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여름 민들레 1박2일 모임 2
민들레 1박2일 모임은 편안한 대화의 장이며, 먹을거리가 풍성한 파티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모임이 시작되기 전엔 함께 저녁을 먹으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웬만큼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싶으면 드디어 모임이 시작된다. 애초에 정형화된 틀이 없다 보니 상황에 맞춰 함께 모이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말을 하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때 우리는 가운데를 비우고 삥 둘러앉는다. 바로 이 가운데 자리가 모임의 하이라이트이자, 중요한 것들이 놓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엔 집안 곳곳에 숨어 있던 주전부리들이 놓이기 시작하고 맥주까지 놓이면, 모든 세팅이 완료된다. 어찌 보면 읽기모임이란 건 대외적인 명분일 뿐, 평상시에 잘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오랜만에 모여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실제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얘기가 시작되면 밤새도록 계속되는데, 이때 주전부리도 끊임없이 채워져 훌쭉해진 위와 창자에 활기를 안겨준다. 그러니 체력이 소모되어 몰려오던 잠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보면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모임에 대해 고미숙씨도 말을 한 적이 있다.
강의건 세미나건 토론회건 항상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친화력을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강의하는 사람도 힘들지만, 열심히 듣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가능한 한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지적 공명의 주파수는 더욱 상승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고미숙, 휴머니스트, 2004, pp 206
사람이 모이는 곳, 배움의 파토스가 일렁이는 곳, 만남이 무르익는 곳이라면 어느 곳 할 것 없이 먹을거리가 넘쳐나야 한다. 함께 먹고 마실 때 친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에너지까지 보충되어 경계심을 바짝 세우기보다 배려심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 서로에게 호감이 쌓이고 한 마디, 한 마디에 더욱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고미숙씨의 이 말에 충분히 동감했기에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스터디를 할 때에도 간식을 챙기려 무진장 애를 썼다. 돈 한 푼이 궁하던 시절이라 삭스핀, 송로버섯 같은 고급간식을 마련할 순 없었지만, 식빵이나 과일 등 간단한 간식을 챙겼다. 그랬더니 확실히 나눠먹는 즐거움과 함께, 공부해서 남 주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처럼 민들레 모임에도 먹을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민들레 모임의 팁을 주자면, 이야기에만 한 눈 팔지 말고 먹을 것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나게 먹고 마시며 즐기면 된다.
모두 다 앉았고 주전부리까지 세팅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모임이 시작된다. 성태숙 선생님이 쓴「유성처럼 찾아온 아이들」을 함께 읽었다. 지금까지는 책 내용 중 함께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말하고 그 얘기에 다양한 얘기를 덧붙이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날만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아무래도 100호가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었고 나처럼 아예 안 읽어온 사람도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방식을 바꾼 것이다.
성태숙 선생님은 지원금을 받으며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한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분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막상 자신이 아니어도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아이들(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도와주다보니, 막상 자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출중해서 모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오죽 좋으련만,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혼자서 맡을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으니, 그런 고민이 들 법했다.
이 내용에 대해 석혜영님은 최근에 자신이 좋아하지 않던 역사를 공부하고 있노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국가라는 것, 국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위적이며 허무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말은 곧 단순히 아이들의 국적을 나누어 ‘이 아이는 어느 나라 아이, 저 아이는 어느 나라 아이’라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 생각하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제비꽃님은 성 선생님의 고뇌에 공감한다고 말하며, 최근에 방과 후 교실을 열며 생긴 일련의 일들에 대해 얘기해줬다.
방과 후 교실을 열려면 당연히 공간부터 마련해야 한다. 이럴 때 가장 걸리는 건 공간 마련 비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공간은 쉽게 마련됐고 여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역 어르신들이 공간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더라는 것이다. 흔히 혐오시설(이런 단어 자체도 문제다)을 주민들이 반대하는 경우는 봤어도,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반대한다는 얘긴 처음 들어봤다. 저출산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아이를 낳아라’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현실부터 바꾸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한국사회는 언제부턴가 아이를 싫어하는 사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왜 어르신들은 방과 후 교실이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것일까? 여기엔 편견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방과 후 교실=한 부모 가정’이란 편견, ‘대안학교=문제학생’이란 편견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한 부모 가정, 문제학생=마을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존재’로 확장되며, 그 밑바닥엔 ‘집값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하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런 규정된 틀도 없는 어린 아이일 뿐인데도 그런 식의 딱지를 덕지덕지 붙여서 기피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어른들의 무의식적인 편견이 무섭기까지 하다.
편견은 생각을 할 수 없도록 한다. 생각하지 않으니 사회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면의 진실을 거부하게 한다. 어르신들이 반대하며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상처를 준 것처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은 나쁜 생각에서가 아니라, 생각없음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통찰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만큼 한국 사회는 편견에 쉽게 빠져 타인을 배척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만큼 ‘사람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사회’와는 더욱 더 멀어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떻게든 작은 차이라도 만들려 하며, 차이는 차별을 해야 하는 근거로 사용하니 말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방과 후 학교를 열려는 사람들도, 대안학교를 만들려는 사람들도 한 목소리로 “여기에 오는 아이들은 불량학생이거나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아니예요”라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평등을 지향한다. 그래서 공자도 “차별을 두지 않고 누구나 가르친다(有敎無類-「衛靈公」38)”라고 천명하며 교육의 기본을 지키려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교육은 선별하여 차별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있고, 아예 그런 인식을 그대로 받아 “(문제가 있든 없든 모두 다 교육대상자임에도) 여기엔 문제가 없는 아이들만 오는 곳이예요”라고 설득을 해야 하니 착잡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제비꽃님의 “노인들은 어린이들을 품어주고 안아주는 존재이지 않나요?”라는 말에서 그런 씁쓸함이 물씬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