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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2. 2017

4.19혁명일에 여행을 시작하다

2009년 국토종단 2 -  4월 19일(일)

8시 50분에 전주에서 목포로 가는 차가 있는 줄 알고 그 시간에 맞춰 나갔는데 아뿔사~ 9시 26분 차였다.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한 게 아니라 개인 블로그 같은 곳에서 확인한 게 낭패였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기다리는 시간조차 즐겁기만 하더라. 이제야 나의 꿈에 한 발 다가가는 거니 말이다.                



▲ 이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하지만 오늘은 워밍업이기에 즐기면 된다.




초보 여행자의 자잘한 실수

     

기다리다가 차가 왔고 차에 타려고 배낭을 들 때였다. 배낭에 간식부터 지도, 그리고 여벌옷까지 넣다보니 꽉 차서 엄청 무거웠다. 그런 배낭을 조심해서 든 게 아니라 앞에 달린 끈을 쭉 잡아 당겨 들려 했으니,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 줄은 미싱 기계로 단단히 꿰매져 있어 튼튼해보였고, 실제로 아침에 배낭을 멜 때도 그 줄을 당겨서 맸는데도 버텨냈었다. 하지만 벌써 한계가 온 건지 이번에는 바로 뚝 끊어져 버리더라. 본격적인 여행도 하기 전에 이게 웬 낭패인지~~

그래서 버스에 앉자마자 발에 물집이 잡히면 터뜨리려 준비한 바늘과 실을 꺼내서 열심히 꿰맸다. 어떻게 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말이다. 아직 모든 게 낯설다보니 이런 실수도 다 한다. 초보 여행자의 비애가 느껴지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마냥 좋단다^^




늦춰진 여행과 첫 여행의 두려움

     

그건 그렇고 드디어 출발하는 것이지 않은가? 애초 계획은 3월 16일에 떠나는 거였다. 그런데 집이 이사 가는 문제가 겹쳐 4월 6일로, 다시 13일로, 또다시 18일로, 또 또 다시 19일로 미뤄진 것이다. 이사 갈 집을 리모델링하는데 그게 내 생각만큼 쉽게, 빨리 되지 않더라. 그런 우여곡절 끝에 큰 공사가 어제 다 끝났다. 어머니도 나의 여행을 말리고 싶으셨겠지만, 이미 여러 번 미뤄왔던 걸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말리지 않으셨다. 나도 19일엔 어떤 경우가 있어도 떠나기 위해 저번 일주일 내내 리모델링 공사에만 집중했으니 말이다. 어머니로서도 그 정상을 참작해서 어쩔 수 없으셨던 걸 테다. 

그래서 어젠 장어를 먹으며 환송식 아닌 환송식을 했다. 막상 미루고 미루어 오다가 진짜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쁨은 잠시 뿐이고 어찌나 두려움이 밀려오던지. 어떻게 잤는지도 모르게 두려움을 잔뜩 느끼면서 뒤척이다가 잠을 깼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니 당연했다. 이젠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내가 간절히 원했던 꿈을 어떻게 이루어낼지가 관건인 셈이다.               



▲ 어젯밤에 짐을 챙기며 두려움이 한껏 밀려왔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목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에게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는 문자를 보냈다. 아마도 막상 여행을 떠나게 되니 두려웠던 것이고 그걸 조금이나마 떨쳐 내기 위해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모두 다 밝고 활기찬 문자를 보내주더라. 그 중에서도 ‘인생은 어차피 혼자이고 누구도 터치하지 않는 자유로움 속을 거닐다 와’라는 문자가 마음 한 구석을 울렸다. 피아노 학원 원장선생님이 보내준 문자인데,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는 말이 와 닿았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혼자서 할 생각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같이 떠날 수 있는지 의견을 물어본 적도 없다. 왜였을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의 의지나 나의 가능성에 따라 무언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의지하고 그 사람의 생각에 맞춰서 살아왔을 뿐이다. 바로 그런 나를 벗어나고 싶었고 이번 여행을 그런 계기로 만들고 싶었다. 둘이 같이 떠나면 서로 의지하고 심심하지 않겠지만, 내가 과연 어떤 사람이고 나의 가능성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 채 여행은 끝날 것이다. 그럴 경우 난 여전히 숙제를 풀지 못한 찝찝한 기분으로 여행을 마치게 될 소산이 크다. 그러지 않기 위해 홀로 떠나야겠다고 맘을 먹은 것이다. 자유로움을 맘껏 느끼며 혼자서 거닐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켜보고 싶다.                



▲  유정 선배가 준 선물과 속지에 써준 글귀. 여행을 떠나는 나에겐 큰 힘이었다.




