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압박, 살인

5화 화요일

by 건포도

"충성!" "충성!" "충성!"


마음을 다잡고 의무실로 돌아오자 빡빡머리의 이등병들이 날 경례로 반겨준다. 대충 세어봐도 열댓 명 이상. 이런 걸 할 때가 아닌데 싶어 약간의 짜증이 전능감과 흥분의 빈자리를 메운다.


"군의관님 어... 그, 바로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그 감정이 얼굴에 묻어났는지 날 부른 무병이가 흠칫 놀라곤 눈치 보며 묻는다. 굳은 표정을 억지 미소로 풀면서 그러라고 한 후에 군의관실로 들어왔다.


'이등병 건강 검진'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임무지만 사실상 하는 건 거의 없다.


"지병 있거나 어디 아픈덴 없니?"

"네 그렇습니다"

"약 따로 챙겨 먹는 것도 없고?"

"허리 디스크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 가서 약 먹고 있습니다"


대강 이런 식이다. 절대 병이 있는지 한번 물어보면 대답하면 안된다는 육군 규정이라도 있는지 조금 다른 말로 두번은 물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온다. 그럼 나는 이걸 기록해 두고 '필요하면 의무병한테 얘기해서 외진 잡아두고 가렴'하고 보내면 끝. 인당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일이지만, 맘이 급해서 오늘은 인당 30초로 보냈다.


물론 그런 와중에 힐끗 훑으며 시진을 한다. 사실상 관상을 보는 거나 다름이 없다. 비과학적 방법일 수 있지만, 의사생활 3년을 하며 봐왔던 수많은 환자들 덕에 한 명씩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때가 있다. 바로 이 놈처럼.


"안녕하세... ㅂ니까? 군위관님"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부대에 온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이 병사는 아파 보이기도 하고 산만해 보이기도 한다.

다크서클이 광대 밑까지 흘러내려와 있고 눈은 충혈되어 있다. 피부는 관리를 하지 않는지 온갖 종류의 여드름들이 만개해 있다. 게다가 말라서인지 군복도 헐렁한 게 제대로 입고 있음에도 똑바로 입지 않은 느낌이다.

자세도 등받이 없이 둥그런 방석만 있는 환자석이 불편한지 기대앉고는 다리도 벌린 채 그 사이에 양손을 두어 몸을 기대놓고는 다리를 덜덜 떤다.

10월 중순에 입대한 정상적인 사람이 이렇게까지 군기가 없을 수는 없다. 이런 애들은 필히 기록을 해둬야 한다. 밖의 무병이와는 다른 결의 폐급 관심 병사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 의무기록에 분명히 뭔가 있을 법 한 사람이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다른 군의관이 작성한 기록이 있다. 차팅을 위해 참고하려고 열어보자 운전병으로 와서 교육을 받던 중에 발작해서 병원에 실려갔고 조기 퇴소해서 부대로 직행했다고 돼있다.


발작은 비특이적이었고 바이탈 및 혈액과 영상검사 전부 정상인데 의식소실이 2시간 이상 지속됐다고 적혀있다. 진단명은 '벌레 NOS'. 꾀병 환자로 추정된다는 뜻이다. 확실히 정상인은 아니다란 걸 생각하며 말을 건다.


"발작을 했었네?"

"아 피곤해서 그랬어요... 습니다"

"원래 피곤하면 발작을 했었어?"

"아뇨 밖에선 괜찮았는데 그냥 군대 오니까는"


하고 다리를 좀 전보다 더 떨어댄다. 의자가 덜컹거리며 같이 흔들릴 정도.


"지금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좀 불편합니다"

"불편한 거 다 얘기해 보렴"

"그냥 다 불편합니다. 사람들 다 전부 계속 저한테 간섭질이고, 지적하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요"

"... 몸이 불편한 곳은 없고?"

"속도 좀 안 좋고... 밥도 맛이 없어요. 생활관 같이 쓰는 애가 시끄럽게 코 골고 그러니까 잠도 못 자겠고 짜증 나요"

"그래 힘들겠네. 속 불편한 건 약 필요하니?"


흔치 않은 수준의 폐급 병사임을 알게 되니 피곤함이 몰려야 빨리 내보내려고 마무리 멘트를 쳤는데,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던 놈이 약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갑자기 날 초롱초롱하게 쳐다본다.


"혹시 약은 뭐 있어요?"

