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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늘보 Aug 19. 2023

상실의 고통(첫번째이야기)

 아빠는 10살.7살.3살.2살 딸을 두고 떠났다.엄마는 혼자가 되었다.

 "-아 ~"

"-아~"


학교를 가기위해 문을 나서는데 요란한 동네 사람들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쳤대? "

"어떻게 "


"뭐라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침을 먹다말고 모두 뛰쳐 나갔다.


나는 평소처럼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곳 기찻길에 분주한 사람들이 멀찍이 보였다.

무엇인가 불길한 그날을 직감했지만 그냥 갔다.

그리고 같이 학교를 가는 동네 친구가 아빠를 물었을때

"너 학교에서 우리 아빠 얘기하면 죽여버릴꺼야"라고 해서 내가 진짜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했다고 전했다.

학교에 거의 다 왔을때 학교앞 문방구에서

나를 안쓰럽게 쳐다 보던 친척  할머니가 혀를 찼다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반 교실로 가서 여느때처럼

난 자리에 가서 앉았다.

1교시 시작 전 담임 선생님께서 조용히 날 부르셨다.

"~야 집에 가봐야 한다."" 어서 가 봐"

나는 싫다고 했다. 선생님 께서는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보시며 가야 하는거라고 어서 가라고 해서

억지로 나는 떠밀려 학교를 나왔다.

가방을 챙겨 학교 문을 나서는데 그 친척할머니가 나를 보며 우셨다.

10살 꼬마였던 나는 그 길을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푸른 5월 유난히 맑은 날  

동네 입구에 흐드러지게핀 하얀 아카시아꽃과 그 향만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10살 내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게 나의 아빠였다.

멍석으로 덮여져있는 사람이 아빠라 해서 난 아빠인줄 알았다.

마지막 모습을 봐야 한다고 그래야 살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차마 볼 자신이 없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카레에 비빈 밥을 급하게 먹고 경운기를 몰고 서둘러 나가던 아빠가  멍석에 덮여서 내 앞에 있다.


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산 짐승에 굉음에 가까운 울부짖음 마냥

"~~"

"~~" 외치며  울고 있다


동네의 큰 어른이자 유교를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살아오신 우리 할아버지는 대가없이

돌아가신 동네 사람들의 염을 손수 맡아서 해 주시고 명당 자리를 알아 봐 주시곤 했다.

그랬던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의 장지를 진행해야 했다.

아직까지 나의 기억에도 흐트러짐없이 아들의 장지를 묵묵히 진행하던 우리 할아버지는 참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아빠 만나러 가자며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가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훗날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하늘이 노랗다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고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서 구분이 안됀다는 말을 그날 실감했다고 하셨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하루 아침에 아빠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고 자식을 잃었다.



지금도 내가 못 먹는 음식이 있다

전라도 에서는 짠지라 하는 얇은 어포로 무친 밑반찬이다

아빠의 장지가 있던 날 목으로 넘어가는 그 느낌이

토할것 같아 도로 뱉었는데 그날 이후로 그 음식을 먹으면 같은 반응이 보인다.


"꽃 상여 "

아빠는 소름끼칠 만큼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상여를 타고

자신이 살던 곳들을 한곳씩 천천히 머무르고 가기를 반복했다.

집을 시작으로

아빠가 살았고 우리가 살고있는 동네를 돌았다.

내가 다니고 있고 아빠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구석구석  돌았다.

친척들과 함께  난 그 꽃 상여 뒤를 따랐다.


"이제~ 가면~ 언제오나~"  

조그맣게 장단을 맞춰 울리는 종소리

"아이고~ "아이고~를 외치는 사람들 소리


이 진귀한 장면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나는 아빠를 보내는 슬픔보다 같은 반 친구들이 이 속에 나를 발견할까봐 몸 서리 치게 싫었다.


그때 나의 감정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제 아빠가 없는게 창피했었던것 같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10살 아이의 아빠를 잃는 다는거는 어떤 느낌이였을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고 아직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동정의 눈빛이 그냥 싫었던건 아닐까?


그렇게 소름끼치게 화려한 꽃 상여는

동네 작은 도로가를 지나 선산으로 갔다.

갑자기 죽은 불효자 아들은 선산의 한 구석으로 밀려서 혼자 떨어진 곳으로 갔다.


선산 한 귀퉁이 자리를 잡고 땅속 깊숙히 아빠의 관위로

빨간 천이 씌여 졌다.

다홍빛에 가까운 천을 보면 귀신을 본듯 지금도

썸뜩한 기분에 싸인다.


늘 생각했다.

마지막 아빠를 봐야했는데 못 봐서 그런걸까 라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못한 죄책감이 늘 그런식으로 표현된것 같다.

아빠의 옷가지를 태우고 있는 옆에서 서울서 내려온

큰 엄마가 마지막으로 아빠를 불러보라고 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엄마는 장지에 오지 못했다.

"~빠~ <<<"

"아~빠~ <<<"

가족 모두 울었다.

그리고 한동안 10살 어린아이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특히 엄마앞에서 그 단어를 절대 쓰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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