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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늘보 Aug 17. 2023

퇴사 후 반년만에  통장 잔고 0을 찍었다.

'그날부터 형태가 없는 불안이 형태가 되어서 내 곁에 머물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많은 퇴직자는 언젠가는 자영업자가 된다는 김미경 강사님의 말처럼...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도 조선업 호황기를 누리던 이들이 10년 후가 되면 퇴직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준비된 퇴직으로 남은 삶을 즐기며 살 수도 있고...
누군가는 퇴직 후에 삶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처럼 평생을 월급쟁이로 산 사람이 한 번에 들어오는 큰돈을 어떻게 현명하게 쓰는 방법을 몰라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이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단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연령층의 인구가 늘어가는 요즘 사회나 기업은 희망 섞인 퇴직을 요구하면서 보낼 것만을 준비합니다.
이제는 어떻게 잘 보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 봐야 하는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이것 또한 교육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일어서는 요즘도 억지로라도 인생 선배들의 뼈 있는 글이든 교육이든 듣게 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늘 밀려옵니다.

난 우리 가족의 불편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우리처럼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담고 싶어 이 글을 적어봅니다.

저처럼... 공감이 희망이 되기를...
-빛나는 늘보-



욕이 섞인 카톡 문자가 오간 후부터  사춘기 아이들 앞에 다투는 일을 잦아졌고

아이들은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아빠의 퇴직으로 불안해하던  아이들은 일을 마침과 동시에 술로 사는 아빠에 대한  불만 또한 절정에 달했다

 

그런 아이들을 달래면서도

나 또한 안정되지 못한 삶에... 아이들이 내던지는 아빠에 대한 불만에.. 답 없는 가장에...

커가는 아이들과 언쟁을 벌이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이들과 언쟁의 끝에는 늘 아빠에 대한 뒷담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고 아이들 또한 고스란히 나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를 자신들도 모르게 머릿속에 새기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이다.

훗날 어리석은 인간의 밑바닥을  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해 여름

두 아이와 나  셋이서 처음으로 아빠 없는 여름휴가를 보내고 왔다.

그 무렵쯤인 친정 엄마의 생일을 위해 친정 방문도 아이들과 셋이서 다녀와야 했다.

어쩌면  그해 여름 나는 철저히 남편을 배제하려 했다.

퇴직 후 우리에게 약속한 삶과는 반대로 가는 남편을 향한 소리 없는 반항이었다.


친정에 도착한 후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날이었다.

엄마는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퇴직금이 나왔을 텐데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 딸에게 무언가

묻고 싶어 했다. 

늘 돈 앞에서는 티가 날 만큼 쿨 한척했던  친정 엄마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몇 해 전부터 퉁퉁부은 다리로 다니시던 엄마가 가을쯤 수술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며 해결하려 했던 엄마가 수술대에 눕겠단 얘기를 전했을 때는

아픈 다리의 고통은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음을

짐작했다.

엄마의 퉁퉁부은 다리를 보며

'엄마 참아서 이렇게 되었네. 이 다리가 엄마와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냥 아프다 할걸. 답 없는 세월이 그게 답인 듯 살지 말걸... 그냥 견디면 다 잘되는 줄 알았을 텐데... '



엄마 나이 40!!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나이.

내가 10살 되던 해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나는 아빠를 엄마는 남편을 잃었다.

네 자매를 남기고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아빠를 위해 갑자기 가장이 되어버린 엄마는

홀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우리 자매를 키웠다.

남편 없이 살면서  참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엄마는 그날도 내뱉고 싶은 말을 꾹 참고 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결국 난 망설임 끝에 엄마에게 나와 남편의 사정 이야기를 하고 좀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늘 회사 퇴직 후를 걱정하던 엄마는

"뭐 하러 나와서 이 고생을 하냐? 애들도 제일 돈 많이 들 때인데..."

"평생 고생해서 이제 편하게 쉬면서 일할 수 있는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며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난 엄마의 말에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엄마.. 나도 동감이야.