"소화제들 있지. 속 울렁거리는 거 증상 조절하는 것들 있는데, 병이 있으면 그걸 치료하는 건 아니고 그냥 증상 조절용이라 어지간하면 병원 가는 게 좋아. 원하면 밖에 의무병이랑 얘기하고 외진 잡아도 되고"

"... 외진은 부대 밖에 나가는 거에요?"

"군 병원으로 가는 거니까 일과동안 버스 타고 나갔다 오는 거지"


그래서 군 병원 가는 걸 병사들은 굉장히 선호한다. 일과를 빠지고 병원 가서 대충 진료보고 거기 px나 인근 식당 가서 밥 먹고 근처에서 놀다 오면 되니까.

당연히 뻔한 폐급인 눈앞의 이놈도 좋다고 나가서 외진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아 그럼 저 그냥 여기서 약 받을래요"

"그래? 여기 약 많이 없어서 많이 힘들면 병원 가도 되는데"

"아아! 나가기 싫어요 그냥 약 주세요"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사회에서 뭐 하다 왔냐 묻자 클럽에서 엠디? 하고 왔다 한다. 그게 뭔지 모르는 눈치를 보여주니 신나서 자기가 강남 클럽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느니 하면서 신나서 온갖 썰을 풀기 시작한다.

당연히 난 귓등으로도 얘길 듣지 않고 대충 리액션만 해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찾는다고? 진짜?'


내가 찾던 그 인물이, 어떤 소설에 나올 법한 대단한 흑막이나 치밀한 마약상이라서 찾기 고역인 것보단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긴 한데 단지 그냥... 어이가 없다.


"... 그래서 약은 뭐가 필요하니?"

"하, 사실 필요한 게 여긴 없어가지고... 그냥 여기 가장 쎈게 뭐에요?"


그런 말을 아버지에게 자주 듣곤 했다. '어라? 혹시...' 싶으면 아닌 거고 '엥? 설마' 싶으면 맞다고. 지금이 딱 그 경우인 것만 같다. 그렇지만 확실하기 전까지는 조심할 필요가 있고, 조심하기 위해선 섣불리 확신해선 안된다.


"센 거는 진통제 센 거나 스테로이드 있지"

"아 그럼 그거라도 좀 주세요"

"근데 네가 필요한 건 좀 다른 걸로 보이는데?"

"예 근데 여기선 없어가지고 그냥 있는 거 주세요"

"여기에 있다면 어떡할래?"


그 말에 미친놈은 곧바로 합죽이가 된다. 산만했던 몸짓들도 즉시 일시정지. 심증으로는 확신이 든다. 혹시가 역시가 되는 순간, 정말 이 미친놈이 내가 찾던 그 접선책이 맞나 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일단 눈앞의 미친놈의 이 허술함이 연기일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이런 연기를 해서 나한테 얻을 게 없다. 그럼 이 어설픈 녀석과 대대장은 어떤 관계였을까.

대대장은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스탠스가 남들을 무시하고 아래에 두려던 사람이다. 그럼 이런 삼류 양아치 따위랑 '일'을 같이 하려 했을 리 없다. 오히려 그냥 뺏어가고 자기가 다 해먹을 생각이었겠지.


"대대장님이 네 거 가져가서 보관 중이셨지?"

"와! 씨... 맞아요! 와!!"

"내가 군의관이잖아. 여기 부대에선 당연히 모든 약을 내가 관리하지"

"와 진짜요? 섹스!!! 시발 이게 섹스지!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신남을 주체를 못 한다. 방음이 잘 안 되는 벽을 타고 대화내용이 이제 밖에 들릴까 봐 걱정돼서 진정시킨다. 물론 지금은 들려도... 내 체면이 걱정될 뿐이지만.

더는 저 타오르는 흥분에 장작을 던지지 않고 조용히 손만 들어 제지하자 얌전히 자리에 다시 앉는다. 여전히 산만한 몸짓들에 가만히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젠 나에게 집중하는 기세다. 일단 궁금증부터 해결해 보자.


"그런데 대대장님한테 어쩌다가 걸려서 뺏긴 거니?"

"하... 아 그게, 근데 좀 얘기하기 쪽팔린데"


하고 망설인다. 여태 보여줬던 추태를 생각해 보면 정말 쪽팔려서 이런다기보단 나에게 아직 경계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경계를 하는 것치곤 지금까지 굉장히 허접, 허술한 편이긴 한데 마약쟁이한테 일관성을 기대하지 않기로 하고 납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거 처치곤란이거든... 아직 안 버리고 가지고 있는 건... 혹시나 누구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돼서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 진짜 알죠! 군위관님"

"만약에 내가 이거 그냥 신고하면, 무고한 사람이 피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물건 주인이 나한테 와서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얘기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크 일처리 너무 쌔끈해요 진짜 시발! 제 구세주에요"

"그래서, 전입 오고나서부터 오늘까지. 다 얘기해 볼까? 그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이어진 미친놈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군대 들어오기 전 유흥가에서 생활하며 살았고 '형들'한테 예쁨 받아 마약 중개인이 된 것부터 시작해.

