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화요일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깝게 라는 말이 있다. 방 씨에게 오늘 일을 보고하며 문득 그 말이 생각나서 퇴근 후 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말까지 해버렸다.
[... 아버지? 너가 애도 아니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시점에?]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잖아. 난 오늘 하나 건진 거라도 있지, 넌 뭐 했는데? 그리고 어차피 퇴근하고 나서 내가 부대 밖에 뒤져봐야 너도 못 찾은걸 내가 찾겠어?"
방 씨에게는 접선책, 그러니까 '사람'을 찾은 얘기까지만 했다. 사실대로는 아니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람'을 찾았고, '물건'은 대대장이 따로 보관했다 해서 못 찾은 상황이며, '물건'을 공급해 주는 조직에게 이미 공급받은 '물건'으로 얻은 수익을 전달하지 못하면 우리가 곤란해진다... 고 했다.
아까 미친놈을 구워삶으며 급조한 거짓말이지만 꽤나 그럴싸해서 방 씨에게도 사용했다. 사실 아무리 더 이상 '마약청정국' 타이틀을 달 수 없는 나라라지만, 마약조직이 이런 최전방 시골마을까지 찾아와서 공급책을 훼손할 능력이나 깡이 있을 가능성은 낮다.
방 씨도 어쨌건 경찰. 이 점을 눈치 못 챈 건지 혹은 챘지만 굳이 나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건지는 몰라도 따로 지적을 받지는 않았다.
[... 근데 이 새끼는 어제부터 자꾸 말이 짧네]
"그러니까 상호 간에 존중을 좀 합시다. 각자의 사생활도 존중해 주고요, 예?"
[말 한마디를 안 져요... 됐고, 허튼짓이나 허튼 생각하면은]
"죽이든 잡아 처넣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데, 우리 운명 공동체인 거 잊지 말고, 내 알아서 할게"
이후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폰 너머로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끊는다. 차량 블루투스로 통화하던 화면이 꺼지자 자연스레 노래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달리기 할 때 듣던 노래 플레이리스트. 읍내 목적지까지 도착 예정 시간은 14분.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과 일 차선 도로에 저속으로 미끄러지는 차들.
노래의 음률에 맞춰 생각도 2일 전으로 흘러간다.
"으으... 거기 누구... 군의관? 군의관이야?"
"... 대대장님"
"으아... 죽으란 법은 없구먼, 엉? 보면 알겠지만 내가 좀 으... 다쳤어. 빨리 나 좀 살려줘 봐"
이때의 감정은 어땠는지 명확히 기억난다. 비현실적이고 전혀 예상 못한 광경에 당혹스러움을 느꼈고 점차 무슨 상황인지를 제대로 인지하게 되자 스멀스멀 스며드는 기쁨과 우스움... 그리고 희열.
격동하던 심장박동도, 귓가를 스치던 12월의 찬바람도, 눈밭에 젖어 아린 발가락도 다 잊었다. 통각을 묻어버리는 그 짜릿한 우월감. 웃음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회적인 체면을 늘 챙겨 왔기에 차마 빵 하고 웃음을 터뜨리진 못하고 입으로 손을 가리고 입술을 오므린 채 쿡쿡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대대장이 봤던가. 눈이 마주쳤던가.
"야 인마! 뭐 해! 당장 119 부르고 엉? 나 응급처치를 해야 될 거 아냐 인마!"
하고 주섬주섬 품 안을 뒤졌다. 아마 핸드폰을 찾으려던 것으로 판단했던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절벽. 눈밭. 휑한 주말의 시골길 풍경.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아무도 이곳을 못 보리라 싶었다.
겨우 폰을 찾아 꺼낸 대대장의 손을 걷어차 눈 밭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평소였으면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박살난 인형처럼 고장난 몸뚱이로 그러긴 쉽지 않았을 거다.
결국 걸레 문 입으로 온갖 저주와 욕설, 되지도 않는 협박만을 외쳤는데 그걸 보며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렇게 힘 빼면 오래 못 버틸 텐데"
"... 엉? 너 인마... 너..."
아 그러네. 앞서서 웃음을 참을 때 대대장이 날 보지 못했었다. 이틀 만에 기억을 하려다 보니 착각했나 보다. 정확히는 이때 나와 대대장이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보통 사람의 감정이란 게 순식간에 바뀌기 어렵다. 그렇기에 어렵사리 그 순간을 포착하면 인간의 감각 및 운동 신경의 속도와 얼굴 근육 정밀한 움직임에 경외감이 든다.
