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1 - 2월 28일(토)
도전! 난 여태껏 도전적인 사람이었나? 뭐 예전엔 그런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다지 도전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저 어떻게든 짜인 틀 안에서 만족하며 살기를 바라는 보수주의자의 모습이었다. 그 땐 그랬다. 특별히 무얼 해봐야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지금 이 안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인지만 생각했다. 겁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고 특별히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그런 것 같다. 내가 의식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이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고로 변화나 도전은 어떤 다른 삶에 대한 고민 끝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것. 과연 나에게 이런 ‘도전’ 의식을 일깨워 준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과정은 천천히 만들어져 온 듯하다. 의식의 붕괴는 우연성을 긍정하게 했고 새로운 환경에 내몰리게 되는 것 또한 좋아 보이게 했다. 그건 ‘클리나멘Clinamen’의 정신, 그건 도전이라는 것. 일상을 벗어나 삶 자체에 나를 맡기며 충실할 때 얼마나 세상은 이채로우며 역동적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증표였다. 그렇게 차츰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 그 첫째였을 것이다.
그 다음엔 스스로 규정지은 긴박감 때문이다. 지금은 학원 강사를 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 거기까지는 좋다. 내 몫도 하며 내 시간도 즐기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단지 거기에 멈춰 있다는 게 문제다. 지금 와서 3개월을 되돌아보면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물론 원장샘, 피아노 학원샘, 학원 아이들과의 인연이 있었고 돈을 벌기도 했지만 거기엔 결정적으로 내 자신이 빠져 있었다. 외부적인 것에 치여 나를 점차 잊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3개월이 지나고 든 생각은 ‘허무하다’는 거였다. 날 이렇게 매몰시켜 버릴 것인가?
그런 후회를 함과 동시에 ‘그래 바로 지금이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생각은 ‘지금․여기’를 긍정하는 마인드와 결부되어 있을 것이고 현실적인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우선 지금의 난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정해진 직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 갖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몸과 영혼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이야기다. 여러모로 따져 봐도 이때만큼 자유로운 시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걸리는 거라면 토요일에 하는 스터디인데, 그건 어떻게든 이야기하면 풀릴 문제다. 내년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정말 선생님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직장에 다닐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내년엔 학자금도 갚아야 하기에 이번처럼 손쉽게 학원을 그만 두거나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지금 여행을 떠나려 하는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습관적으로 ‘국토종단을 하고 싶어.’라고 되뇌던 내가 처음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니,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의식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선미는 여행기에 관한 책을 자주 나에게 보내줬었다. 최근에 보내준 『끌림』이란 책은 늘 환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여행이란 화두를 실행할 수 있는 불을 지폈다. 거기에 대고 기름을 부은 사람은 현아다. 언젠가 채팅을 하면서였을 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졌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실행에 옮겨 보라’는 식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투의 이야기로 나를 자극했고 그 때부터 난 여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모든 사건들은 연관이 없는 듯 우연히 일어나지만 그 때의 나의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그 사건들은 하나의 줄기로 꿰어지곤 한다(一以貫之). 결국 모든 건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대로 엮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저런 경로를 거쳐 생각을 정리한 결과, 학원 강사를 그만 두고 그렇게 소원하던 국토종단을 3월 중순의 어느 날 떠나기로 맘먹었다. 뭐 아직까지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한 시기이며 더 힘든 시기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모두에게 승낙을 받아내야 하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제어하며 이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이제부턴 피상적인 바람이 아니라 계획 단계다.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신다. 하지만 이미 효 이데올로기나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의 의견을 피력하여 이해시킬 것이다. 학원 선생님이나 윤교수님은 환영의 뜻을 전해오셨다. 두 분 다 진취적인 삶을 사셔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분들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혼자가 되어 보는 기회를 환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윤교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일장 훈계를 하실까, 아니면 선선히 받아들이실까? 교수님은 그냥 묵묵히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들이셨다. 타인이기에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나의 생각에 우려를 보낸 사람은 스터디에서 함께 공부하는 선배였다. 알고 있다, 가까스로 스터디가 정상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 멤버들이 영입되었고 새로운 내용으로 스터디가 진행된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내가 양해를 구한다며 잠시 빠지겠다고 했으니 좋아 보이진 않았겠지. 더욱이 선배의 생각은 많은 부분에서 나와 달랐다. 나중에도 그런 여행은 가능하다는 것과 공부할 때 맘껏 공부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은 현실회피이거나 치기稚氣로 보였을 것이다. 딱 거기에서 말은 끝났다. 더 이상 말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정확히 그 부분에서 갈라졌다. 분명히 지금이 공부할 때인 건 맞지만 그렇게 떠나는 게 공부의 일부가 아니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 또한 세상을 알아가는 공부이며 나를 알아가는 공부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라는 말도 맞는 말이지만 난 공부를 생활의 일부로 여기며 평생토록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전은 단순히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내 자신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굳이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내가 내 삶에 전적으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성년식과 같다고나 할까.
이로써 다시 한 고비를 넘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만나 그 안에서 접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통이니 말이다.
국토종단과 연이어 함께 추진되는 도전 과제가 또 있다. ‘지리산 등반(2013년에 단재학교 영화팀 아이들과 함께 이 과제는 실현됐다)’. 이건 내가 계획했던 일이 아니다. 나의 의식과 유정샘의 의식이 만나 합일점을 돌출해 낸 사건일 뿐이다. 어쨌든 경험이 전무한 나는 경험이 많으신 유정샘에게 의탁하기로 했다. 그게 차근차근 진행되어 피아노 샘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다. 등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피아노 샘이 가게 될 진 모르겠으나 아직까진 Yes!인 상태다. 유정샘이 피아노 식구들을 데려가려 하는 이유는 좀 다층적이다. 그 중 표면화된 이유는 유부녀와 함께 가는 나에게 미안해서란다. 그래서 피아노 강사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난 어떤 경우이든 상관없다. 꼭 한 번 올라가고 싶었던 천왕봉에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피아노 식구들과 같이 간다면 새로운 인연들이 엮일 거라는 기대까지 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건 나에게 도전이다. 누구에겐 이 일조차 일상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큰맘을 먹어야 가능한 도전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내가 얼마나 도전정신 없이 그저 안일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예이다.
나에게 ‘도전’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것이었으며 유토피아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감히 실행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쉬쉬했던 사이에 어느새 시간은 이리도 흘렀다. 지금껏 도전이라 해봐야 누군가 차려 놓은 일정에 같이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계획을 세우고 여정을 그리며 나의 발자취를 그 여정 안에 또박 또박 아로 새기고자 한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도전다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의 주체가 된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나의 발걸음들. 그래서 설레기도 하고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언제나 새로움에 맞설 때면 이 양가감정은 극대화되어 나를 흔든다. 그러면서도 도전이 즐거운 이유는 이 양가감정 때문이리라. 일상의 식상함에 펄펄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느끼게 해주니 말이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두려움은 어느새 현실이 될 것이고 난 어느새 그 현실 속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며 그 감격의 순간을 스케치할 것이다.
난 화려한 인생을 살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오늘 이 순간에 충실하며 치밀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생각이 진리일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내 삶에는 어떠한 신념들과 확신, 그리고 내 삶을 운영케 하는 철학이 함께 있길 바란다. 나를 나라고 한다면 거기엔 남과는 다른 색채와 삶의 양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바로 그런 이상을 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내 자신이 되길 희망해본다. 그 희망에 다가가기 위한 여정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