와 퀄리티를 한결같이 안정적으로 보증하는 명감독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그도 위기에 봉착했는데, 바로 당시 야심 차게 준비하던 미스테리와 서부극을 결합한 차기작 '헤이트풀 8'의 각본이 유출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장르였어도 각본 유출이라는 것은 꽤나 큰 타격이었겠지만, 추리물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 특성상 이는 더욱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심각성을 인지한 그 역시 이 프로젝트 자체를 폐기하고 아예 소설로 내거나 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 결국 의외의 타이밍에 대본 낭독회를 성공적으로 연 이후 소소한 수정과 설정 변경을 거친 후에 다시 이를 영화로 완성시키는 정면돌파의 방법을 채택했고, 그 결과물인 '헤이트풀 8'은 그의 작품들이 늘 그랬듯 꽤나 괜찮은 영화였다.

hateful.png 어떤 놈이 각본 유출시켰냐?!

'장고: 분노의 추적자' 이후에 또 서부극에 도전한다는 발표를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또 서부극이야? 이제 타란티노도 한 물 갔군."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액션 활극에 치중했던 전작에 비해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느린 호흡과 인물 사이의 관계와 미스테리, 캐릭터의 대사와 갈등 구도에만 집중한 차분한 미스테리 스릴러에 가까웠기에 타란티노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는 이색적인 작품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관객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 대다수에 출연해서 눈도장을 찍은 사무엘 L 잭슨, 커트 러셀, 팀 로스, 마이클 매드슨 등의 배우들은 안정적인 명연기를 펼치고, '펄프 픽션'과 비슷하게 각 인물의 시점이 교차하고 시간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오가는 챕터식 구성은 그가 이쪽 분야에서 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다른 감독이었다면 대본이 유출되었을 때에 좌절하거나 포기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 이미 거장의 위치에 올라선 그였기에 흔들림 없이 뚝심으로 괜찮은 작품을 완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부극과 미스테리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장르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헤이트풀 8'은 감독의 팬이거나 추리 장르를 좋아하는 이라면 반드시 봐야만 하는 좋은 영화이기에 강하게 추천할 수 있다.

samjackson.png 명탐정 에르큘 니그로...?라고 사무엘 L 잭슨은 자신의 작중 캐릭터를 지칭했다

호불호가 갈릴 만한 요소: 타란티노 영화 특유의 잔인함과 저속한 표현 방식은 이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중반부까지 이전작과 차별화되는 차분한 전개를 보이는 이 작품에서 유독 과하고 두드러지게 느껴지기에 좀 아쉽다고 생각한다.


명장면: 사무엘 L 잭슨과 브루스 던의 캐릭터가 작중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충돌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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