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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02. 2016

아이들을 병자로 만드는 세상에서 외치다

2015 여름 민들레 1박2일 모임 4

놀이터가 안전을 중시하며 만들어지고, 키즈카페에서 노는 아이들이 늘어나며, 방과 후 돌봄교실이 8시까지 확대되는 세상은 ‘아이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아이를 약자로 만드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이를 위한 교육업체는 늘어만 가고, ‘아이의 건강은 태아 때 결정된다’느니,  ‘평생 영어실력 초등학교 때 결정된다’느니 말들이 많지만, 그런 세상에 내 아이를 맡기기엔 ‘어쩔 수 없다’는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김규항씨는 『B급 좌파』란 책에서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으로 내몰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하고,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한다.’라 말한 것이다. 

이래저래 이런 현실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자라면서 감정을 억압당하고 자신의 가치를 모두 거세당해야만 했던 아이들을 과연 어떻게 지켜주며, 잘 자라게 도와줄 수 있을까?       


▲ 이렇게 꽃같은 아이들을 어떻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를 약자로 만드는 세상을 모르는 새에 지탱하고 있다  

   

2012년 교사연수 때 부산까지 내려가 이왕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그 중 단연 ‘소통에 대한 정의’와 ‘교육에 대한 정의’가 쌈빡해서,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 그때 찍은 사진은 없지만, 이왕주 교수와의 대화는 재밌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Educ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인 educo라고 얘기해주며, ‘밖으로e + 끌어낸다duco’는 뜻이라고 설명해줬다. 지금까지 교육이란 외부에 완벽한 지식체계가 있고 그걸 안으로 집어넣는 거라 생각해왔다. 그러니 하나라도 더 암기하고, 한 문제라도 더 맞출 수 있으면 ‘제대로 교육 받았다’거나 ‘머리가 좋다’고 인정받았던 거다. 하지만 이왕주 교수의 이야긴 지금까지 당연시해왔던 교육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사람 자체가 이미 완벽한 상태로 태어났기에 외부의 것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그 완벽한 상이 발현되도록 도와주면 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 말은 공자가 창시한 원시유학을 불교철학,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다양한 철학적 상식을 받아들여 성리학으로 탄생시킨 주희朱熹(1130~1200)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사람은 빈 듯 신령한 듯 어둡지 않은 듯 모든 이치를 갖추고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모습(완벽함)을 선천적으로 받고 태어난다. 하지만 기질의 편벽됨에 구애받고, 욕심에 가려져 때에 따라 (선천적인 완벽성이) 사라져 보인다. 

그러나 타고난 밝음은 한 순간도 사그라진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부분을 인식하여 선천적인 부분을 밝혀서 처음의 완벽함을 회복해야 한다.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 -『大學』 1章, 朱子註  



▲ 제자백가와 불교가 장안을 휩쓸자, 주희는 유학으로 그런 흐름을 막으려 했다.


        

주희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상을 지녔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자라면서 욕심이나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 그런 상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난 원래 완벽한 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와 같은 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람을 보는 관점과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교육이란 직접적으로 이끌어가거나, 외부의 파편화된 지식을 우겨넣는 방식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의 가치를 믿고 그 가치를 회복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도록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서 현실에서의 교육은 외부에 완벽한 진리나 버젓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라도 더 채워 넣어줘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는 일점이라도 더 맞을 수 있도록 이른 시기에 교육이란 이름의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끝도 없이 ‘아이들을 약자로 만드는 세상’에 동조하거나 묵인하며, 그런 세상을 지탱하게 된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다른 관점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 우리의 이야기에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를 정도다.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성장할지아무도 모른다 

    

교육에 대한 다른 관점은 역시나 ‘채워주는 것’, ‘교사만이 가르치는 것’이란 관점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가르친다’는 관념은 어찌 보면 대상을 ‘무언가 부족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든 메워주기 위해, 지식으로 채워주고 인격을 닦아주려 애쓰게 된다. 그러니 당연히 강제성을 띠게 되며, 자꾸만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게 된다. 



▲ 어화둥님 집 근처에 있는 기숙학원.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의 정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위에서도 얘기했다시피 교육은 외부의 것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태어난 내부의 완벽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강제성을 띠어서도, 무언가 완성된 지식을 전해준다는 사명의식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런 고민이 아닌, 그저 자연스런 흐름 속에서 어떻게 타고난 완벽성이 드러나도록 도와줄 것인가가 고민의 지점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어화둥님은 재밌는 얘기를 해줬다. 어화둥님은 활발히 글도 쓰고 책 디자인도 하며, 작품도 여럿 남겼다. 그러니 민들레 모임을 위해 어화둥님 집에 가게 되면, 새롭게 만들어진 작품들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과연 어디서 그와 같은 창조적인 작업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일까?,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래서 전혀 몰랐는데, 글쎄 어화둥님은 어렸을 때 ‘난독증難讀症’이었다는 것이다. 학생시절엔 글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읽더라도 느릿느릿 어색하게 읽다보니,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비웃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과거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고, ‘에이~ 설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이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고 보니, 그와 같이 평생 갈 것 같던 난독증도 자연히 나아졌고, 지금은 아예 문자로 작품 활동을 하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 어화둥님이 만든 작품. 난독증과 작품 사이엔 교육의 본질이 숨어 있다.



            

예전에 태어난 게 다행이다  

   

이 얘긴 어화둥님이 아무렇지 않게,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 말이지만, 나에겐 깊은 깨달음을 주었고,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해줬다. 교사란 이름으로 특정시기(13세~19세)의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낙인을 찍고, 조급함에 부정적인 평가를 하며 옥죄었으니 말이다. 어화둥님처럼 어느 일정 시기가 지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사람일 텐데, 난 그 시기만을 보고 조급해하고, 답답해하며 눌러대기만 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단기간에 확연한 결과를 만들려 했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었고, 좀 더 어린 존재들에 대해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 13년도의 사진. 그땐 더욱 더 아이들을 옥죄며 냉정한 평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던 때였다.



아마 어화둥님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몰라도 어릴 때부터 심리상담소에 찾아다니며 ‘난독증’을 치료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스스로 ‘난 뭔가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했을 것이고, 그 시기를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가 아무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기기보다 더욱 부각시켜 ‘글을 못 읽는 사람’,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 한정짓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아이들이 이른 시기부터 상담소에 다니며 자신의 다양한 모습들을 병적 증세로 진단 받고, 약을 복용하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어화둥님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예전에 태어난 게 정말 다행이예요”라는 말로 끝맺었다. 이건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외친 “나 다시 돌아갈래~”의 새로운 버전의 말이지 않을까. 



▲ 어화둥님의 작품. 글과 친해지지 않던 사람이, 이젠 글과 가장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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