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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Sep 19. 2016

우치다 타츠루에게 듣는 육아와 학교의 역할

우치다 타츠루 ‘수업이 이루어지는 조건’ 5

Q: 2명의 아들이 있는데, 첫 째(11)가 배려심이 부족하고 자기방어가 심하다. 그래서 모든 걸 받아줘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아무래도 부모와 자식간이다보니 자꾸 독을 품게 된다. 어떻게 하면 엄마로서 그것을 잘 받아들일  있나요?          



부모에겐 자녀를 놔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정도 나이가 되면 부모와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일본말로 ‘親離れおやばなれ(부모로부터 자식이 자립함)’, ‘子離れこばなれ(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부모가 떨어져줌)’의 시기는 10살인데, 아이의 배려심이 부족하거나 자기방어가 심한 것을 부모가 해결할 수는 없다. 아이의 고민은 아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 [엄마수업] 띠지의 글귀. 우치다쌤의 말과 공명한다.



그런 고민의 원인이 엄마일 경우라도 엄마가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아이 스스로가 원인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엄마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부모는 이 시기에 최대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되,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는 전력을 다해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저희 딸이 18살에 독립을 했는데, 그 때 “돈이 없어서 힘들 땐 언제든 빌려줄 테니 말해라”,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 돌아와라”고 말해줬다. 딸이 18살이 될 때까지 내가 혼자 키웠는데 어렸을 때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을 알기에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줬다. 하지만 조금 자라고 난 다음엔 “니가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전부 사줄 테니 언제든 말해”라고 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 그 전만 해도 어떤 것을 사야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아빠에게 맡겼는데, 그 때부턴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상황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 스스로 그런 상황에선 진중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는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다. ‘부모님은 언제든 나를 믿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지적 성장은 이루어진다.           



▲ 누구에게나 섬이 있고, 그 섬은 고유의 가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파괴하려 한다. 그 때 존중이 필요하다.



     

자식의 취향을 존중할 때 서로의 관계가 원활해진다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것은 애정뿐만 아니라, 존중도 바란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부모가 저지르기 쉬운 문제는 ‘자식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이다. ‘존중이란 거리감을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함께 있을 때조차도 존중할 수 있다.  

나 또한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바랐던 것은 존중이었다. 10대의 강렬한 감정이 바로 ‘당신과 나는 생각이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 달라’는 존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처럼 아이가 자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정보다 존중이라 할 수 있다. 애정표현은 보통 ‘너의 문제는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하게 되기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비난이 아닌 이상 비판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할 테지만, 아이는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비판하지 않도록 아이가 6살 때부터 높임말로 말을 했다(일본의 경우 부모가 자식에게 높임말을 사용하지 않음). 내가 어렸을 때도 존중을 받고 싶었기에, 딸에겐 그렇게 한 것이다.

존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불편하지 않다. 부모 자식 간에 거리가 가까우면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부모만 상처를 받게 되는 반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오히려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식이 성장함에 따라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늘어만 간다. 그러니 이해하려 하지 말고 애정을 기반으로 관계를 형성하되, 결국 존중을 해야만 서로의 관계가 원활해진다.                     



▲ 자식이 커갈 수록 나와는 다른 너라는 걸, 동등한 인격체라는 걸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Q: ‘스승은 등대와 같다라는 메타포의 내용은?    


      

학교에선 변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     


학교의 역할이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돌아오면 학교 건물이나 교사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미디어나 정치가들은 교육과정을 바꾸거나, 학교의 모습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교수들도 대우가 좋으면 다른 학교로 옮기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학교라는 곳은 자신이 얼마만큼이나 성장했는지 잴 수 있는 잣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기에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뒤엔 등대가 서 있어서, 등대를 보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역할을 하는 등대가 없어진다면 자신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왔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 학교는 등대다. 그 자리에 그렇게 있으며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와 교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역할도 학생이 졸업한 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대학을 찾아온다. 1기부터 20기까지 졸업생이 있는데 이들이 모여서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후, 나를 보고선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네요”라고 말한다. 나이도 들었고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학생들은 과거의 자신들을 추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선생님이란 자기 자신의 성장을 잴 수 있는 기준점이 된다. 제가 5년 일찍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 가장 아쉬워한 사람은 재학생이 아닌 졸업생이었다. 이들이 아쉬워하는 이유는 ‘같은 학교, 같은 강의실에서, 나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 올해 2월에 단재학교를 찾아온 선배들. 학교는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곳이어야 한다.



