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10
어제 오후에 성산읍으로 달릴 때 하늘이 잔뜩 흐려졌고 바람까지도 심상치 않게 불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며 달렸는데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
정말 푹 잔 느낌이다. 이곳은 그래도 호텔이란 이름에 걸맞게 깨끗하고 시설도 좋은 편이며,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많아 편안한 분위기다. 6시에 일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커튼을 젖히고 비가 오는지를 살폈다. 어제 발표된 일기예보엔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 비가 오는 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전히 비가 온다면 이곳 퇴실 시간인 11시까지 뒤비져 놀다가 나가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날씨를 확인한 건데, 다행히 하늘엔 구름만 껴 있을 뿐 비는 그쳤더라. 무작정 떠난 여행치고는 여러 상황들이 나의 여행을 돕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국토종단을 처음 시작할 때 목표 유달산에서 천지신명께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봐주세요!’라고 빌었는데, 그처럼 이번엔 굳이 제주의 만신께 빌진 않았지만 여러 만신들이 이처럼 도와주고 있었던 거다. 참 나란 녀석, 인복만 많은 줄 알았더니, 신복도 오사게 많다니까^^
그런데 그때 불현듯 ‘여기까지 왔는데 성산일출봉은 2011년에 올라갔으니, 이번엔 우도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제주여행 자체가 우발적으로, 충동적으로 시작되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날라 왔고, 그때의 기분에 따라 갑자기 자전거를 빌리게 되어 자전거 여행으로 확정되며 도무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분명 내 의지에 따라 일어난 상황이겠으나, 어떤 도도한 흐름에 맞춰 그저 흘러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달려가 보자라는 심정으로 마구 달리다 보니 이틀 사이에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 하루 만에 오게 됐으며, 지금은 어찌 어찌 성산읍까지 흘러오게 됐다. 이건 뭐 기분 내키는 대로 흘러왔더니 제주의 3/4 정도를 이틀 만에 달린 셈이다. 우연과 의욕이 스파크를 튀기며 빚어낸 결과물은 역시나 예상을 완전히 빚나가는 거였다. 이래서 내가 ‘즉흥적인 여행’,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이런 상황에서 매우 갑작스레 ‘우도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까지 스친 것이니, 과연 이 생각이 나를 또 어드메로 이끌어갈 것인가?
우도로 들어가는 배는 7시 30분부터 있으며 30분 단위로 배정되어 있더라. 그리고 작년 8월 1일부턴 개인 자가용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뭐 나야 자전거를 타고 왔으니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이륜차 및 화물차는 별도 문의바랍니다’라는 주의사항이 걸렸다. 자동차는 그러려니 했지만, 자전거까지 통제되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객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오늘 배가 운항하는지, 자전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오늘도 정상적으로 배가 운항하고 있으며, 자전거는 별도의 비용(왕복료 1.000원)만 내면 된다고 하더라.
‘닥공’이 전북현대의 모토지만, 나는 지금 ‘닥치고 여행’의 경지를 시전하고 있는 셈이다. 좋다, 이번 여행의 모토를 매우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니. 그런데 막상 전화통화를 하며 우도에 가봐야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맘은 무지 바빠지더라. 지금 시간은 8시 40분인데 이리저리 준비하고 부리나케 터미널로 달려가면 9시 30분 배를 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머리에 비누칠을 한 상태로 몸까지 한꺼번에 씻는 군대식 샤워의 신공을 발휘하여 후다닥 씻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까지 마쳤다. 그때 시간은 이미 9시 6분이었고, 다음지도로 확인해본 결과 호텔에서 터미널까진 20분 정도 걸리는 걸로 나와 있었다. 마치 기록 경신을 해야 하는 운동선수처럼 분초를 다투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힘껏 페달을 밟아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앞뒤 볼 것 없이 이럴 땐 젖 먹던 힘까지 써야만 한다. 그랬더니 터미널엔 무려 9시 16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분 거리를 10분 만에 주파한 셈이다. 역시 사람은 간혹 이처럼 초인적인 힘이 나올 때가 있다.