군대 들어오고 나서도 훈련소에서부터 밖의 물건 공급책들에게 택배로 약을 배달받아 조교, 동기들한테 팔아가며 돈을 받았다는 것.

단백질 보충제 담는 5L짜리 통에 물건을 감싸서 넣고 다시 단백질 가루로 덮어 안 걸리게 배달해 안 걸린다는 것.

그런데 전입 오자마자 대대장이 이등병들이 받는 택배를 통제하더니 며칠 후에 걸렸고, 오늘까지 불안에 덜덜 떨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못 자다가 날 만나기까지.


"... 맘고생이 심했겠네"

"아니 근데 진짜 시발 말도 안 되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찾았지?"


겨우 해줄 수 있는 말을 찾아 꺼내자 미친놈은 자신이 얼마나 황당했는지에 대해 장황하기 서술하기 시작했다. 군대에 먼저 다녀온 선배들 중에 걸린 사람 한 명도 없었다느니, 공항에서 검사도 통과하는 방법이라느니 등등.


사실 미친놈은 모르겠지만 난 대대장이 어떻게 마약을 찾았는지 예상이 간다. 보나 마나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들 택배 통제 면목 하에 뜯어서 자기가 쓸 거 찾다가 걸렸겠지. 단백질 가루 떠서 자기가 먹다가 안에 이상한 거 발견한 것일 테다. 미친놈 입장에선 더 한 미친놈을 만난 것. 정말 운 나쁘게 천재지변을 맞은 셈이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열심히 떠들고 있는 미친놈을 보면서 생각을 시작했다.

'물건'과 '사람' 중에서 하나를 찾았다. 즉시 신고를 해서 게임을 끝내자니 이 '사람'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기엔 부족하다. 군대 입대할 때 마약검사와 발작해서 병원을 갔을 때 혈액검사를 분명히 했을 텐데 두 번 다 걸리진 않았다. 이 '사람'이 아무리 수상해 보일지언정 자수를 하지 않는 이상 마약사범으로 체포되진 않을 거다.


'결국 물건의 위치를 찾아야 하는 숙제는 여전하네'


그래도 성과는 분명히 있다. 이 '사람'은 그런데 '일'을 같이 진행하기엔 너무도 허술하고 어설픈 '사람'인 것을 나는 알게 됐고 방 씨는 모른다. 정보의 비대칭을 하나의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사람'을 찾았으니 하루만의 성과로는 충분하다. 이걸 어떻게 이용할지만 결정하면 되는데 순간 아까의 전능감이 다녀간 가슴속의 빈자리에 끈적한 욕망이 들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혈류에 그 욕망을 태워 뇌 속까지 공급하는데, 머릿속으로 검토해 봐도 괜찮은 계획이 세워진다.


"... 뭔 특수부대 출신 이런 거 아니었을까요? 아니 시발 왜 나만 어떻게 하루 만에 걸리는 거야??"

"어떻게 걸렸는지는 이젠 안 중요해. 대대장 이제 없잖니"

"아 그렇다매요. 제대로 안 듣긴 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죽었어"

"예?!"


며칠 동안 쌓은, 사람들을 다루는 경험 덕에 미친놈이 이런 정보를 모를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미친놈은 자기의 안위,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느라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몰랐으리라. 전지적인 시점이 된 기분, 또 찾아온 전능감과 희열을 곱씹으며 충분히 즐긴 뒤 이어간다.


"아무래도... 워낙 위험한 물건이잖아? 위험한 사람들이랑 얽혀있어서 그런지 순식간에 가버리더라고"

"와... 시발 군인이 그렇게 쉽게 죽어요?"

"여기 최전방이야. 강원도 끝자락. 사람 하나 죽어서 묻는 게 얼마나 쉽겠니, 안 그래?"


군대에 왔는데도 제 집처럼 편안히 까부는 이 미친놈에게 가장 무서운 게 뭘까를 생각해 봤다. 미친놈은 중학생이나 초등학생 수준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럼 그 나이대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걸 찾으면 답이 나온다. 바로 위의 형들, 선배들.

