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월요일
"하아..."
군의관실이자 진료실, 나만의 공간. 이곳에 배치받은 지 1년 반이 넘어가는 지금에서야 그렇게 인식된다.
처음 이곳으로 배치된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좌절했었는지가 떠오른다.
의사들 중에 운이 안 좋다는 사람들만 가는 중위 군의관으로 작년도 3월에 입대하여 괴산에서 6주를 버티고
그중에서도 운이 안 좋다는 사람들만 가는 강원도에
그중에서도 운이 정말 안 좋다는 사람들만 가는 화천 양구 인제 고성중 하나를
그중에서도 운이 진짜 정말 안 좋다는 사람들만 가는 포병대대, 일명 포병신 부대.
강원도 양구 속 나의 부대다.
위치는 서울까지 차가 안 막혀야 2시간 반.
평생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 8학군에 살다가 의대에 입학, 일명 빅 5 병원 중 하나에서 수련을 받다 난생처음으로 온 서울 밖의 세상은 새로웠었다. 딱 두 달까지.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버티는 싸움이었다. 평생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고, 그럼에도 녹아들려 했던 노력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무례함과 무식함은 없던 정마저도 떨어지게 해냈다.
군대에 의사가 필요하기에 군 내 의료진, 군의관으로 왔음에도 온갖 잡무와 회의에 휘말려야 했고, 나한테 불리한 규정엔 엄격하고 나에게 유리한 규정은 모르쇠 하는, 불합리함과 무례함을 몸소 견뎌야 했다. 19개월을.
이제 남은 군 복무 기간은 17개월 남짓.
벌써 그만큼이나 버틴 걸까 혹은 겨우 그만큼 버틴 걸까. 둘 중 무엇이어도 이젠 상관은 없다.
앞으로의 5개월은 훨씬 편할 것이니까.
의자에 몸을 더 뉘어 체중을 싣고 편히 쉬려던 차였다.
철컥-철컥-
똑똑똑
"군의관, 정작과장일세 안에 있나?"
노크 전에 일단 문고리부터 돌리는 저 무례함에, 낡은 게이밍 의자가 주던 편안함이 달아났다. 더불어 반말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19개월의 시간은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도 남을 만큼 길었다.
기분 나쁜 티를 내색하지 않으며 문을 열어 반겨줬다.
"주말에 고생했지? 그거 때문에 찾아왔는데 말이야. 뭐, 아직 나 말고 다른 누가 찾아오진 않았고?"
정작과장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다크서클에 수척한 피부, 떡진 머리. 시선은 나에게 한 번씩 멈춰갔지만 주로 다른 생각에 바쁜 듯 아래로 내리깔려 있었다.
하긴 이번 사건으로 인해 대대장 대리로 주말에도 급하게 소환돼서 내내 퇴근도 못하고 일했으리라.
동병상련의 처지에 공감해 보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는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린 사람답게 말투로 짜증을 가득 표출했다.
"어 의무병아, 뭐, 커피 좀 타와라"
"넵 알겠습니다"
진료실 밖의 의무병이 명령에 서둘러 나가는 게 느껴졌다. 약간 부럽다. 내가 가서 타주겠다고 할 걸 그랬나. 그러나 지난 며칠간 수도 없이 반복한 듯한 그의 용건 설명은 여러모로 나에게 유익했다. 내용뿐만일까, 그의 목소리, 말투, 태도, 자세 그 어디에도 고인이 된 대대장에 대한 애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전출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네 나 원 참... 군인이 돼서 별의별 사건을 다 겪어봤지만, 이런 경우도 처음이고 이 나이 먹고 내가 경찰서를 조사받으러 들릴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아무튼 군의관도 말 조심하고, 누가 뭐 접근해서 물어보면 나한테 먼저 보고하라고. 이런 사건에 잘못 엮이면 뭐, 군복 벗는 걸로 안 끝날 수도 있으니까"
군복을 벗는 건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포상이겠지만 굳이 이를 알리진 않고 그저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 했다. 정작과장은 만족한 듯 들어왔을 때와 같이 서둘러 나갔다. 경찰 조사에 대해 조금 더 묻고 싶었는데, 제 할 말만 하고 떠나는 뒷모습에 붙잡을 생각도 사라졌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군인들의 상습적인 무례에도, 어처구니없는 요청에도 그 순간에 욱하여 반발하고 싸워봐야 나만 피곤하다. 그냥 말을 길게 섞는 것 자체가 손해다.
