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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2. 2017

빗속 도보여행의 낭만

2009년 국토종단 3 -  4월 20일(월)

오늘과 내일, 많은 비가 온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도보여행을 시작하는 날에 많은 비가 온다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었다. 배낭과 신발도 아직 몸에 맞지 않았고 도보여행도 익숙하지 않은데다 비까지 맞으며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겁부터 났다. 보통 때였으면 하루 이틀 연기해서 날씨가 쾌청한 날에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 처음이기에 과하지 않게 가기로 했다.




비 오는 날의 도보여행을 준비하는 자세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아니더라도 한 달 동안 여행을 하는 이상 언젠가 비 내리는 날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기예보를 보며 날짜를 미룰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극한의 상황에서 여행을 해보면 도보여행의 참 맛도 알게 될 거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아무렇지 않게 해쳐나갈 수 있게 단련될 거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우의와 우산까지 꼼꼼히 챙겼다. 이젠 우의의 성능을 몸소 실험하며 나가기만 하면 된다. ^^

찜질방에서 자는 내내 뒤척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환경이 낯설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2007년에 떠났던 실학기행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자연스런 반응이리라. 새로운 환경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문제였을 뿐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관성을 의식으로 일시적으로 조절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인위적인 노력이 계속 될수록 더욱 빨리 지칠 것이고 이 여행 또한 즐겁기보단 힘겨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지 않은가. 어느 순간엔 이 모든 게 익숙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여행을 하는 중에 내 몸이 어떻게 적응해가고 마음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지켜봐야겠다.               



▲ 2007년에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과 떠난 실학기행도 도전이었다. 그에 비하면 국토종단은 더욱 넘사벽이다.




이 순간을 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6시30분에 일어났고 바로 샤워를 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오후에나 비가 올 거라 생각했기에 짐을 비닐로 싸진 않았다. 잔뜩 찌푸린 날에 걸을 생각을 하니,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어젠 어찌나 날씨가 좋았는지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은 구름이 껴서 시원한 바람까지 부니 어제에 비하면 훨씬 걷기 좋을 것이다.  

적어도 창문을 열어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기대를 하며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벌써부터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기나 한 것처럼 기분이 일순간에 나빠졌다. 물론 누구도 그런 기회를 뺏어간 적은 없으니, 스스로 기대하고 그만큼 실망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사람은 ‘지금ㆍ이 순간’이 아닌 미래를 살아가는 존재라 할 만하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 자체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여행을 하려는 목적인 ‘Carpe Diem(현재를 즐기라)’과도 동떨어진 삶의 태도다. 단번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런 삶을 바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임박해올 때마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려 노력하며 변해가는 것뿐일 테니 말이다.          


▲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현재를 살라는 가르침은 그저 가볍거나 낭만적인 얘기만은 아니다.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 속 여행의 즐거움

     

배낭에는 방수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입었다. 그래도 불안하니깐 우산까지 들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우산이 필요 없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우산을 펴고 있을 수도 없었고 그래봐야 비가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을 접어 배낭에 넣고 우의에 모자만 쓰고 걸었다. 

한비야씨가 위ㆍ아래 각각 한 벌로 된 우의를 입으면 즐거운 빗 속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코트 같은 우의를 입었다면 이렇게 많은 비가 올 땐 홀딱 젖어서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옷과 같이 상하의로 나누어진 우의를 입으니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런 날씨를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뚝뚝 떨어지는 비를 온 몸으로 맞고 세차게 부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맛보며 걷는 기분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그런 상쾌함을 느끼기까진 비가 들어오지 않을 거란 우의와 신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했고, 실제가 그래야만 했다. 처음 출발할 땐 ‘신발에 비가 들어오면 어쩌지?’, ‘옷이 다 젖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앞선 탓에 여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1시간가량 걷고 나서 확인해보니, 전혀 문제가 없더라.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거다. 그 때부턴 맘 편하게 빗 속 여행의 낭만을 누리며 걸을 수 있었다.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비는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고구마를 먹으며 감상해야 제 맛이다. 그만큼 직접 맞으며 느끼기보다 그저 멀찍이 비 오는 운치를 즐기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멀찍이 떨어져 보는 맛도 있지만, 새로운 맛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를 맞으며 그 속에서 즐기며 가는 것도 또 하나의 새로운 맛이다. 확실히 인생엔 여러 즐거움과 맛이 있는 거 같다. 단지 내가 느끼기 전엔 그런 맛이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겠지.                



▲ 상하의로 나누어진 우의를 입고 걸으니, 정말 빗속 여행을 할 맛이 나더라.




지도와 현실의 차이 

    

목포에서 나오는 길목에 터널이 있기에 그 곳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김밥 한 줄과 육포가 오늘 아침이다. 조촐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이런 여행에선 진수성찬이란 게 따로 없다. 걷다 보면 자연히 배가 고파오고 그러면 뭘 먹어도 다 맛있기 때문이다. 

그 길목을 따라 쭉 갔으면 바로 1번 국도를 타게 되는데 아래쪽에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보여서 그 곳으로 내려갔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번잡한 길을 피하려 그런 것이다. 그런데 거긴 막다른 길이었다. 그 곳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가 처음의 그 길목으로 다시 올라가니, 길이 명확하게 보이더라.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데 그 쪽엔 여러 길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헤맬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지도 보는 게 매우 서툴고 이런 여행이 처음이다 보니 허술하기 그지없다. 



▲ 지도에 이런 식으로 표시되어 있으니, 도무지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헤맸다.



지도상엔 그냥 반듯한 길로 표시되어 있지만 막상 걷는 길은 그렇지 않았다. 고개를 다섯 번이나 넘었나보다. 고개가 나와 ‘저 너머엔 평지가 있겠지’라는 기대를 하며 애써 넘었는데 웬 걸 또 다시 고개가 나오는 게 아닌가. 계속 되는 기대와 실망. 그걸 몇 번 더 반복해야 했다. 계속 같은 광경만 반복되는 이 느낌은 뭘까? ‘매트릭스’란 영화에선 ‘데자뷰deja vu’현상을 관찰하는 것은 매트릭스 프로그램의 오류를 본 것과 같다고 했었는데, 나도 이러다가 ‘네오(매트릭스 주인공)’가 되는 게 아닐까 장난스런 생각까지 들었다. 

중간 중간 버스정거장에서 쉬었다. 쉴 땐 좋았지만 막상 일어나 걸으려고 하면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바람이 우의를 뚫고 들어와 온 몸 마디마디를 쑤시게 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걸으면 생기가 가득 돌며, 열기로 가득 채워져 온갖 희망이 밀려왔다. ‘내가 좀 매력적인데’라는 몹쓸 생각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 국도 1번 길은 언덕길이 반복된다. 빗길에서 그렇게 반복되는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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