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9
이중섭에 대해 그다지 관심은 없었지만, 이번 제주여행에 필수 코스로 넣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막상 이중섭미술관에 들어가 보니 그가 내게 다가와 인생담, 예술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소회 등을 맘껏 얘기해주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정현종 시인의 ‘사람이 온다는 건 /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처럼 그의 무수한 얘기들이 나를 흔들었다.
2011년에 사람여행을 하며 느꼈던 사실과 같이, 그 장소가 누군가와의 추억으로 채워지면 그 장소는 뭇 장소가 아닌 ‘그 장소’로 기억된다. 거기엔 우리가 함께 나눈 숨결과 이야기들이 섞여들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중섭과의 만남과 대화는 그 장소를 아주 각별한 장소로 남게 했고 내 속에 감춰진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울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순간이 사람이 선물이 되는 순간이다. 이따금 삶이 팍팍하다 느껴질 때면, 막막하다 느껴질 때면 이곳을 찾아 이 순간의 느낌을 되새겨봐야겠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나와 시간을 보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당연히 근처에 있는 정방폭포에 가야 했지만, 어제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대정읍에서 서귀포까지 늦은 시간에 달렸던 탓에 우선은 잘 곳이 있나 확인해봐야 했다. 그나마 서귀포에서 웬만큼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곳 중에 표선면이 큰 규모의 마을이었기에 그곳을 숙박앱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기엔 마땅히 잘 만한 곳이 없더라. 그래서 좀 더 욕심을 내어 성산읍 근처로 다시 검색하기 시작했다. 거기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있는 대표 관광지답게 숙박시설이 참으로 많더라. 그래서 아주 적당한 가격의 호텔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을 예약했다.
이로써 앞으로 4시간 30분 정도를 더 달려야 하고 중간에 점심밥까지 먹으면 시간은 더 늦어질 것이다. 정방폭포까지 들렸다가 가면 어제처럼 늦은 저녁까지 달려야 할 게 분명했고, 오늘은 저녁부터 비 예보까지 있기에 그곳은 다음에 가기로 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우선은 표선까지 가서 점심부터 먹고 보자.
그러고 보면 지금의 제주여행과 여태껏 떠났던 도보여행과의 차이는 확연하다. 물론 걷느냐, 자전거를 타느냐와 같은 이동수단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건 바로 스마트폰의 여부이고 그 여부에 따라 예측 가능한 길을 가느냐, 미지의 세계를 더듬듯 가느냐의 차이가 있다. 도보여행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난 여행이었다. 지도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 가면 큰 마을이 있는지 만을 알려준다. 그 외엔 모든 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니 모르는 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니 어떤 때는 잘 곳을 구하지 못해 9시가 넘도록 벌벌 떨어야 했고, 어떤 때는 생각보다 길이 멀어 무작정 손을 들어 히치하이킹을 해야만 했으며, 어떤 때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가까스로 잘 곳을 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다. 스마트폰은 미지의 세계를 기지의 세계로 바꿔주는 최첨단의 도구다. 지도를 검색하면 그곳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순식간에 알려준다.
이렇게 상황을 대조적으로 보면 지도를 가지고 떠난 여행보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 훨씬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이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의 본질엔 위배된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본질은 ‘익숙하고 반복되던 환경을 벗어나 불편하고 한 번도 마주쳐본 적이 없는 환경에 스며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려면 계획은 어그러져야 하고, 예측은 빗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과 어우러지게 되고 상상도 못한 상황 속에 휘말려들게 된다. 그럴 때 여태껏 ‘나는 ~~한 사람이야’라는 완고한 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나에게 ~~한 모습도 있구나’라는 생소함과 맞닥뜨린다. 정해져 있던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해가고 흘러가는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본질에 더욱 더 충실한 여행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미지의 세계를 더듬어 가는 여행이라 생각하고, 이번 여행은 그에 비하면 좀 더 편하게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 생각한다.