무슨 말이나 지시에도 앞에선 그냥 그러려니 하는 듯 웃어주고 끄덕여주되 행하는 것은 나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물론 이 방법이 모두에게 다 통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군의관. 내가 분명 지난번에 복도 좀 청소해 놓으라고 했잖아 응? 기억 안 나?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가 보네. 거 의사란 양반이 부대 청결에 관심이 없나? 에잉 쯧'
이젠 들을 리 없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간지럽히는 기분이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느껴진다. 다행히 이제 표정관리를 할 필요도 없다.
맘 편히 의자에 기대며 부정적인 감정들이 강원도의 추위처럼 차갑게 나의 온몸을 잠식하게 둔다.
원래 비관적이고 부정적일 때 최악을 상정하고 대비하기가 좋은 법이라,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방금의 방문을 점검해 본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방문이긴 했지만 조금 안심이 된다.
속단하긴 이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 대한 의심이 번져있지는 않나 보다.
어제 병원에서 이야기 나눴던 군사 경찰 측과 감찰실 인원들 모두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사망자의 최초 목격자나 최후 접촉자로 대우하여 수사를 하기보단 의료인으로서 사건에 대해 의학적 소견과 처치를 묻는 내용이 전부였다.
딱 하나 걸리는 것만 아니었으면 지금 굉장히 모든 것에 만족하며 온전히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똑똑똑 "군의관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상념에서 나를 깨웠다. 잠시 기다려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다. 의무병이다. 다른 군인이었으면 아까 정작과장처럼 노크와 동시에 열고 들어왔을 거다. 아님 노크도 없이 열고 들어왔거나.
지난 주말 간 한숨도 자지 못해서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큼큼 다듬은 후 들어오라 하자 의무병이 문을 열고 얼굴만 잠깐 들이민다.
"군의관님 그 커피 타왔습니다"
아 맞다 커피. 난 평소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당연히 이전에 의무병에게 타오라 시킨 적도 없었고, 의무실에 커피가 준비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니 의무병은 처음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커피를 찾아 떠났다 돌아왔을 거다.
어디에서?
1층에 위치한 의무실 근처에서 커피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뻔하다. 지휘통제실, 대대장실, 주임원사실. 더 많은 정보를 구하기 좋은 장소들이지만 내가 직접 가서 분위기를 살피기엔 어색한 곳이다.
잠시 홀로 있는 나와 두 잔의 커피를 멍하게 번갈아 보며 고민하다 둘 다 내려놓고 나가려는 의무병을 붙잡아 세웠다.
"무병아, 부대 분위기는 어떻니?"
"부대 말씀이십니까? 그... 어... 시끄럽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뭐 별다른 일은 없고?"
"어... 일단 이번 달 훈련들은 전부 취소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날짜 나오는 대로 뭔가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뭐를? 언제?"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희 이등병 건강검진 상담 좀 밀려 있습니다"
"그래, 별 일 생기면 알려주고, 그거는 내일이나 모레 중에 날 잡자"
"넵 알겠습니다! 어... 그리고 신상관리위원회가 목요일에 있습니다!"
대강 대답해주고, 어벙한 표정의 무병이를 보내줬다가 순간 눈치챈 어떤 사실을 복기한다.
장례. 누군가가 사망하면 당연히 따르는 의례다. 전날 저녁에 있던 일로 오늘 바로 장례식을 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어떠한 소식이 들려옴이 마땅하다. 그런데 들은 바가 없다. 그럼 누구에게 소식을 전달받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내가 아는 바, 대대장은 홀로 살았다. 술주정으로 늘 전처 얘기를 했어서 그가 현재 가정이 없는 것을 안다.
그 외의 가족관계에 대해선 나도 모른다.
그래서 장례가 미뤄지는 걸까? 유가족과 연락이 늦어져서 혹은 못 오는 상황이라서?
불현듯 불안감이 내 심장어림을 훑고 지나간다. 동시에 어제 형사의 말이 떠오른다.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례가 미뤄지는 경우는 많이 봤다. 아버지 덕에 준전문가 수준이다.
사인이 불명확하거나 수사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될 때, 수사기관은 장례를 미룰 수 있다.
수사의 필요성. 그 필요성이 대두된 걸까? 그래서 미뤄진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부대가 너무 조용하다. 그럼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아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처럼 그냥 스쳐 지나갈까?
시계를 보니 정오, 오전의 끝. 분침과 시침이 일치하기 직전이었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걸까? 출근하고 나서 나 홀로 생각에 갇혀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언제 연락이 오는 걸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언제 어떻게 뭐가 엄습할지 모른다에서 시작되는 공포.
이런 유형의 공포는 상행성의 성질을 띤다. 몸의 말단부위에서부터 소름이 돋아 점차 몸과 머리로 뻗쳐간다. 무언가에 쫓기다가 결국 잡히는 기분.