이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분노와 답답함, 고통으로 잔뜩 찌부러진 눈썹과 미간의 주름에 윗입술이 올라가며 드러난 이.
그 모든 게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몇 초만에 전환된다. 순식간에 확장되는 동공과 펴지는 미간 그리고 위로 올라가는 눈썹에 오히려 이마에 주름이 진다. 입술은 서로 벌어져 있지만 아까와 달리 윗입술에 힘이 빠져 그저 아 하고 벌리고 있는 모양새라 안의 이는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멍청해 보이는 인상이 된다.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하려고 하니 대대장이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시선을 피했다.
정말이지 낯선 모습이었다. 지난 세월 간 모두를 그렇게 깔아뭉개며 고압적으로 대하던 그 대대장이 맞는가? 지금의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럼에도 더는 욕도 못하고 날 쳐다보지도 못하는 대대장.
이 순간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내가 제안을 했다.
"절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까?"
"엉? 인마... 그게 무슨..."
...
[안녕,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오늘 날씨만큼 흐렸나요?]
추억을 곱씹으며 운전을 하다 보니 마지막 곡이 틀어지면서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 상념에서 깨고 다시 현실을 직시할 때다. 아직 이 모든 걸 맘 편하게 온전히 즐기기엔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니 집중해서 한 번에 하나씩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왔구나"
두터운 패딩 위로 쌓인 눈을 털어내며 카페에 들어오자 앉아있던 아버지가 손을 들어 날 반긴다. 6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젊어 보이는 인상의 교수, 내 아버지다.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게 작년 임관식 때였으니 1년 반 만의 대면이 되겠다.
반가움보단 낯섦이 먼저 느껴진다. 군인들 사이에서만 살다가 학자를 오랜만에 보아서일까? 아버지의 인상착의와 용모는 양구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림체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테가 없이 네모난 안경과 날카로운 인상의 이목구비, 살집이 있지도 마르지도 않았지만 뼈대가 있어서 앉아있음에도 커 보이는 덩치, 그리고 옷은 맞춤 정장을 입고 있다. 아버지는 카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책상에는 읽다 만 책과 고급 만년필 그리고 핸드폰 세 개가 각이 잡힌 채로 놓여있다.
누가 보면 아들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사장이 직접 출두한 줄 알겠다.
"그래 오랜만이네 군의관 선생, 바쁜 양구 생활은 이제 다 적응했니?"
"네... 2년 다 돼가니까요"
"이젠 아주 여기가 집 같겠네?"
아버지와의 대화는 주로 이렇다. 말에 늘 뼈가 있다. 방금 말도 해석하자면 군의관이 바쁘지도 않으면서 양구 시골 짜기에 박혀 집도 안 들리고 뭐 하고 있었냐는, 자연스러운 근황 질문이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아버지도 군의관 출신이다. 그것도 30년 전 나를 낳았을 무렵에 이곳, 양구에서.
"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이곳을 내 발로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난 운명보다는 저주라고 믿는 편이지만 굳이 딴지를 걸지 않고 하하 웃을 뿐이다. 방금 말도 해석하자면, '네가 하도 안 와서 내가 여기까지 와야만 했다.'라고 빚을 지워두는 셈이다. 보통 이런 밑밥은 뭔가 나에게 지시할 일이 있을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곧 부대를 옮길 거잖니, 어디로 생각 중이니"
바로 본론이다. 군의관은 매년 1회 교류라는 제도를 통해서 부대를 옮길 수 있다.
난 작년에 부대 옮기는 것을 택하지 않았었고, 그 덕에 곧 있을 내년의 교류에서는 내가 희망하는 부대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버지도 알기에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묻는 것이다. 전화나 다른 연락을 통해서는 내가 워낙 자주 얼버무리고 상황을 회피했으니까.
마저 하하 웃으며 손을 뒷목에 고개를 조금씩 흔들며 자연스레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생각을 좀 더 해보려고요"
역시나 아버지는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침묵을 지키면 말을 하던 사람이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껴 더 말을 꺼내게 된다고 배웠었다. 그 수법을 가르친 학생에게 직접 사용을 하시다니...
나도 그에 맞게 대처를 했다. 시선은 고정, 몸도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하던 잔움직임을 이젠 의식적으로 계속 진행한다. 정보를 더 주지 않는 것, 상황을 주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 수단이다.
"... 그래, 생각 좋지.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생각하는 김에 내 제안도 생각해 보렴"
"제안이요"
"법의학자 해라"
사실 이 대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수도 없이 반복됐던 진로 결정 담화였기에 우리 둘 모두 서로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고 대응해 왔던 거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화두를 던진 건 처음이지만, 1년 반동안 연락과 대면을 회피했으니 아버지도 나름의 강수를 둔 것이겠지.