표선면까지 가는 길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오후가 되면서 구름이 가득 끼더니 더욱 흐려졌고 맞바람까지 불어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2시간 정도 걸릴 거리가 그래서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점심으론 뭐를 먹을까 하다가 어제 점심엔 중화요리를 먹었기에 오늘은 다른 걸 찾기로 했다.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해물요리(딱새우 된장찌개나 자리물회 같은 것)가 끌리긴 했는데 막상 마을에 들어섰음에도 눈에 보이는 음식점이 별로 없더라. 그때 해장국집이 보였는데 아침에도 해장국을 먹었기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배가 무척 고팠고 심하게 부는 바람에 시달려 무척 추웠기에 자전거를 대충 받쳐놓고 ‘아침엔 뭣도 몰라서 짜게 먹었으니 이번엔 보통 맛으로 먹어야겠다’라는 심정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한 테이블에 손님이 앉아 있는데 맥주를 마시고 있더라. 그 광경을 보니 갑자기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싶어졌다. 평상시엔 맥주를 그다지 마시진 않지만, 국토종단을 하며 맥주의 맛을 알았던 덕에 이런 식으로 여행할 때면 맥주가 땡긴다. 그래서 해장국 하나와 맥주 한 병을 시켰다. 다행히도 이곳 해장국은 빨간 국물의 해장국이 아니라, 하얀 국물의 해장국이더라. 그건 그만큼 자극적인 맛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식탁엔 다진 마늘이 있어 구미에 따라 넣어 먹으면 훨씬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침에 먹었던 맵고 짠 기운을 덜어내고자 마늘을 모두 다 넣어 먹었다. 아침에 먹었던 해장국과 이곳의 해장국이 같은 점은 고기와 함께 선지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선지와 양이 들어 있는 경우는 봤어도, 이처럼 선지와 고기만 들어 있는 해장국은 처음이었기에, 이게 제주식 해장국의 특징이려나 했다.
2011년의 제주 여행 때도, 2012년의 제주 여행 때도 성산읍으로 갈 때는 ‘제주올레길 3-B’ 코스로 달렸었다. 이 길은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의 비경을 한눈에 보며 달릴 수 있고 자전거도로까지 잘 되어 있으며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 여러모로 하이킹을 하기에 최적의 코스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이 코스로 달렸다.
2012년에 이 코스를 달릴 땐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비가 엄청 내렸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잘 달리는 반면에 승환이는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뒤에서 붙어서 함께 달리고 있었는데 하필 그곳에서 펑크가 나버린 것이다. 그 전날부터 승환이 자전거만 유독 펑크가 여러 번 났기에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앞바퀴에 펑크가 나서 내 앞바퀴와 교체한 후에 먼저 보내도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좀 더 느긋하게 펑크를 때워도 되니 말이다. 승환이를 먼저 보내고 마을 어르신에게 부탁을 하여 어찌어찌 펑크를 때웠고 부리나케 숙소까지 달려갔는데, 승환이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그 순간 쿵 내려앉았던 마음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래서 다시 나가 승환이를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니 승환이가 저 멀리서 오는 게 보였고 함께 만나 숙소로 들어왔다. 그런 추억이 있던 길을 6년 만에 나 혼자 달리는 거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고 바람도 더욱 세차게 분다. 비가 오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바빠지지만 이 코스의 경치는 여전히 기분 좋게 만든다. 그런데 그때 이번 자전거 여행 중 최초로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금방까지만 해도 힘들어 낑낑대고 있었는데 알지는 못하지만 함께 이 길을 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힘이 나더라.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만으로도 이럴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으로 성산읍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월에, 그것도 자전거로 여행을 하고 있다니. 과연 그 분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기에 지금 이곳을 달리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의 용기가 대단해서 절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더라. 공동의 경험을 하고 있기에 결코 남 같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각자 가는 길이 있기에 여행을 건강히 잘 마무리하길 바라며 앞질러 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불끈 솟아오르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스쳐만 가도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선물이 되던 또 하나의 순간이다.
역시나 바닷가라 맞바람도 장난 아니게 불어 자전거를 타는 힘이 2배로 들더라. 결국 5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기 전에 도착하여 정말 다행이다. 어찌 되었든 어제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호텔에 도착하여 쉴 수 있으니 기분이 좋다. 명색이 호텔이란 이름에 걸맞게 편의점이나 오락실과 같은 시설이 함께 붙어 있고 수영장도 있다. 그런데 각 방마다 시켜 먹을 수 있는 배달음식이 두 가지(피자와 치킨)로 정해져 있고, 한 방에 2마리까지만 가능하다고 제한되어 있으며, 냉장고엔 음료수는커녕 물조차 없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저녁으론 어제 남은 통닭을 먹고 편안하게 누워 가계부를 정리한 다음에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