애써 침착해지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더 이상의 비관과 부정적인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젠 약간의 낙관이 제 역할을 할 차례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복기.
12월 6일 일요일, 정확히 오후 5시 30분이었다. 초겨울의 어렴풋한 차가움이 달리는 내 양 볼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오후 4시 10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었다. 경로는 관사를 나와 길을 건너면 나오는 논밭길. 크게 한 바퀴를 돌면 15.6km로 80분을 맞춰 뛰면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기분이 좋은 속도로 잠깐의 행복을 만끽하고 퇴근시간에 딱 맞게 끝낼 수 있었다.
생일이었던 그날도 평일 때의 스케줄을 그대로 따라 그 코스 대로 달리고 있었다. 달리기가 끝나가며 멀리서부터 보이던 관사의 형체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고, 귀에 꽂은 에어팟에선 50분짜리 랜덤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하루는 어땠나요? 오늘 날씨만큼 흐렸나요?]
센치한 가을 감성과 해가 짧아지며 생긴 약간의 우울한 초겨울 감성 사이의 노래와 후- 후- 하고 규칙적으로 나오는 내 숨소리.
무슨 생각이었을까, 내 발걸음은 평소의 쳇바퀴를 벗어나 길을 떠났다. 방향은 관사 옆쪽의 작은 동네 야산.
이번 주 내내 내리던 눈은 녹지 않고 두꺼운 장애물이 되어 내 앞길을 방해했지만 속도를 늦추되 멈추지 않고 앞서나갔다.
[... 수없이 해봤어요 노력이라는 걸 말예요]
처음 가보는 길이기에 약간 헤맸다. 분명 산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을 텐데 하얀 장애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원했던 목적지의 정반대 편에 도착했었나 보다. 뒷산의 절벽이 날 마주 보고 있었다.
동네 뒷산이고 해발 고도라는 단위를 사용하기도 부끄러울 수준의 낮은 산이었지만, 강원도의 산답게 굉장히 험하고 뾰족한 외형이다. 저런 곳에서 떨어지면 같은 높이의 아파트보단 훨씬 위험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달려온 기세가 무색하게 잘 못 도착한 걸 깨닫자 김이 팍 새 버렸다. 마침 3분의 짧은 노래도 끝에 이미 다다르고 있었다.
[...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길]
'오늘은 정말 날이 아닌가 보다'
다시 걸음을 돌려 원래의 경로대로 관사에 가려던 차였다. 무언가가 보였다.
대대장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졌는지 다리는 골절되어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었고 외투는 곳곳이 찢어지고 그 틈 사이로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의식 없이 가만히 누워있으니, 죽었나 의문이 드는 몰골.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람. 꿈인가?
당황스러운 광경에 경황이 없을 법도 했지만, 의사로서의 자동반사가 발동되는 게 먼저였다. 난 가까이 다가가서 호흡을 하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다. 그리고는 맥을 짚어봐야 했다. 그리고...
119 신고를 한 시각은 19시 49분.
우웅!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의 진동에 책상 전체가 소리를 낸다. 당장이라도 날 보라 고함치는 듯하다.
마치 작은 생각 하나의 파문에 내 머릿속 전체가 시끄러워진 것과 같다.
애써 떨리는 손으로 폰을 들어 그 내용을 살핀다.
문자다.
[양구경찰서 형사과 방 형사입니다. 전일 사망사건 관련 참고인 조사를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부정한들 회피한들 늘 맞고 결국엔 찾아온다. 소란스러웠던 잡생각들이 가라앉는 감정에 밀려 잦아든다. 그리고 빈 머릿속은 바쁘게 상황을 정리한다.
1. 내가 119 신고를 하기 전 상황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을 형사가 안다.
2. 위의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를 내가 모른다.
3. 부대 내에는 아직 1의 사실이 전달되진 않았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핸드폰이 다시 진동을 시작한다.
이번엔 그 파문이 이어진다.
우웅! 우웅! 우웅!
전화다. 같은 연락처. 전화를 받는다.
숨을 뱉으며 그 숨에 목소리를 태워 조용히 말했다.
"예 군의관입니다"
"네 군의관님 다시 연락드리게 되었네요. 잘 주무셨나요?"
놀리는 건가. 조롱받은 기분, 그 모멸감과 동시에 불안감에 입술과 목이 마르고 멘다.
애써 침을 삼키지 않고,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신경 쓰며 아니라고 대답한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아무튼 문자 드린 대로 조사 차 연락을 드렸습니다. 언제가 편하세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보다는 차라리 내가 어떤 상황에 쳐해 있는지를 직면하고 그다음을 모색하는 게 현명하다.