"하하 법의학이요..."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아직도 어느 부대 갈지, 어느 과 갈지 결정도 못했잖니. 내가 볼 때 네가 남은 기간 동안 결정을 할 거란 보장이 없어 보이네. 차라리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할 바엔 진로를 확정 짓고 준비를 하는 게 낫겠지"
"맞는 말씀이지만, 다른 과로 생각하고 준비를 할 수도 있잖아요"
"무슨 과?"
그리고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나는 관심 있는 과가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아니 정확히는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떤 희망을 품지도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서 사는 게 내 삶이다.
이런 속마음을 나는 끝내 털어놓지 못했고 정적이 길어지자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간다.
"봐라 의사 경력 4년 차에 30살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진로를 못 결정했잖니. 혼자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1년 더 있는다고 될 게 아니야. 내년에 서울 내에 혹은 인근 부대로 옮기고, 서울대 병리과 후에 법의학 하렴"
논리적으로 반박할 게 마땅치 않고, 지금 나한텐 관심도 없는 내 진로 고민보다 훨씬 더 긴급한 사안들이 쌓여있다. 이 곤란한 상황을 바로 넘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하하 그럴까요"
승낙. 어차피 지금 말로 그러겠다 해봐야 확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대 옮기는 것은 교류를 직접 내년에 신청을 해야만 되는 거고, 병리과나 법의학 하는 것도 전역 후에나 시험과 면접 보면서 확정 짓는 거다.
지금 내가 대충 말로 수락을 해봐야 어떤 대단한 효력이 있지 않다.
"그래, 오늘이 12월 8일 화요일이니까... 1월에 날 잡고 교수님들한테 인사드리러 다녀오자. 안 그래도 얘기 다 해놨어. 군의관 마지막 해는 미리 가서 논문 작업 참여도 하고 얼굴 비추면서 보내고"
"네 그럴게요"
"전문의 따고 법의학 하러 국과수로 들어가면 집이랑 재산도 이제 다 물려줄게"
"괜찮아요, 저도 제 한 입은 먹여 살릴 수 있어요"
"거절하지 마렴. 어차피 은퇴도 멀지 않았으니까, 다 주고 혼자 여행이나 다니면서 살려고 그래"
"그러시다면..."
"그래 그럼 다 동의한 거지?"
"네 그쵸"
"그래 이렇게 흔쾌히 승낙하니 얼마나 좋니. 10분도 안 돼서 다 확정 지을 수 있는 것을"
다 결정됐다 싶었는지 말에 다시 뼈가 돋아난다. 이렇게 쉽게 수락할 거였으면서 왜 지난 1년 반동안 이 화제를 회피하고, 결국 당신까지 직접 오게 만들었냐 하는 뜻이다.
굳이 말대꾸하지 않고 마저 하하 웃는다. 지금 내 머릿속은 그냥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관사로 돌아가 원래 하던 고민과 문제 해결에 힘쓰고 싶단 생각뿐이다.
그래도 빨리 처리했으니 이제 아버지를 돌려보내고 나도 관사로 가면 되겠다 했는데, 아버지가 책상에 뒤엎어져 있던 폰을 돌려 키더니 녹음 중지 버튼을 누르자 잠시 사고가 멈춘다.
"하하 그거 아니? 구두 계약도 다 법적 효력이 있어. 알아두렴"
"... 계약... 이요?"
"그래 날짜, 사람, 조건, 보상 필요한 건 다 들어갔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하 하고 아버지가 이제 풀어지며 웃는다. 나도 하하... 애써 웃어보지만, 허가 찔렸다.
내가 지난 며칠간 써오던 모든 방법들이 누구에게부터 배웠고, 유래된 건지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뭐, 상관은 없다. 언급했다시피 내 미래가 어떻게 예정되든 관심 없으니까. 이걸로 아버지께서 만족했다면 그만이지.
그래도 막상 오랜만에 당하는 입장이 되자 생경하긴 하다. 하지만 어쨌건 다시 양구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다고 겨우 쓴 속을 달래 본다.
"흠, 요새 부대에선 별일 없니?"
내가 당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이상해 보였는지 아버지가 다시 분석하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물론 이것만큼은 더 파고드는 것을 차단해야만 한다.
"별 일 있어도 저야 잘 모르죠. 전 군의관인데"
"..."
또 더 이야기해 보란 의도된 정적. 한숨을 티 안 나게 속으로 쉬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한다.
