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겨울 민들레 1박2일 모임 1 (15.01.23~24)
열 명의 인원이 어화둥님 집에 모였다. 친숙한 어화둥님, 별나들이님, 제비꽃님, 세 가지 손님, 안녕님과 처음 뵙는 풍경님, 앵두님, 석혜영님, 온자님까지 둘러앉았다. 거기에 집주인인 영민이(어화둥님 둘째 아들)를 포함해 아이들까지 함께 모이니, 이건 70년대에 텔레비전이 마을에 한 대만 있던 시절에 남녀노소할 것 없이 함께 모여 ‘전설의 고향’을 보는 것만 같은 화기애애한 느낌이 들더라.
‘민들레 읽기’ 모임에 참여하게 된 건 순전히 단재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어서다. 단재학교에선 격월마다 발행하는 『민들레』 잡지를 구독하며, 제도권 학교에 매몰된 교육이 아닌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에 대한 정보를 얻고, 간혹 수요일에 하는 ‘읽기 모임’에 참여하여 학부모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그런 인연으로 비고츠키의 새로운 면모(교육학이 왜곡한 비고츠키의 진면목)를 알려주던 박동섭 교수를 알게 됐고, ‘반교육적인 교육담론’을 얘기하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도 알게 됐으니, 역시 ‘생의 길섶에는 무수한 우연들이 숨겨져 있는 법. (...) 마음이 통하면 천 리도 지척이라고, 보이지 않는 인연의 선들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광대한 시공간도 단숨에 주파할 수 있다는 것.’라는 고미숙씨의 말이 허튼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상반기엔 수요일마다 읽기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학교 수업시간이라 원칙적으론 다른 모임엔 참석할 수 없지만, 수업만큼이나 공부를 중시하는 곳이다 보니 가능했다. 그때 대표교사였던 준규쌤은 “읽기모임에 참석하여 이론으로서의 교육학과 현실로서의 교육을 매치시키는 기회를 만들어 보라”고 주문했었다.
지금껏 대학에서 배운 교육학은 정형화되어 있고,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점차 현실과 괴리되었다. 단지 임용시험을 봐야 했기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고 또 외워야만 하는 과목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론은 늘 현실을 압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엔 이론이란 틀에 맞춰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강박증까지 생기더라.
하지만 장자는 하나의 틀에 모든 것을 우겨넣는 태도를 통렬히 비판했다.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더라도 학의 다리처럼 늘려주면 근심스러워지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더라도 오리 다리처럼 잘라주면 슬퍼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긴 것을 잘라선 안 되며, 본래 짧은 것을 늘여선 안 된다. 그런다고 근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인의가 사람의 본성일리 없다. 그러니 저 인한 사람들은 얼마나 근심이 많을 것인가.
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無所去憂 意仁義其非人情乎 彼仁人何其多憂也 ―『莊子』「騈拇」
하나의 이론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는 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걸 절대적으로 생각하여 그 틀에 모든 것을 짜깁기하게 된다. 현실을 보지만 이론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우겨넣으려고만 한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에 못 미치는 다리는 짧다고 여겨서 덧붙여 학 다리로 만들려 하고, 오리의 다리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다리를 길다고 여겨서 잘라내 오리 다리로 만들려 한다.
그처럼 교육을 이론으로만 배운 사람은 현실의 수많은 변칙과 학생들의 다양한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틀로 자꾸 고치려 한다. 아마도 준규쌤은 이론이 현실을 압도하여 벌어질 상황들이 우려스러웠나 보다. 그래서 ‘민들레 읽기 모임’에 나가 내공이 센 인생의 선배들, 다양한 고민을 한 삶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며 현실로 현실을 보고, 현실로 교육을 갈무리하길 바랐던 걸 거다.
그런 이유로 참여한 민들레 읽기 모임에선 이론을 깔아뭉갤 정도의 다양한 말들과 교육학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교육의 장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현장에서 부딪히다 보니 어느덧 교사생활에 차츰 익숙해져 갔고, 이론의 묵은 때를 벗게 되었다. 하지만 민들레 읽기 모임에 참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차츰 학교활동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모임에 나갈 수는 없었고, 그에 따라 읽기 모임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초임교사는 어느덧 4년 차 교사가 되었다. 아무 것도 몰라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모든 것을 궁금해 하던 교사에서 어느덧 모든 것이 익숙해져 더 이상 아무 것도 관심을 두지 않는 교사가 되었다.
그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호랑이 기운’만큼이나 새로운 기운을 듬뿍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들이었다. 보통 이럴 땐 여행을 떠나거나,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혼자 칩거하며 지금까지의 생활을 정리해보곤 했다. 그 때 내 눈에 띈 것은 ‘민들레 1박 2일 읽기 모임 공지’였다. 간절히 원하면 찾아오고 만날 때가 되면 다시 만난다는 말처럼, 어느덧 기억의 저편으로 멀리 사라진 ‘민들레’란 이름이 그렇게 다가왔다. 예전 같으면 그냥 읽고 넘겨버렸을 텐데, 이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고 싶다는 의사를 댓글을 통해 밝혔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말 오랜만에 민들레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언제 그렇게 어색했냐 싶게 금세 편안해졌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더라.
우리의 이야기는 8시가 조금 넘어서 시작되었다. 거실에 둘러 앉아 『민들레』 96호를 중심으로 각자 읽은 소감을 나누기 시작했다. 꽤나 밀도 높은 시간이었는데, 이야기만큼이나 재밌는 점은 어른들의 공간과 아이들의 공간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바로 그 옆에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자유분방하게 뛰어놀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어른들의 대화소리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합해지니, 절로 활기찬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보통 이런 모임의 경우 어른들이 있는 곳에 아이들이 껴 들어와선 안 된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단번에 엄마들은 자식에게 “여긴 들어와선 안 돼!”라고 화를 내며,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시끄럽게 할 때에도 “뛰어선 안 돼!”, “떠들어선 안 돼!”라고 “안~돼!”를 한껏 성을 낸다.
하지만 이곳은 떠들거나 뛰어놀아도 되는 한적한 시골이기 때문인지, 『민들레』를 통해 아이들의 자유분방함을 긍정할 수 있는 너그러움 때문인지, 이 날은 날카로운 꾸짖음이나 혼내는 광경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이 모습은 예전 시골마을의 넉넉함을 보는 것만 같아서 되게 인상 깊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새벽 4시가 넘도록 진행되었고, 아이들도 잠을 자지 않고(별나들이님 셋째 아들은 한 달째 감기를 앓고 있어서 아이들과 잘 놀지 못했다) 신나게 놀았다.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 날은 선물과도 같은 귀한 새벽이었던 것이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느라,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목차
1.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다시 만나도 반가운 사람들
『민들레』를 만나, 인연이 되다
이론이 아닌, 현실로 현실을 보라
변화의 순간에 다시 민들레를 만나다
‘아이들은 가라’에서 ‘아이들은 오라’로
변화를 꿈꾸되 현실이란 벽에 절망하다
변하고 싶거든 틀부터 바꾸라
안 하던 짓을 해야 하는 이유
안 하던 짓을 해야 삶의 지도가 바뀐다
어린이 여러분, 죽음은 나쁜 것이니 멀리하세요?
지혜가 살아 있는 옛 이야기를 맘껏 읽자
‘중2병’이란 단어가 그리는 청소년의 자화상
단어는 이해를 돕지만, 대상을 가두기도 한다
한계 짓는 게 무에 문제요
‘선을 긋는 자’라고 자신을 인정하기
호빵과 민들레 읽기 모임
삶이 지랄 맞을 때 민들레 모임에 나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