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겨울 민들레 1박2일 모임 4
단어는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안경이다. 하지만 그 안경은 색안경이어서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닌 왜곡된 세상을 보게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빨갛게 덧칠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안경을 낀 사람에겐 그렇게만 보이니, 어느 순간엔 ‘세상은 원래 빨갛다’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때 “세상은 노래”, “세상은 검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노발대발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단어의 힘에 짓눌려 ‘빨간 세상’만을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롤랑 바르트는 무지를 “지식이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계 짓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아래의 글을 통해 한계 짓는 것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엄청 좋아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공자가 “힘이 부족한 사람은 도중에 그만 두게 마련인데,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다.”고 말했다. 『논어』 「옹야」 10
冉求曰:“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論語』 「雍也」 10
염구는 공자의 제자인데, 공자의 가르침을 충분히 좋아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실천까지는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즉, 앎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승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염구의 말을 문맥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힘이 부족한 것’과 ‘선을 긋는 것’의 차이를 알려주며 타이르고 있다.
과연 ‘힘이 부족한 것’과 ‘선을 긋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논어』의 주해를 보도록 하자. 주해에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란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이고, 선을 긋는 사람이란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땅에 선을 그어 스스로 한정 짓는 것을 말한다(力不足者, 欲進而不能. 畫者, 能進而不欲. 謂之畫者, 如畫地以自限也.).”고 풀이하고 있다. 주해의 해석을 보니 더욱 명확해진다. 결국 의지의 유무에 따라 ‘힘의 부족’과 ‘선을 그음’의 차이가 생긴다. 『호모쿵푸스』라는 책에 쓰여 있는 늑대 잡이야말로 선을 긋는다는 게 뭔지 보여준다.
발트해 연안의 거대한 숲, 나무와 나무 사이로 붉은 장막들이 나부낀다. 몰이꾼들이 요란하게 나팔소리를 울리며 한 무리의 늑대를 붉은 장막 쪽으로 몰아붙인다. 빼곡히 늘어선 나무들과 울퉁불퉁한 바위. 급한 여울과 가시덤불 사이를 날렵하게 달리던 늑대들이 장막 앞에서 흠칫, 멈춰 선다. 울타리도 아니고 철조망도 아니고, 그저 펄럭이는 장막일 뿐인데. 대체 왜? 결코 넘을 수 없는 ‘금지의 선’이라 스스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몰이꾼들이 늑대들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호모쿵푸스』, 고미숙 저, 그린비출판사
선을 긋는다는 건, 어찌 보면 스스로의 관점에 갇혀서 어떠한 변화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은 충분한데도 의지가 없어서 한계에 갇혀 있고자 하는 것이다. 공자가 염구를 혼낼 수 있었던 이유도 이처럼 의지가 없는데도 능력을 핑계 삼아 현실에 머물려 했기 때문이다.
이 해석을 적용해 보면, 우리가 단어의 힘에 짓눌려 있는 것도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 의지가 없어서라고 보아야 맞다. 수많은 단어가 규정지은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내면화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선을 긋고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자연히 어떠한 변화도 없고 그 생각에 갇힌 채 모든 사람에게 그 생각을 강요한다.
이런 체념적인 삶에 대해 공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중도에 그만두게 될지라도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거나 아예 단어를 거부할 정도의 배짱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선을 긋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우리 스스로 ‘힘이 부족한 자’가 아닌 ‘선을 긋는 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단어가 규정지은 세상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원래 초저녁 잠이 많은 나이기에 갈수록 집중도는 떨어졌지만, 그 순간의 포근함 때문에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때였을까 갑자기 머릿속에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찬바람이 서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OO호빵 몹시도 그리웁구나~♬♪”
내 별명이 건빵이어서 그런지 호빵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광고송이 갑자기 떠오른 건 그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호빵이 먹고 싶어서였을까? 그런 게 아니라, 왠지 호빵의 따뜻한 이미지와 민들레 모임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기 때문인 거 같다.
호빵은 호빵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먹고 싶은 간식일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날씨가 추워져야만 겨우 생각나는 먹을거리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 되어야만 겨우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여름날의 호빵과 겨울날의 호빵은 같은 음식이면서도 그 느낌이나 정감은 확연히 다르다. 상황의 미묘함 속에 같은 것임에도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호빵처럼 ‘어떠한 상황에 몰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생각나는 관계’도 있다.
나의 삶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모든 상황이 잘 풀릴 때 좋은 관계는 ‘여름날의 호빵’처럼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Laugh, and the world laughs with you; weep, and you weep alone.). 「고독」, Ella Wheeler Wilcox”라는 시구는 『올드보이』란 영화를 통해 유명해졌다.
즐거움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감정이어서 함께 공유하려 하지만 그에 반해, 슬픔은 모두가 꺼려하는 감정이어서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이 잘 풀릴 때 곁에 사람이 많기는 쉽지만, 상황이 안 풀릴 때 곁에 사람이 있기는 쉽지 않다. 삶에 대한 갑갑증이 밀려올 때, 매일의 똑같은 일상에 신물이 날 때,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순간순간을 좀먹게 될 때, 그 누가 그런 나와 함께 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런 때에 감정의 기복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만나 이야기 나누고, 그 대화로 청량한 활기까지 얻게 되는 관계가 바로 ‘겨울날의 호빵’과 같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삶을 좀 비꼬아 본들 어쩌랴, 그리고 비관에 빠져 있은들 어쩌랴,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발분하는 게 한심해 보인들 어쩌랴, 그러한 내 모습을 공감해주고 함께 이야기 나눠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을.
민들레모임은 나에게 있어서 ‘겨울날의 호빵’과 같았다. 민들레 읽기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지도 몇 년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갑작스레 1박2일 모임에 나가고 싶었고, 나갈 수 있었던 데엔 그와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발이 오그라들 각오를 하고 이쯤에서 광고송을 개사하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아무쪼록 마지막까지 함께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찬바람이 서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민들레모임 몹시도 그리웁구나~♬♪”
목차
1.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다시 만나도 반가운 사람들
『민들레』를 만나, 인연이 되다
이론이 아닌, 현실로 현실을 보라
변화의 순간에 다시 민들레를 만나다
‘아이들은 가라’에서 ‘아이들은 오라’로
변화를 꿈꾸되 현실이란 벽에 절망하다
변하고 싶거든 틀부터 바꾸라
안 하던 짓을 해야 하는 이유
안 하던 짓을 해야 삶의 지도가 바뀐다
어린이 여러분, 죽음은 나쁜 것이니 멀리하세요?
지혜가 살아 있는 옛 이야기를 맘껏 읽자
‘중2병’이란 단어가 그리는 청소년의 자화상
단어는 이해를 돕지만, 대상을 가두기도 한다
한계 짓는 게 무에 문제요
‘선을 긋는 자’라고 자신을 인정하기
호빵과 민들레 읽기 모임
삶이 지랄 맞을 때 민들레 모임에 나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