"아직 진행 중인 일이 있어서요. 다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
"이번 주 내로 끝나니까 그 김에 서울 가서 교수님들한테 새해 인사도 드리고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렴. 눈이 이렇게 와서야 원, 운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일까지 여기서 쉬다가 내려갈게"
내가 완전 항복을 하고, 아버지의 제안에 다 동의한다는 의미의 대답으로 아버지를 겨우 만족시키고 불편한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잠시 안도가 든다.
"멍에는 얼음찜질이 좋다. 곧 인사도 드리러 다녀야 하니 얼굴 관리 잘하고 와라"
"... 네 그럴게요"
내가 지금 어떤 꼴이었는지 잊고 있었다. 멍이 든 상태로 아버지를 만나러 오다니, 아무리 정신없었다지만 나답지 않은 허술한 실수다.
아마 아버지는 내가 일부러 이 모습 이 꼴로 나온 건지 재다가, 대화 끝까지 빌드업을 시작하지 않으니 이야기를 직접 꺼낸 거일 테다.
일종의 걱정 표현일 수도 혹은 어떻게 보면 내가 어떤 일에 휘말린 것을 알고 있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다행히 내 문제는 나에게 일임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난 감사인사와 함께 자리를 일어나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나선다.
뒤통수에 아버지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돌아봐서 굳이 답을 확인하진 않는다. 때로는 굳이 관측해서 상태를 확정 짓는 것보단 그러지 않는 게 더 현명할 때도 있으니까.
...
카페를 나와 내 차에 들어와 운전석에 앉았다. 그새 쌓인 눈 덕에 차 안은 되려 따뜻해 긴장이 풀린다.
시동을 켜고 창문 위로 덮인 눈이 녹이길 기다리며 안심하기를 잠시, 익숙했던 수치감이 얼굴로 솟구쳐 밀려온다. 분명 실내에서 데워졌을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자 두 신체 말단부위의 온도차가 각각에게서 느껴진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렸을 때부터 늘 이래왔다. 한평생 읽히고 분석당하고, 결국엔 뜻대로 움직이게 됐다. 나 스스로 결정했다 싶었던 모든 결정들도 다시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결정됐던 거였다.
의대와 의사를 진로로 처음에 결정했던 것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살 수 있는 삶이니 좋아 보여서 선택했던, 나만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인 줄만 알았다. 다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께서 설계한 거임을 깨달은 건, 병리과 수업 당시였다.
출석 호명을 하다가 내 이름을 부르시곤 잠시 멈칫하시더니 아버지 성함을 여쭙던 교수님. 원체 아버지가 법의학자로 유명하시고 내 자랑을 학교 후배에게 했나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말씀드렸더니 하시던 말씀이...
'네가 어렸을 때부터 법의학자가 꿈이었담서? 이야 잘됐네, 법의학 하려면 우리 병리과 먼저 해야 되는 거 알지? 수업 끝나고 따라와라 내가 의국 구경이라도 시켜줄게'
별것 아닌 한 마디였다. 그렇지만 그 말이 임계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나는 꿈이란 게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있었다고 해도 그게 뭔지도 생소한 법의학자는 아니었을 거다. 그럼 거짓말을 누군가가 그 교수님께 했다는 건데,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 사실에 갑작스레 그전까지 있었던 수없이 많은 우연들이 마치 봄날의 꽃이 한순간에 개화하듯 터져 내 의식의, 의심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학창 시절 내내 집에 가득했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온갖 범죄 관련 책들... 질려서 더는 읽지 않게 된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키웠던 강아지의 의문스러운 발병과 급사.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내가 서재에서 찾았던 수의학 및 생리학, 생화학, 약리학 책들... 읽고 공부하고 결국엔 사망 원인으로 독에 의한 급성 간부전을 1순위로 의심했었다.
이후에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나 찾기 위해 다시 범죄 관련 공부를 했었고 집에서 일해주던 사람들을 캐묻고 떠보며 범인을 찾곤 했었다.
그리고... 늘 병약해서 고등학생 때부턴 입원실에 살다시피 하던 어머니의 병사. 장례식 직전 갑작스레 결정된 부검과 어떤 숨은 이유가 있어서 돌아가셨나 하고 참관을 희망했던 나.
근데 왜?
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진로를 고집시켰던 걸까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뭔가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아니 확신한다. 그렇지만 지난 3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파악을 못한 것을 지금 바로 떠올릴 수는 없다.
그럴 때도 아니다. 지금은 따로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몇 분을 차에서 그렇게 보내고 있자 전화가 걸려온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 했던가, 수신자는 방 씨.