"퇴근하고 서로 가면 6시 정도 입니... "
"서말고, 관사 동면아파트, 거기 306 호서 봅시다. 어딘지 알죠?"
모를 리가. 동면아파트는 A동부터 E동까지 5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지만, 306호를 지칭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곳이 딱 한 곳이다. 바로 내 집의 위층. 고인이 된 대대장의 집이다.
그렇다고 흔쾌히 알겠다고 답할 문제는 아니다. 조사를? 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집에서? 이건 무슨 경우인가. 아버지 덕택에 경찰 조사 과정에 일반인 치고는 일가견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게 아니다.
잠시 얼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전화 넘어 형사는 무언을 곧 긍정으로 판단했는지 통보한다.
"퇴근하면 바로 오세요"
애써 기묘한 감정을 담지 않은 네를 내뱉고는 끊어진 전화 화면을 보여주는 폰을 쳐다본다. 무언가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다시 한번 정보의 비대칭을 느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이번엔 답이 번뜩였다. 먼저 조사를 받은 사람, 정작과장의 그 얼굴이.
...
"그래서, 군의관 뭐 때문에 온 거지?"
전일부터 오늘 오전까지 내내 온갖 곳에서 시달리다가 잠깐 찾은 점심시간의 휴식이 나로 인해 방해받자 정작과장의 얼굴은 바로 일그러졌다. 통쾌한 감정이 들만한 일이었지만 내 맘이 급해 이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저도 경찰 조사받으란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이런 게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아는 어른이 과장님이 생각나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흠... 뭐, 군의관은 곱게 자라느라 이런 거 경험해 본 적이 없지?"
원래 사람은 얕보는 사람에게 더 쉽게 맘을 열기 마련이다. 평소였으면 담아뒀을 무례함도 그냥 예예 웃으며 넘기고 대답을 기다렸다.
"뭐 별거 없어. 그냥 가서 연락 온 사람한테 왔다고 하면은 사무실 같은 데 가서 묻는 거 성실하게 대답하면 돼. 다 녹화랑 녹음되니까 거짓말 같은 거 하면 안 되고"
"아... 사무실? 그런 데서 이렇게 큰 사건을 다룹니까? 현장이나 아니면 증거? 같은 게 있는 특별한 장소에서는 조사 안 하나요?"
"군의관 뭐, 드라마를 많이 봤나? 그런 경우가 어딨어"
그리고 사람은 화자가 멍청해 보이는 거짓말에 더 쉽게 속는다. 일단 나 이외에 경찰서 말고 다른 곳에서 조사를 받은 사람은 없나 보다. 아까 무병이의 어벙함을 최대한 모방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 그럼 조사땐 뭐를 물어봅니까?"
"그야 뭐 이것저것 다 물어보는데 형사 맘이지. 나야 이 사건이랑 직접적으로 관계된 게 없으니, 뭐 아는 바 없냐가 전부였지. 평소에 대대장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도 물어봤었고, 그 뭐냐 아! 군의관 얘기도 내가 잠깐 했었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그래도 잘 얘기해서, 우리 군의관 맘 되게 여리고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라 겁 많이 먹었을 거라고 해줬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사 다녀와서 나한테 보고해 알겠지?"
"그... 제 얘기는 혹시 어떤 것들 나눴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뭐, 군의관이 먼저 발견해서 살리려고 했다며. 그 얘기하다 보니 평소에 둘이 어떤 사이냐 묻길래, 둘이 맨날 붙어 다녔다. 각별한 사이었다. 이렇게 좋게 말해줬다고. 대대장님이 원래 군의관 좀 아꼈잖아, 그건 알지?"
이젠 귀찮아졌는지 날 내보내려는 낌새다. 나도 얻을 정보는 다 얻은 것 같아 감사 인사 남기고 나왔다.
대대장이 날 아꼈다라, 각별한 사이었다라. 제삼자가 보기엔 그래 보였나 보다.
'아니 군의관, 너 이제 의사가 아니라 군인이야... 그걸 아직도 모르나? 밖에서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대접받다 오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지 응? 안 되겠구먼 쯧, 내가 사람 하나 만든다 생각하고 제대로 관리해야겠어'
다시금 귓가를 간지럽히는 과거의 목소리. 기억의 중추인 해마에서 측두엽까지 눈이 찡그러질 두통이, 환상통처럼 발화되었다가 금세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도 곧바로 신경을 끈다. 이제 과거는 끝났으니까.
형사는 내가 거짓말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안다. 그리고 대대장이 생전에 날 각별히 여겼다는 정보를 얻은 형사는 나를 죽은 대대장의 집으로 불렀다. 왜일까, 이유만 알 수 있다면 도미노처럼 맞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