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아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회사를 희망 퇴직한 지 7개월째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남편의 퇴직후 어느 날부터인가 고요한 일상에서 순간순간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싸한 느낌을
온몸으로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늘 쪼그리고 있는 가슴한구석 작은 불씨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을 가끔은 엉뚱한 곳에 떨어뜨리는 실수도 잦아졌다.싸한 느낌과 불씨가 공존하는 내 마음 ... 갱년기 일까? 중간은 없는 걸까?
돌아올 파장을 예상해서 인지 나는 남편에게 묻지는 못하고 확신은 할 수 없는
불안감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회사를 나온 후 시작된 것들이었은데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남편과 결혼 후
큰 아이 10개월 때와 같은 불안감이라는 것을...
모든 사태를 파악한 후 깨닫게 되었다.
2021년 11월 30일 남편이 희망퇴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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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퇴직 전까지 준비 과정도 있었고 계획하고 나온 상황이었지만 고정적인 월급과 안정적인 회사의 복지가 사라진 것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날마다 들어오는 수입의 구조를 위해 내가 따로 할만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직장에 메여있던 남편을 도우면서 아이들케어와 가게 안을 지키기에도 벅찼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꿈꾸며 작게 시작만 했지만 본격적으로 매진하지는 못했다.
몇 년 전보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는 남편의 전격적인 투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이미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희망퇴직의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바래고 있었다.
나 또한 다른 도시 이곳저곳을 갈 때마다 지금의 사업을 유지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지 늘 탐색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이 지역에 맞는 것을 찾았지만 내가 전적으로 진행하는 일에는 경험이 없었던 나는
선뜻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당장 우리에게는 퇴직 전부터 준비했던 일이 진행 중이었고 9년의 세월 동안 얕게나마 써온 블로그 글들이 이제야 빛을 보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회사를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하면서 공들인 시간과 퇴사를 받은 퇴직금의 소중함을 알기에 덥석 무엇을 시작한다는 게 겁이 났고 1년은 남편의 퇴직 전 준비한 사업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단단히 알아보고 준비해서 남편의 퇴직금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확신과 함께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1월 30일 남편의 퇴직
막상 현실이 되어버린 퇴직 후 우리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겨울은 갔고 봄이 왔다.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나의 스펙을 위해 내일 배움 카드로 도배를 배우기 시작했다.
늘 경력이 우선이 되는 현장은 내가 기초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무엇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현장을 다니면서 하면서 알았기 때문이다.
얄궂은 자격증 위에 새겨진 이름은 경험의 노하우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 자격증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직은 사업자가 내 앞으로 되어있는 현 상황에서 남편이 퇴직 후 더 많은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대표로 있는 나의 스펙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그리고 남편이 더 넓은 세상에 나가기위해 힘을 실어주기위한 나의 아설픈 자만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진실은 직장을 나온 남편을 둔 꺼내지 못한 불안감이였겠지...'
퇴직 전 남편의 기상 시간은 5시 30분에서 6시!!
S중공업 로고가 새겨진 철마다 나오는 작업복을 입고 6시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오토바이로 출근을 한다.
8시부터 시작되는 업무로 회사에서 아침을 먹는다.
한 겨울은 해가 뜨기도 전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출근하는 것은 조선소 근로자들의 일상이다.
그리고 출근 전 6시 30분 울리는 카톡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100개가 넘는 카톡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몇 년 전 조선업 호황기 늘 저녁식사는 집에서 보다 회사 모임이나 동료들과 함께 이루어졌고
적당히 때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술자리는 그네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내 또래의 배우자들은 육아는 엄마들의 몫이었고 남편의 잦은 회식자리와 모임에 대한 불만과 뒷담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였고 웃으며 가볍게 넘기는 공감거리 이기도 했다.
대형 조선소를 끼고 있는 이 작은 섬은 조선소만의 리그가 있는 여느 대한민국 도시와는 좀 상이한 동네이다.
그렇게 27년을 살아온 남편은 준비된 희망퇴직이었어도 나는... 남편의 마음을
반도 이해 못 할 것이다.
"와 ~100개에서 10개도 안 되는 카톡이네. 속이 후련~하다"며
남편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퇴직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남편을 위해 나는 사무실을 남편에게 내주었다.
그러면서 소식을 들은 후배들도 찾아오고 선배들도 방문했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은 걱정 반과 자신에 일이 될지도 모르는 현실감 반 그리고 '잘 될까?'라는
의심까지 함께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퇴직 후 남들은 여행도 가고 쉬기도 한다지만.... 여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뿐....
직장을 놓은 우리에게는 현실이 먼저였고 그건 또 기약 없는 훗날로 미뤄두었다.
그러면서 남편은 입주 아파트 공동구매를 준비하기도 했고 ... 자신이 퇴직 전부터 준비했던 제품의
돈을 융통하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준비하기도 했다.
자신도 다른 여러 가지 추가적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먼저 퇴직한 회사 후배와 의도치 않게 일을 같이 하게 되면서 시간적 여유는 더 있게 되었다.
퇴직 후 이듬해 5월쯤 이였을 것이다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온 남편에게 급하게 학원에 가려고 나선 내가 차를 찾지 못해 짜증을 냈다.
얼마 후 카톡으로 황당한 욕과 함께 톡을 보냈다. 보란 듯이...
그게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의 짜증과 분노는 날이 갈수록 더해졌고 늘 뭔가 불안해 보였다.
퇴직 초기에 그렇게 열의에 차 있던 남편, 아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기계발보다 후배를 데리고 다니며 술로 함께 하는 일이 마치 일과의 마지막인 듯 생활했다;
심지어 일을 마치고
시간이 되면 2달을 술과 동네 맛집의 횡단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내 귀까지 들려왔다. 동마다 포진해 있는 회사 동료들과 그의 가족들이 이 소문의 진상일 것은 도시서는 상상도 못 하는 이 섬의 특징이리라~.
그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매일 저녁이 되면 메뉴가 다른 음식점들의 내역이 내 문자로 날아왔다.
그 달 술값, 밥값으로 치른 카드값이 300만 원을 넘었다.
나에게 온 것만 300만 원이지 자신의 현금으로 쓴 돈은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다.
퇴직 전 남편은 나에게 약속했다.
다시는 사업으로 현금서비스나 고금리 대출은 없을 거라고 잘해볼 거라고...
퇴직금은 모두 내 통장으로 쏘겠다고 약속도 했다.
나 또한 드라마에서 처럼 남편의 눈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퇴직 반년만에 난 그 돈을 대출로 메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