[아버지는 잘 만나고 왔나?]
참 멘트만 보면 굉장히 다정하다. 그래도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느덧 손과 얼굴은 같은 열기를 지니게 되었기에 손을 내리고 의자에 기대앉으며 대화를 응한다.
"어 이제 가려고, 눈 때문에 한 30분은 걸리겠네"
[아, 됐고. 서두르지 말라고. 나도 오늘 할 일이 생겨서 시간 안되니까]
어쩐지 수상한 게, 말투도 부드럽다. 기분이 좋은 눈치. 바로 이 사람이 기분이 좋을 만한 일이 뭐가 있나 이유들을 생각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설은 '물건'의 위치를 찾았다는 것. 그럼 날 급하게 만나서 재촉할 필요가 없어지니 일견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방 씨였다면, 오히려 날 불러들여서 '사람' 즉, 접선책을 알아내고 거슬리는 나는 처리하던가 했을 거다.
물론 그럴 생각을 못해본 것일 수도 있고 나에게서 정보를 유도할 만한 능력도 없다...
라고 결론 내릴 뻔하다가 당장 어제가 떠오른다. 나보다 작고 마른 체구임에도 순식간에 제압해서 뺨을 올리던 방 씨. 다시금 얻어맞은 얼굴과 깔렸던 가슴께가 욱신거린다. 날 처리할 신체적 능력이 없진 않겠군 싶다. 그럼 뒤처리는 과연 어떻게 하려고?
심란한 일들이 많았던 오늘이라 유독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 같아 잡생각을 전원 끄듯 끊어낸다.
"할 일?"
[벌써 잊었나 본데, 나 경찰이야. 할 일이야 늘 있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조금 더 떠 볼 필요성이 있어 의도적인 침묵을 유지한다.
[... 아무튼 내일 다시 부대에서 '물건' 찾고 연락해. 그 '사람'도 잘 구슬려두고]
"그래. 내일 보자고"
하고 전화는 끊긴다. '물건'을 홀로 찾아내고 나에게 블러핑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침묵에 불편함을 느껴 꺼낸 화제가 '물건'을 찾아라! 라면 더더욱 가능성은 떨어진다. 대신 말귀를 돌린 것으로 보아 뭔갈 감추고 있다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럼 뭘 숨기는 걸까?
방 씨는 비록 나에게 다뤄지는 중이지만, 멍청하진 않다. 어제도 진실 속에 거짓을 감춰서 날 되려 잡아내지 않았던가. 그걸 미루어 봤을 때 경찰로서 할 일이 있다는 게 다 거짓은 아닐 터다.
그렇지만 다 진실도 아니다. 진실이라면 굳이 나에게 숨길 이유는 없다. 아니, 알리진 않더라도 의심하는 나에게 역정을 냈을 거다. 사람의 감정 중에 '억울함'이란 것은 그리 쉽게 감추고 넘길 수 있는 약한 감정이 아니니까.
그럼 다시 정리를 해보자, 방 씨가 형사로서 뭔가 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걸 나에게 숨겼다. 숨기는 이유는 그 '할 일'이라는 것이 나한테 불리하고 본인한테 유리한 무언가이기 때문일 거다.
그게 뭘까? 방 형사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다.
결국 난 저속으로 운전을 시작하며 몇 번째일지 모르겠는 복기를 시작한다. 방금 전 아버지와의 대면에서부터 일요일까지 역순으로...
문득 아까 아버지와의 대면에서 낚였던 수법이 떠올랐다. 녹음. 녹음을 했던 핸드폰.
어제 내가 방 씨를 낚았던 방법도 똑같았음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엊그제, 사건 당일 날에도 핸드폰이 있었다. 내가 발로 차서 눈 밭 어딘가로 날려 보냈던 대대장의 핸드폰.
당시에 119에 신고하고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대대장을 실어 나르다 보니 전혀 잊고 있었다. 퍼즐이 맞춰진다. 방 씨가 사건 현장 조사를 하다가 찾았구나.
이를 꽉 깨물고 액셀을 밟자 제설된 얼음길 위로 차가 미끄러지듯 가속한다. 한밤중에 펑펑 내리는 눈이 차의 상향등에 부딪혀 빛을 반사하며 시야를 방해한다. 운전도, 시야확보도 정말 최악이다.
정말이지 무엇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우월감은 사라졌고 남은 건 빙그르르 멋대로 돌아가는 핸들과 그걸 불안하게 비틀며 눈이 한가득 내리는 양구의 밤길을 운전하는 나의 육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