정상적인 성인 입장에서 보면 별 볼일 없는 놈들이 도토리 키재기 하는 거나 다름없지만 이런 말을 해봐야 그 당사자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니 되려 공포심을 자극해 조종하면 편할 듯했고, 거의 통했는지 미친놈은 다리 떠는 것도 멈추고 벌써 쫄아있다.


"여기 동네도...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놈들이 있었나 봐. 대대장님은 자기만의 유통로를 뚫으려다가 그만... 처리된 거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책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만 살짝 돌려 시선을 맞춘다.


"그걸 보니까 좀 걱정이 되더라고. 자기... 나와바리에서 다른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도 못 봐주고 죽이는 놈들이 여기 동네 사람만 그러겠냐고. 다른 동네더라도, 기껏 공급해 준 물건을 뺏긴 사람을 어떻게 할지는 뻔하지 않아?"

"..."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럴만하지. 애초에 병원 외진 나가는 것도 꺼려한 이유가 뭐겠는가. 당연하게도 미친놈의 형님들이 강원도 양구까지 와서 얘를 해코지할 능력이 있을 가능성은 낮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믿음이다. 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믿음. 그 믿음만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된다.


"거기다가 여기 동네 놈들도 궁금한 모양이더라고, 도대체 누가 이 대대장한테 물건을 건네준 건지... 그래서 이 잡듯 온 동네를 뒤져보는 중이더라고"

"... 애미"

"당연히 아직은 못 찾고 있지. 근데 워낙 좁은 동네다 보니까 민간인 중에서 없는 거면 군인인 것도 뻔하거든. 애초에 대대장도 군인이었으니까"

"하 좆됐네 진짜... 저 어쩌죠???"


이젠 안심을 시켜줄 차례다. 본인은 파란만장한 유년 시절 덕에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겠지만 내가 봤을 땐 그냥 애새끼다. 의지하고 싶은 대상, 자기 윗사람이 형님처럼 생기면 의존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게 내가 되면 '사람'에 대한 고민은 정말로 끝.


"죽으란 법은 없지. 내가 있으니까"

"군위관님이요?"

"내가 왜 갑자기 오늘 이등병 전부 모아다가 상담을 했겠니... 다 너 찾으려고 한거야, 그리고 이거 해결하는 거 어렵지 않아"


설명을 시작했다. 미친놈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도 계획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미친놈의 '형님들'에게 공급받은 '물건'을 (실은 내가 지어낸) '동네 조직'에게 유통을 맡기는, 이른바 두 조직 간의 중매쟁이 역할을 나와 같이 하는 거다. 그럼 미친놈은 '형님들'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동네 조직'에도 처리당할 일이 없고 오히려 그 사이에서 이득을 나와 나눠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설득함으로써 미친놈이 나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혼자 헛짓거리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려서 잡혀가는 걸 막을 수 있다. 왜 잡혀가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을까... 고민해 보니 답이 바로 도출됐다 :

마약사범으로 미친놈이 잡히면 대대장도 공범으로 연달아 잡힐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럼 수사가 시작될 거고 방 씨의 영향력이 커진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이 상황을 주도하는 건 내가 돼야만 한다.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음습한 쾌감이 날 지배하는 기분이다. 척추부터 뒷머리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지금 모든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는 상황에 대한 희열이 타고 흐른다.

이번엔 아까 정작과장과의 면담 때처럼 실수하지 않고 의지하고 싶은 믿음직스러운, 어른의 모습을 유지한 채 미친놈에게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 알겠지? 너 생각은 어떠니?"

"와 군위관님! 아니 형님!! 이제 형님으로 모실게요 사랑합니다 형님!!!"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손을 부여잡고는 기뻐한다. 난 하하 웃어주고 축축한 미친놈의 손길에서 슬며시 내 손을 뺏다. 그래 군위관이라는 귀에 거슬리는 호칭보단 차라리 형님이라 불리는 게 낫긴 하지. 이제 마무리 작업을 할 차례다.


"근데 하나 걸리는 게 있어... 그거 해결하는데 너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아 뭡니까 형님! 제가 다 하겠습니다!"

"죽은 대대장이랑 편먹은 동네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말이지..."


하고 방 씨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줬다. 욕심을 부려서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고, 대대장을 '동네 조직'에게 제보한 것도 그 사람이라고. 심지어 '형사' 신분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든 그 공권력을 남용해 우릴 압박할지 모른다고.


"와 십새끼네요 진짜"

"그치. 나도 이 사람 만날 땐 조심을 좀 해야겠으니까... 너 운전병이지?"