그런데 내가 힘든 건 알 수 없는 불안감이야... 어떤 형태로 올지 몰라서...'엄마~ 나는 형태가 없는 불안이 형태가 되어서 내 곁에 머물까 봐...'

내 속을 감추고 한마디 전했다.

"준비가 다 된 상태라 그게 최선이었고 다 잘될 거야"라고 답했다. 


엄마의 생일임에도 아이들이 할머니께 준 선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나는 내 맘 편하고자 내 지갑의 돈을 모두 털어 친정엄마께 드리고 왔다.

퇴직을 해도 내 손에 들어온 목돈이 없는 이 상황에 제대로 된 용돈을 주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어렸을 적 사업을 하시던 작은 아빠는

당신 자식의 텅 빈 지갑은 외면해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용돈 챙기는 일은 사업이 망해 야반도주하듯 먼 나라로 가시면서도 놓지 않으셨다.


속을 다 보여줄 수 없는 자식은 나이 든 부모가 걱정할까 그래야 자식이 잘 되는 줄 아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게 정답은 아니지만... 이제야 내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야 알게 되는 것들... 이제야 알았음에도  하지 못하는 것들...

그리고 그들에 삶에서 아마도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라 깨닫게 되는 순간들...


우리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못난 딸은 그때의 작은 아빠처럼도  하지 못하고 늙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뒤로 한채 무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퇴직금 정산만 잘 돼서 나에게 목돈이 들어오면 나는 독립하리라.'

'그리고 우리의 부부 관계는 서서히 독립을 한 후 생각해 보리라'

나 자신으로 일어섰을 때 과연 나를 위해 어떤 선택이 옳은지 생각해 보리라 결심을 하고 휴가를 보내고 왔다.



며칠 후 오랜만에 방에 누워있는 남편을 향해 이야기를 하자고 전했다. 누워서 폰을 보던 남편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라고 전했다.


친정 다녀온 후 마음이 늘 편하지 않았던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누워있는 남편을 향해 내려보며 말했다.

"엄마 다리 수술해야 하는데...? 돈은 못 드려도 엄마한테 빌린 돈이 라도 갚아야 해"

누워있던 남편의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얼만데? 얼마를 줘야 하는데?"였다.


기가 찼다.

지금도 난 그날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낮은 침대에 몸을 일으키며 앉아서

독기 가득 품은 눈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들고 올려보며

내뱉던 말과 그 표정을...


상대가 잘못한 게 없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그 눈빛과 표정을...

난 질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의 평화를 위해 이미 금이 간 사태를 다시 추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만은 무언가 단판을 짓고 싶었다.


나도 허리에 양손을 얹고

독기품은 눈으로 남편을 향해 쏘아보며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방금 전과는 한결 낮아진 표정으로 나에게 다시 물었다.

남편: "아니~ 어머니한테 빌린 돈이 얼마였냐고?"

나   :"너 미쳤니?"<<<< "우리  엄마한테 빌린 돈이 얼마인 줄도 몰라?'

       "혼자 있는 양반  낼모레 수술해야 하는데 빌린 돈이라   도 갚아야 할거 아냐"<<<

       "그런데 그날 갈비탕까지 얻어먹고 돈 빌리러 간 사람이 그 돈이 얼마인지도 몰라?"

         

그리고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퇴직금을 달라고

다그쳤다.

도대체 그 퇴직금은 언제 줄 수 있냐고 돼 물었다.

침대에 주저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보고 있는 그 사람은 나의 베개 세례를 모두 맞으며

"미안해" "미안하다 "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한마디

 "없어."

없다고 했다. 억이 넘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다시 되물었다

"뭐라고? 뭐가 어째?"

 


퇴직 전에는 말 한마디 없이 개인회생을 신청해서 그럴듯한 계획으로 포장하더니

퇴직 후에는 0으로 만든 통장 잔고로 나를 기만했다.

우리는 가족인데... 우리는 부부였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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