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12
세 가지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땅콩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한 후에 음식점을 나왔다. 10시 24분에 들어가 11시 30분까지 있었으니, 정말 느긋이 먹은 셈이다.
음식을 먹더라도, 차를 마시더라도 이처럼 여유롭게 먹고 마시고 싶었다. 일상에 치여 살면 먹는 재미, 마시는 묘미, 그 시간을 즐기는 설렘을 모두 망각하게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순간엔 ‘내가 무얼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지?’라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나도 일상에 치여, 삶에 갇혀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내 자신이란 게 희미해져 갔고, 살아야 할 이유를 망각하게 됐다. 그렇게 희미해져 가는 나를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훌쩍 제주도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제주에 왔음에도 어제까지의 여행은 전혀 그러질 못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리면서 그저 목적지까지 어떻게 빨리 갈까만을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뭘 먹더라도 맛있게 먹질 못했고, 뭘 보더라도 제대로 감상하질 못했다. 이럴 때 보면 나야말로 여전히 목적 중심주의로, 결과 중심주의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보고 평가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생각엔 고집이 있고, 몸엔 관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온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그럼에도 이 날 점심은 실로 여행의 이유에 맞게 느긋하고 여유롭게 먹고 누릴 수 있었으니 나에겐 둘도 없는 최고의 순간이라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우도에서 성산으로 가는 배는 두 군데서 출발한다. 한 군데는 아까 전에 배를 타고 들어온 천진항으로 매시 30분마다 출발하며, 다른 데는 하우목동항으로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밥을 먹고 나왔을 때가 11시 30분 정도 되었기에 하우목동항에 가서 배를 타기로 했다. 점심을 먹은 음식점에서 더 가까운 항이라는 점이 다행처럼 느껴지더라. 하긴 여긴 섬이 크지 않아 두 항구의 거리는 고작 자전거를 타면 1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말이다.
우도에 들어올 때만해도 날씨가 서서히 풀려 구름 사이로 햇볕이 보이며 성산일출봉의 자태가 환히 드러났고 제주의 푸른 바닷물의 영롱한 빛깔이 훤히 드러났는데, 지금은 다시 구름이 잔뜩 끼며 어두워졌다. 비 예보는 없지만 금방이라도 배가 내려도 어색하지 않은 날씨가 되었고, 사위가 어두컴컴해지니 은근히 힘도 빠지더라.
그런 상황이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 불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생기는 불안이라기보다 내 안에 꾹꾹 눌러왔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누군가 국자를 휘휘 저어놓은 것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식의 감정의 동요나 억누름, 무의식과 같은 것은 심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다. 이런 통찰이 서양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양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더라. 아래 인용한 『순자』의 글을 보면 그 대략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이란 비유하면 대야에 담긴 물과 같다. 대야를 바로 두고 움직이지 않으면 탁한 앙금은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물은 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수염과 눈썹이나 미세한 얼굴의 주름까지도 비춰볼 수 있다. 그러나 살랑바람이라도 불면 탁한 앙금은 밑에서 움직이고 맑은 물은 위에서 뒤섞인다. 그러면 얼굴의 크나큰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비춰볼 수가 없다. 마음 또한 이와 같다.
故人心譬如槃水,正錯而勿動,則湛濁在下,而淸明在上,則足以見鬚眉而察理矣。微風過之,湛濁動乎下,淸明亂於上,則不可以得大形之正也。心亦如是矣,『荀子』「解蔽」
탁한 앙금은 억눌린 감정이며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 온갖 감정들이라 할 수 있고, 위에 떠오른 맑은 물은 감정이 안정되어 평온해 보이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언제든 이런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위의 글에도 나와 있다시피 살랑바람이라도 불면 누군가 감정을 흔들어 놓으면 억눌린 감정들이 끓어올라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재끼기 때문이다.
