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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Sep 29. 2016

아이여서 서글퍼요

2015 여름 민들레 1박2일 모임 3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 학교를 열려다, 주민들이 ‘방과후학교 입주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걸고 막아서는 바람에 설립이 지연됐다는 얘기는 엄청 충격적인 얘기였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극도로 부족한 현실이기에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공간을 마련하려 한 것임에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출산율이 저조하다, 고령화 사회로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등등의 암울한 이야기만 판치는데, 여기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기피하는 세상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세상에서 ‘아이 많이 낳아라’라고 백날 말한 들, 과연 누가 낳고 싶을까. 그렇기에 지금은 ‘아이여서 행복해요’라는 말보다 ‘아이여서 서글퍼요’라는 말이 더 맞다고 할 수 있다.                



▲ 행복지수가 높은 부탄의 학생들에게 볼 수 있는 표정을 우리 아이들에게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아이여서 행복하니?

     

성태숙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방과후학교 입주결사반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거기서 아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내용을 받아 ‘아이들은 모두 약자다’라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산업혁명기엔 많은 일손이 필요해짐에 따라 아동들도 고사리 손으로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해야만 했지만 아동의 인권이 중요시되며 지금은 사라졌으며, 아이들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기르는 세상이기에 예전보다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약자다’라는 발언은 전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푸념정도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아이들이 대우를 받다 못해 그 중 하나라도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예 바닥에 누워 떼란 떼는 다 쓰며 고집을 피워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으며, 부모들조차 자식의 기를 죽이기 싫다며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주고, 심지어는 좋은 친구(?)까지 만들어주는 시대이기에, 얼핏 보면 ‘365일이 어린이날’이라 해도 될 정도이니 말이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70년대 경제성장기에 잠을 쫓으러 약까지 먹어가며 고강도 노동을 해야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



최근에 두 번 놀랐던 적이 있다. 학교에 등교할 때 부모가 아이의 가방과 신발주머니까지 치렁치렁 메고 함께 가는 모습은 매우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여기까지야 뭐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함께 가던 부모가 교실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등교시간에 맞춰 교문 앞엔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입은 학생이 ‘학부모님은 여기까지만’이라 적혀진 팻말을 들고 서 있고, 바로 그 앞엔 부모들이 줄지어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게 첫 번째 놀랐던 광경이다. 



▲ 팻말을 든 학생과 그 앞에 서 있는 부모들. 자식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무심코 광고를 보다가 놀란 적이 있었다. 냉장고가 있음에도 김치냉장고가 나왔고, 주전자가 있음에도 전기포트가 나왔다. 역시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란 말이 맞다. 그처럼 세탁기도 점차 세분화되면서 ‘아가사랑세탁기’라는 것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어른 빨래와 아이 빨래가 함께 섞이면 비위생적이다’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런 제품까지 나왔고 어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한다. 이게 두 번째 놀랐던 광경이다. 

이런 얘기만 듣고 보면 이 세상만큼 아이들이 살기에 더 좋은 환경도 없을 것만 같고, 요즘처럼 아이들을 위하는 부모도 없을 것만 같다.                



▲ 한 장의 사진으로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담아냈다. 아가사랑세탁기는 아가에 대한 사랑이다?




아이여서 불행하지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어귀에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천방지축 놀다 보면, 엄마의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뛰어가곤 했다. 꼬마들이 몰려다닌다고, 동네 어귀에서 논다고, 일정 시간 동안 엄마의 시선에서 사라졌다고, 뭐라고 하거나 큰 일 난 것처럼 난리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당연한 우리네 풍경이었고, 어린이들이 어른의 세계를 벗어나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 그땐 마을 전체가 우리의 놀이터였다.



그런데 어느새 세상이 달라졌다. 이젠 더 이상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자체가 없다. 고작 놀 수 있는 공간이라 봐야 동네 한 구석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놀이터와 키즈카페가 전부다. 사회가 고도로 체계화될수록 아이들의 공간을 지워 어른들의 공간으로, 위험 요소가 상존하는 공간(위험요소가 있다는 건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말)을 다듬어 안전한 공간(정해진 패턴으로만 놀아야 함)으로 바꾸어 갔다. 이게 얼핏 보면 아이들을 위한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어른이 통제하기 쉽도록 바꾼 것에 불과하다. 놀이터는 안전을 중시하다 보니 아이들의 놀이본능을 잠재운 곳일 뿐이며, 키즈카페는 어른을 위한 공간에 아이들을 안전하게 가둬두기 위한 곳일 뿐이다. 그러니 편해문씨가 쓴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란 제목의 책이 무슨 의미인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니 ‘아이들을 위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이 약자인 시대’가 되었고 아이들의 놀이본능과 탐구본능은 갈수록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아이들에게 ‘맘껏 놀지 말기를’,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 말기를’, 즉 ‘아이답지 말기를’ 끊임없이 사회구조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 위험한 놀이터에서 역사적인 아이가 자라고, 정형화된 놀이터에선 영원한 아이가 자란다.




어른 아이가 되라고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회적인 환경이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더불어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아이들의 돌봄이 과하거나 부족하거나 하다는 데에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가정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애정을 느껴야 할 시기에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할 시기에 혼자 있게 한다. 그에 반해 경제력이 있는 가정은 오히려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아 부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하고 돌봄만으로 충분한 시기에 조기교육까지 시킨다. 



▲ 모두 잘 키우고 싶었고, 잘 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여서 서글픈 사회가 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논어』「선진」15장)’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과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같다’라는 말이 아니라, ‘과한 것은 미치지 못함만도 못하다’는 말이고 그건 ‘오히려 뭔가 미진하게 해주는 게 과하게 해주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왜 그러냐면 뭔가 부족하다 느끼는 아이는 그 부족함을 채우려 무언가 하려는 의지라도 있지만, 과하게 무엇이든 해본 아이는 어떤 욕망이 생기기도 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경험을 해봤기에 세상에 대한 궁금함도, 하고 싶다는 욕망도 사그라져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에서 나오는 ‘토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모의 높은 경제력으로 부모가 쳐둔 안전망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일찍부터 들끓는 감정과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거세당하여 부모의 욕망을 대변하는 ‘어른 아이’로 자라거나, 무기력한 아이로 남게 된다.               



▲ 토드에게 볼 수 있던 무표정을 지금의 아이들에게 자주 볼 수 있다.




니가 서글프면 나도 서글프단다 

    

사회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이들의 공간을 없애고, 어른 아이로 자라도록 억압하기에 ‘아이들은 약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점은 이런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초등 방과 후 교실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거란다. 학교별로 차이는 있지만 늦는 경우 8시까지 봐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아마 정부 관계자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 요즘,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공공서비스를 확대했다’고 자랑하듯 말할 것이다. 



▲  자랑스럽다고 해야 하려나, 교육부가 잘한다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이건 어찌 보면 ‘회사에서 야근을 많이 시키니, 아예 주6일제로 바꾸자’라거나, ‘퇴근시간을 10시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풍경님은 8시까지 근무하는 교사들의 과중한 업무부담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정책의 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왜 모든 부모들이 맞벌이를 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는가? 한 사람만 벌이를 해도 살 만하거나, 모든 업무가 5시에 끝나도 되는 사회여선 안 되는가?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저녁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가족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만큼 아이도 부모도 심리적인 안정을 찾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현실의 대책은 더욱 더 맞벌이를 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퇴근시간을 늦추어 아이의 육아를 힘들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아이들을 약자로 만드는 사회’는 부모에게든, 아이에게든 모두가 불행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 모임 시작 전에 개울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환한 미소로 자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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