꿈만 같던 출발

     

여행을 축하라도 해주듯이 날씨는 정말 좋았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바람은 서늘해서 나들이를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목포터미널에 내리니 학과 후배가 기다리고 있더라. 오늘부터 도보여행이라고 후배에게 진즉부터 말해놓은 상황이었다. 이 녀석과는 복학하고 나서 공부할 때나, 임용을 볼 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목포를 출발지로 정한 데엔 이 녀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우니, 겸사겸사 사람도 만나고 출발의식도 하려는 속셈이었다. 원래대로 어제 왔으면 같이 놀아줄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좀 바쁘다고 하더라. 그 말이 섭섭하긴 했지만, 나도 ‘큰 일’을 코앞에 두고 있기에 그렇게 한가롭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작년에 다른 후배가 갑자기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장까지 태워다줬었다. 그때 고마웠는지 이번에 점심을 사면 좀 맘이 편해질 거라고 하더라. 그런 정감이 흐르는 게 정말 고마웠고 감사했다. 

밥을 먹으며 “여기선 어디 가볼만 한 데 있어?”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제주도였으면 알려줄 수 있는데, 자긴 목포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유달산과 평화광장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고, 다행히도 유달산에 가는 버스를 안다고 하더라. 밥을 다 먹고 우린 정류장까지 같이 걸었고 내가 버스에 올라타면서 후배와는 헤어져야 했다. 이제 정말 나의 길을 나만이 가야 한다. 두렵기도 하고, 살짝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내 머리보다 높게 솟은 배낭을 메고서 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다. 나 스스로도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고 창피하던지. 아직도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 배낭은 내 몸에 맞지 않고, 신발도 길이 덜 들어 어색하며, 도보여행에도 낯설어 꼭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다.                



▲ 이땐 다들 열심히 한문공부를 하던 때였다. 좋은 인연이 만든 좋은 풍경.




유달산의 천지신명님께 빌다

     

버스는 목포 시내를 달려 유달산 근처에 도착했다. 불현듯 2005년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목포에 오던 때가 생각나더라. 그 때 목포로 오던 길에 두 개의 터널을 지났었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엔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빠져나오고 나니 눈이 새하얗게 내리고 있지 뭔가. 순식간에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 장면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었나본데 오늘 다시 그 터널을 지나니 4년 전의 기분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더라. 이렇게 다시 경험하니 예전의 추억들이 가슴 아프게 한다. 지금의 새 기억으로 옛 기억들이 덧씌워지길 바랄 뿐이다. 아마 내가 유달산을 가고자 했던 이유도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버스를 타고 목포역에서 내려 한참을 헤매다 유달산 입구에 도착했다. 기억 상으론 몇 계단만 올라가면 정상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층계도 많았고 한 코스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코스가 있었다. 날씨는 덥지 사람은 많지 배낭은 ‘한질라’ 무겁지. 한마디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상까지 오르니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바닷바람은 평지에서 부는 바람보다 싸늘했는데 한껏 데워진 몸을 금세 싸늘하게 식혀줬다. 이것이야말로 해풍욕이다. 그리고 일기도 좋아서 목포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고됐지만 그럼에도 오르길 잘했다. 만약 올라가는 게 힘들어서 그만 뒀다면, 정말로 후회할 뻔 했다. 



▲ 드디어 내가 유달산에 왔다. 목포에 이렇게 오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쉬는 날답게 유달산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르는 길에 들리는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는 왠지 가락만큼이나 서글프게 느껴졌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반도에 여덟 항구(그 중 한 곳이 군산임)가 개항을 했는데 목포도 그 중 하나였다. 그 때부터 목포는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그 열매는 원주민들이 따먹을 순 없었다. ‘내선일체’라는 사상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만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상대적인 부, 그리고 착취와 가난, 그 속에 보란 듯이 펼쳐지는 역차별까지 이 땅에서 살아오던 민중들은 사는 것 자체가 아픔이었던 거다. 그 아픔이 이 노래에 구슬프게 담겨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상 난간에서 이번 여행이 이제 시작한다는 것과 아무쪼록 큰 사고 없이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천지신명님께 빌었다. 비록 격식을 차리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갸륵한 마음을 보시고 잘 들어주셨을 거라 믿는다.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봐주세요!”               



▲ 여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다. 근데 내일은 비가 온단다.




