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벼라 빈곤]을 읽고
‘불안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위’에서 자신을 선택해주길 고대하며 선택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하게 되죠.
-조국&오연호, 오마이북, 『진보집권플랜』, 2010년, 90쪽.
애써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으면 주어진 환경에 나를 맞춰가며 살 수밖에 없다. 그게 편안한 삶이어서, 그 길밖에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누구든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도 아니면 상상할 수 없기에, 그도 아니면 남에게 뒤처지기 싫기에 그런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든 내가 발 딛고 선 사회가 한 치도 의심할 게 없는 현실이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짜인 틀에 맞춰 스펙을 올려 매력적(?)인 구매가치가 있는 인간 상품이 되어야 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사회’를 우린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무력함만을 탓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거나 구조 자체에 하거나 하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남 탓’ 정도로만 생각한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을 위해 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하는 사회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정의가 된 셈이다.
해마다 한문교육과에서 졸업하는 예비교사 수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공교육 한문교사의 채용인원은 매해 급감하고 있다. 실례로 2006년 임용인원은 70명 정도였으나, 2010년 임용인원은 19명이었다. 거의 1/4정도가 준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매해 교사가 되지 못하고 임용시험에 매진하는 인원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들은 합격한 사람을 선망의 시선으로 보며 ‘자신의 무능’을 탓하게 되어 있다. 애초에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엔 관심도 없고(은폐하고) 앉지 못한 이를 무능한 이로 낙인찍은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이 옳단 말인가? 이미 사회구조 자체가 심히 왜곡된 게 아닐까? 소수의 합격자를 위해 다수의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 게임이 공정하단 말인가? 그렇게 합격한 소수의 사람이 진정한 교사의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애초에 게임룰이 잘못된 거였다. 덩달아 그렇게 합격한 이는 희희낙락하며 거만하게 다닐 것이 아니라, 자기로 인해 떨어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자중해야 할 것이다. 혼자만의 승리란 애초에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구조 차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교육 교사에 대한 생각도 일정 부분 ‘정해진 틀’에서 의 생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 교사가 되려 하는가? ‘안정적이어서, 뭔가 보람 있는 일 같기에, 사회적 인식이 좋기에’와 같은 대답들이 일반적일 테다. 여기에 덧붙여 ‘나의 교육관을 펼쳐보고 싶기에’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더욱 금상첨화일 터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현장에서 한문교사는 영향력 뿐 아니라 열정도 잊은 지 오래다. 그저 시간을 때우듯 무언가를 하는 척만 할 뿐, 그곳에서 어떤 학생들과 만나 무엇을 하려하는지, 그리고 민감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던 건, 기숙학원에 다니며 동영상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는 예비교사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교사가 된다는 건 남보다 한 두 문제 더 맞아 합격하기 위한 것이 전부다. 비전도, 포부도 없이 성공하기 위한 맹목적인 질주만 있다. 그렇게 교사가 된 이에게서 우리의 아들, 딸이 배우기라도 할까봐 심히 걱정된다. 승자독식의 사회, 비전이 없는 맹목적인 공부, 지적 감흥이 없는 시체화된 학습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교사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그런 삶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부턴 기존의 길에서 벗어나려 한다. 나만을 탓하고 합격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맹목적으로 기존 노선만을 따라가는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제부턴 어느 정도 열린 맘으로, 어느 정도 사회를 보는 바른 눈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알고 있다, 애초에 나의 길이 없었다는 것을. 내가 이런 저런 상황에 맞게 걸어왔던 것이 내 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젠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에 맞춰 살 것이 아니라 당당히 나의 생각대로 나의 길을 만들며 살 것이다. 내가 걷는 그 길에서 향내가 배이도록 꿈꿔보고 실천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