수년 전에 어떤 졸업생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땐 쉬는 날이라 보통 같았으면 학교에 없었을 텐데, 그날은 우연히도 학교에 갔었고 그 학생을 마주친 것이다.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집에 왔는데 “오늘 학교에 간 이유는 일을 그만두는 것을 결정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전부터 무언가 생각할 게 있으면 고베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가서 생각하곤 했었어요. 그곳에 가면 20살의 나로 돌아가, 그 당시의 나라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까 상상할 수 있거든요”라는 메일이 왔더라.

그 메일을 읽어보니 학교란 원래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곳에 오면 학창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있고, 젊음의 샘솟는 생명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성장했고, 얼마만큼 왔는지 잴 수 있는 기준점인 것이다. 학교와 교사는 바로 그런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모항이 있어야만 배가 멀리갈 수 있듯이, 학교라는 모교가 있어야만 아이들도 안심하며 더 큰 꿈을 향해 나갈 수 있다.                



▲ 학교는 모항과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감한다.



(사족: 학교는 모항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문교사인 선배와 이야기하다가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형이 예전에 가르쳤던 학생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학생이 "이번에 수능을 보는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인사드리러 학교에 찾아갈게요"라고 하더란다. 학교든, 선생이든 학생의 실패와 성공에 상관없이 편하게 돌아올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학교가 모항이 되는 길은 요원해보인다.)




     

Q: ‘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   

  

‘노’는 죽은 사람의 이야기다. 여러 이유로 죽었지만 영혼이 남아 있어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왜 죽었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전반부엔 사자와 여행객이 만나 자신이 왜 죽었는지를 연극적으로 표현하고 후반부엔 모든 것이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다. 즉, 현실에서 꿈으로,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라는 것은 사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에는 자질구레한 규칙들이 많이 있다. 사자를 불러들일 땐 당사자가 넘어지거나 죽더라도 불러들이는 행위를 멈춰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여 사자를 영접해야지, 내려왔던 영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 예술은 억눌린 것, 잠재된 것, 금지된 것을 공식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이란 나라가 생긴 후 나라로부터 추모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극이 ‘노’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문화에서 노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빛이 닿는 곳을 찬양하는 수많은 공식 행사들이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공식행사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노’는 바로 그와 같이 어두운 곳을 비춰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자와 소통을 한다는 부분에서 한국의 무속신앙과 비슷하지만, ‘노’는 신내림을 받지 않은 사람도 사자와 소통을 할 수 있기에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 다방면의 지식인이란 점에서 조선시대의 정약용, 현재의 김용옥을 떠올리게 한다.





목차     


1. 똑똑할수록 배움에서 멀어진다

미지의 세계를 안으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

지금 시대가 배움을 등한시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합리적인 소비활동을 학교에서도 하려 한다

대학평가가 오히려 대학을 병들게 하다     


2. 자신을 개방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소비자 마인드, 연구를 망치다

배우는 자의 기본 전제, 소비자마인드 벗어버리기

배움이란 나의 인식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

상처가 많은 아이일수록 배우기를 싫어한다

배움의 조건 1 - 자신을 드러내도 불이익 없는 공간

  

3. 오해가 스승을 만든다

어딘가 나를 이끌어줄 진정한 선생이 있을까?

배움의 조건 2 - 신뢰하려 노력할 때, 스승은 있어진다

오감을 활짝 열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배움의 조건 3 - 위험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청결한 환경

    

4. 호기심과 증여의 마인드가 널 배우게 하리라

건물에 구현된 배움이 정신

배움의 조건 4 - 단정 짓지 않는 호기심으로 누벼라

교육정상화가 낳은 교육 파행

배움의 조건 5 - 교환의 마인드가 아닌 증여의 마인드로      


5. 우치다 타츠루에게 듣는 육아와 학교의 역할

부모에겐 자녀를 놔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식의 취향을 존중할 때 서로의 관계가 원활해진다

학교에선 변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

학교와 교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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