첫 도보여행의 본격적인 시작

     

거기서 한참이나 해풍욕을 즐기고 무작정 큰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유달산은 목포의 가장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목포의 북쪽까지 걷기로 했다. 어디에 찜질방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는 도중에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교회 오후 예배라도 참석해볼 요량으로 걸었다. 교회들도 눈에 띄지 않고 막상 찾아간 교회는 이미 예배가 끝난 상태(대부분 2시 예배였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냥 걸어야만 했다.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왜 갑자기 교회냐고? 다른 지방에선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목포 사람들의 목포 이야기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뭐 이것도 처음부터 맘먹은 게 아니라, 유달산에 오르고 나서 시간이 남다보니 하게 된 즉흥적인 발상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걷다보니 공원이 나왔고 거기서 잠시 쉬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어깨가 아프고 발바닥도 욱신거린다. 그래서 쉴 때 편하게 쉬자는 각오로 배낭도 내려놓고 신발도 벗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 간식으로 챙겨온 육포를 빼서 한 번 먹어봤다. 맛은 꽤 괜찮더라. 이렇게 조금 움직여도 배가 고픈데 제대로 걷기 시작하는 내일부터는 아주 죽을 맛이겠구나~ 할매, 할배들이 게이트볼을 치는 것을 보며 20분 정도 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쉬었다가 다시 걸으려 주섬주섬 챙기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다. 그 때 현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곳은 정했냐? 시골은 인심이 좋아서 말만 잘하면 마을 회관 같은 데서 재워주기도 한다”는 정보를 알려주더라. 그 문자를 받고 정말 넉살 좋게 부탁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아직 그럴만한 자신은 없었기에 찜질방을 찾아서 무작정 걸었다.                



▲ 목포역을 지나서 이 길로 쭉 올라간다. 아직은 재워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목포 평화광장의 인상과 지도책으로 느낀 소유욕

     

어느덧 터미널에 도착했고 좀 더 걸어 올라가니 찜질방이 있더라.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에 근처 분식집에서 밥만 먹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화광장에 가기 위해서다. 평화광장은 바닷가에 조성된 전망 좋은 산책 코스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해안 변의 숲 속 길을 거닐며 바다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를 했던 거다. 평화광장으로 가는 길의 목포는 엄청 번화하더라. 그런데 이게 웬걸? 이 광장은 해안에 그냥 아스팔트 도로만 쭉 깔려져 있던 것이었다. 내 생각과 확연히 다르다보니 어찌나 실망스럽던지. 

하지만 그런 실망도 잠시, 시원하게 몰아치는 파도와 차가운 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노라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의 참 이유일 텐데 난 평화광장에서 그걸 느꼈다. 



▲ 평화광장이라고 해서 뭔가 광활한 바다를 볼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진 않더라.



그 곳에서 지도책을 정리했다. 도로가 실린 지도였는데, 내가 가지 않는 곳도 있다 보니 꽤 두껍고 무겁더라. 그래서 가기로 한 곳의 지도만 떼어내 보관하고 나머지는 다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왠지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뭘까? 거기엔 ‘지금은 쓰지 않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거야’라는 소유욕이 숨어 있었다. 늘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를 위해 준비하다 보니, 사람들의 소유품은 한 없이 늘게 된다. 그리고 그건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게 되어 버린다. 만약 내가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정도의 소유는 문제가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가지고자 하는 마음은 그대로 나의 짐이 되어 내 어깨를 짓누르니 말이다. 그러니 아깝더라도, 미래를 모르더라도 버릴 땐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거다. 나머지 지도를 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온갖 갈등을 다했다. 버릴까, 말까? 조금 무거워도 그냥 가져갈까? 그러다 결국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넣었다. 막상 버리고 나니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졌고, 그만큼 배낭도 가벼워졌다. 

애써 버스를 타고 평화광장에 왔으니 어둠이 짙게 내린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바닷바람이 어찌나 옷깃을 파고들어 춥던지, 도무지 버틸 수가 없겠더라. 그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찜질방으로 왔다. 



▲ 지도를 준비하고, 그걸 뜯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연 듯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




4.19 혁명일에 시작한 도보여행 

    

오늘은 워밍업을 하듯 도보여행이 아닌 목포관광을 한 날이었다. 제대로 걷기 전에 배낭에 몸이 익숙해지도록, 발이 걷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내 자신이 여행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루의 여유를 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4.19다. 민중의 힘으로 장기집권에 눈이 먼 최고 통치자를 하차시킨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날이다. 억지로 이 날에 출발일을 맞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우연하게 맞았다. 나에게도 이번 여행은 큰 도전이자 혁명이다. 물론 그게 혁명이 되느냐, 괜한 짓이 되느냐는 차후에 판단할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면, 그건 나 자신에겐 혁명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나만의 혁명담’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목포행 버스비 10.000원 , 생수 1.000원, 된장찌개 3.000원, 찜질방 8.000원 / 총합 22.000원)



▲  4.19 혁명일에 떠난 나만의 여행. 이 또한 나에겐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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