솔직히 배를 타고 제주로 나가고 있는 이 순간에 느껴지는 불안은 좀 의외이긴 했다. 불안해할 요소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잘 곳이야 나가서 구하면 되고, 달리다 생길 불상사라야 펑크가 나는 정도일 테고 그것에 대해선 만반의 준비를 해왔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왜 흐려진 날씨를 보며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온갖 불안에 휩싸여야 했던 걸까? 이런 감정이야말로 내가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감정일 것이고, 늘 억눌러왔던 감정일 것이다. 억눌린 건 언제 터져 나올지, 어떤 모양으로 터져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이번 여행을 하며 이런 감정들을 잘 알아채고 잘 감싸안아야 한다. 그 또한 나의 감정이고 또 하나의 모습이니 말이다.
성산포항에 도착했으니 이젠 목적지를 정해야 한다. 조금만 달릴 거면 김녕까지만 가면 되지만, 좀 더 욕심을 낼 거면 삼양동까지 갈 수도 있다. 물론 그러려면 그 근처에 머물 만한 모텔이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먼저 삼양동 근처의 모텔을 검색해보니 거기엔 숙소가 거의 없고 시내 외곽 부근부터 많더라. 이런 경우 고민의 여지는 없다. 어차피 내일이면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오늘 좀 더 많이 달린다고 해도 괜찮으니 말이다. 그래서 별 다른 고민 없이 시내 근처의 모텔을 예약했다.
지금 시간은 12시 20분 정도이고 지도상으론 여기서 제주 외곽까지 2시간 40분이면 달릴 수 있다고 나온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리 대비 자전거의 평균속도로 단순하게 계산한 것이기에 믿으면 안 된다. 사람은 일정한 속도로 달릴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맞바람까지 불고 있어 더욱 더 속도가 안 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은 아직도 많이 있으니 천천히 즐기며 달리다 보면 해가 저물기 전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달리고 있으니 저 멀리 매우 익숙한 모습이 보이더라. 그건 다름 아닌 어제 성산읍으로 달릴 때 마주쳤던 자전거를 타고 여행 중인 여학생 두 명이었다. 어제도 마주쳤을 때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운이 났던 것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또 마주치니 절로 힘이 나더라. 분명히 어제 앞질러 갔고 우도까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이분들도 성산 근처에서 잠을 자고 다른 곳을 들렸다가 출발했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랫말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 아마 그 순간에 “힘내어 열심히 달리세요”라고 말을 걸어도 됐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매우 어색할 것 같아 그냥 맘속으로 ‘힘내세요’라고 응원해주며 그분들을 앞질러 갔다.
시간이 꽤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말은 하지 않더라도 음료수라도 주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그걸 계기로 왜 한 겨울에 여행을 하는지, 무얼 하시는 분들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아쉬움만 남는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제주박물관이 보인다. 지금은 시간이 어중간할 때라 내일 오전에 제주박물관을 둘러본 후에 자전거를 반납하면 딱일 것 같았다. 그러나 박물관을 지나며 보니 개관시간이 9시에서 10시로 늦춰졌더라. 고작 한 시간 늦춰진 거지만 박물관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반납하고 공항까지 가면 시간이 빠듯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박물관은 보지 않기로 했다. 다음에 왔을 땐 꼭 들려봐야지.
숙소에 도착하니 4시 40분이나 되었더라. 지도에서 알려준 예상시간보다 1시간 40분이나 더 걸려 도착한 것이다. 그래도 엊그제 제주에서 출발하여 3일 만에 다시 제주에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고향에라도 온 듯 가벼워진다.
저녁은 동문시장에서 회와 먹을거리를 사서 먹기로 했다. 동문시장은 제주의 대표시장답게 이미 떠놓고 포장된 회들이 즐비했으며, 저쪽 구석엔 야시장 먹거리 장터가 펼쳐지고 있었다. 경주 중앙시장의 야시장처럼 이미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난 회와 김밥, 어묵, 튀김만을 사서 잽싸게 나왔다. 제주의 토속 소주는 ‘한라산’인데, 하얀 병에 담겨 소주의 빛깔이 더욱 영롱해 보여 구미를 당겼다.
오늘이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술도 한 모금씩 들어가니 이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는 근자감이 마구마구 든다. 그러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집에 일찍 가고 싶었는데, 이 순간만은 다시 올 수 없는 날이기에, 더욱이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이기에 아쉽게만 느껴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