그렇다는 대답에 나도 미친놈의 손을 잡고 기뻐할 뻔했다.


...


"군의관 뭐 또 무슨 일 있어?"

"어... 형사님이 오늘도 뵙자고 하셔서, 그 운전병이랑 다녀와도 되는지 허가받고자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보통 일이 많은 게 아닌지 몇 시간 터울만에 급격히 더욱 피곤에 찌든 정작과장은 순순히 그러라고 허가했다. 따로 더 이상 용건도 없겠다. 바로 돌아가려는데 정작과장이 붙잡는다.


"아 군의관. 그 의무물자 확인? 뭐, 그거 군수과 일도 아니래"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또 뭔가 심상치 않은 직감이 드는데 아직 그게 뭔지 파악이 안 된다. 무언가가 마치 날 잡아당기는 기분이다.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었나? 조금 더 생각해 보려는데 정작과장의 이어지는 말에 나도 그만 얼어붙었다.


"어어, 그리고 군의관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어. 뭐 연락이 안 닿는다고 그러시대? 한번 확인해 보고"


예상치 못한 화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결정 못했는데 정작과장이 축객령을 내렸다.


"생일이었다면서? 뭐, 워낙 정신이 없어가지고 몰랐네... 늦었지만 축하하고, 뭐 더 필요한 거 없나? 오늘은 가서 이제 일찍 퇴근해 봐"


그리고 다시 복도. 전능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려고 정문을 나와 야외로 나오자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내린 지도 좀 됐는지 벌써 발목까지 올라오게 쌓였다.

흰 바탕의 눈 이불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이틀 전의 기억 대신 갑자기 어렸을 때가 떠오른다.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놀이터에선 내가 왕이었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내가 군림하고 있던 때. 한창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등장해 그런 나를 끌어내렸다. 애들 장난은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항거할 수 없는 권력차를 생애 처음으로 느꼈던 기억. 나에 대한 다른 원생들의 환상이 무너지는 거에 좌절했었다. '아 쟤도 결국 우리랑 같은 유치원생일뿐이구나'하는 그 시선들.

그 이후로 한 번도 누군갈 부리고 다스리며 사는 걸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며칠 전까지.


하지만 그건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트라우마도 아니고 별 대단한 기억도 아니다. 그저 한 개인의 과민반응일 뿐. 주머니 속의 낯선 크기의 네모난 폰을 꺼내 들어 화면을 켜자 메모장이 열려있다.


[의무물자 확인. 누구?]


대대장이었고,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는 작업이라고 퇴근하기 전에 무병이에게 잊지 말고 말해줘야겠다. 그전에 메모장을 끄고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이어지는 몇 번의 수신음. 아무래도 아직 낮이라 받지 못하는 걸까? 싶은 순간


"여보세요"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


"예 아버지... 접니다"

"음. 폰을 바꿨나 보네. 번호는 왜 같이 바꿨니?"

"생일이라 기념해서 한번 바꿔봤어요"

"싱겁긴.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려고 연락했는데 안 받아서 놀랐다"


지금으로선 솔직하게 대답하기 참 곤란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지만 자연스레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생일 축하 연락으로 부대에까지 연락을 했던 모양이니 곤란한 질문이 이어지지 않게 잘 끊어냈다.


"죄송해요, 정신이 없었어서... 조만간 한번 집에 들를게요"


전화 끊기 전 마무리 멘트로 딱 적당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됐다, 바쁜 아들 일정에 내가 맞춰야지, 눈 많이 오고 있는데 퇴근은 언제니"

"...? 설마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여전히 눈치는 귀신같구나. 그래 어제부터 읍내에 호텔 잡고 쉬고 있으니 오늘 퇴근하면 좀 보자"


아... 정말이지 이건 정말 상정하지 않은 변수인데...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오늘은 부대일이 정신이 없는데요... 아버지 바쁘지 않으세요?"

"어차피 오늘 대설특보라더라. 집에 돌아가기도 글렀겠다 일러도 내일까지는 여기에 있을 테니 바쁜 일 다 끝나면 주소 보내줄 테니 찾아오렴"


더 이상 거절할 명분도 없겠다, 알겠다고 마지못해 대답하고 전화는 끝났다.

한숨을 내쉬자 내 안의 뜨거운 입김이 내리는 눈 한송이를 녹여 땅으로 툭, 하고 떨어트린다.

내쉬었으니 들이마쉴 차례,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꿰뚫는다. 한낱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격하됨을 느끼며 발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돌아간다.



작가의 이전글[소설] 압박, 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