이른 아침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표를 끊고 있더라. 우도에 들어가려면 표를 끊기 전에 승선신고서를 써야 하고 배에 탈 때 신분증과 함께 승선신고서를 내야 한다. 카자흐스탄에 갈 때 이런 신고서를 썼던 적이 있기에 낯선 풍경은 아니었지만, 한국 사람이 한국의 섬에 들어가는데도 이런 걸 작성해야 한다니 좀 의외긴 했다. 아마도 범죄자나 자살자가 섬에 숨어들어 은둔할 수 있기에 이런 정책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표는 자전거 왕복료까지 포함해서 9.500원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이처럼 ‘닥여’는 여행을 하면서도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제주 속 우도여행까지 하게 될 거라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계획이 아닌 닥치는 상황에 따라 그때 드는 감정에 따라 가보는 것이기에, 매우 스펙터클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런 여행을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버티어온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왠지 이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몸을 맡기다 보면 그제야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자전거는 구석에 잘 묶어두고 객실로 올라갔다. 내 기분처럼 하늘도 서서히 개며 햇살이 서서히 비춰오더라. 제주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바로 객실로 들어가 앉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주의 바다를 건넌다는 게 신기했고, 제주의 바닷바람을 맘껏 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간에 기대어 배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배를 탔던 건 남이섬에 갈 때였다. 거긴 북한강 한 가운데 있는 섬이기에 이렇게까지 물살이 세지도 바람이 세차지도 않았는데, 여긴 바다답게 물살이 심하게 일렁여 배는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며, 날카로운 바람이 옷깃 속을 파고들더라. 하긴 1월에 하는 여행이니 이런 정도의 추위는 오히려 애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서서히 날씨가 풀리며 성산일출봉이 햇볕을 받아 자태를 환히 보여주고 있고 배를 호위하듯 갈매기들이 날아드니 내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
보통 여행을 떠나는 걸 ‘콧바람 쐰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경우에 정말 맞는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분다는 사실은 대부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러니 ‘피부로 바람을 느낀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그런데 왜 하필 ‘콧바람’이란 매우 신박한 표현을 썼을까? 그건 아무래도 촉감적인 느낌보다는 후각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피부로 느끼는 바람은 풍속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 장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후각으론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때의 감정에 따라 바람이 전혀 다르게 맡아진다. 그러니 콧바람을 쐴 때 여태껏 맡아본 적이 없는 바람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럴 때에야 ‘내가 일상의 쳇바퀴를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섰구나’하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고로 콧바람은 자주 쐬야 하고, 코로 바람의 다양한 내음을 맡아야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5분 정도 걸려 우도에 도착했다. 성산포항에서 볼 땐 금방이라도 닿을 듯이 그렇게 가까워 보이더니, 막상 배를 타고 와보니 그래도 거리가 꽤 있더라. 막상 자전거를 끌고 배에서 내리니 선착장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입도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해주고 있었다. 처음엔 ‘우도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의미로 마을 사람들이 환대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이 자가용을 놓고 왔기에 우도를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도록 스쿠터나 전기차를 대여하도록 호객행위를 하는 거였다. 나야 뭐, 자전거를 끌고 왔으니 그분들을 쌩하니 지나쳐 갔다. 그래도 이곳은 수시로 섬을 도는 버스가 수시로 운행되기에 이걸 타는 것도 괜찮다.
출발할 때만 해도 섬 한 바퀴를 모두 돌아볼 생각이었다. 우도는 처음 와봤으니 경치를 감상하며 도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달려보고 마음을 접었다. 생각보다 우도는 큰 편이어서 한 바퀴를 돌고 나면 기진맥진할 게 뻔했고, 그렇게 도는 건 제주를 한 바퀴 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약간 달려보니 맞바람이 불어 체력소모에 비해 자전거는 도통 나가질 않더라. 이런 상황인데도 굳이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막상 성산포항으로 갔을 땐 힘에 부쳐 오늘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욕심을 버리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조금 달리니 우도산호 해수욕장이 보이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에 분주하다. 나도 그 인파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 사이로 해가 비치니 제주의 푸르른 바다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어제 비가 내린 덕에 대기의 모든 먼지를 씻어내어 그 푸르름은 더욱 찬란해보였다. 이런 찬란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랴. 정말로 이곳에 이 순간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더라.
한참 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보며 감상에 젖어들고 있으려니, 서서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우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는지 찾아봤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내내 보니 ‘땅콩아이스크림’이라 씌어 있는 간판이 자주 보이더라. 땅콩아이스크림이라면 월드콘 위에 얹어 있는 땅콩이 떠오른다. 과연 그 맛과 무엇이 다른지 한 번 먹어봐야겠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음식점이 눈에 띄었다. 거긴 해물짬뽕과 한라산 볶음밥, 전복스테이크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곳인데, 매우 맘에 드는 점은 일인분도 주문이 가능하단다. 홀로 여행족이 가장 난감할 때가 그 지역의 음식을 먹고 싶은데 대부분의 음식점은 2인 이상만 주문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해장국이나 중화요리 같은 음식으로 때워야만 하는 거다. 그런데 여긴 그러지 않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뿐인가, 현금으로 결제할 경우엔 땅콩아이스크림까지 준다고 하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맘이 정해졌다면 그저 갈 뿐.
7분 정도 달리니 음식점에 도착했다. 10시 20분밖에 되지 않아 너무 이르지 않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벌써 한 팀이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더라. 그래서 나도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세 가지 음식을 모두 시키면 17.000원이지만, 2가지 음식을 시키면 12.000원이라고 알려준다. 가격 차이도 차이 때문이라도 잠시 망설이긴 했는데, 막상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리고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에 크게 “3가지 모두 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래 이럴 때나 보짱 있는 사람처럼, 통 큰 사람처럼 질러보고 누려보는 거다. 돈은 버는 것만큼이나 이렇게 잘 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니, 나의 패기 있는 주문에 절로 행복해진다. 과연 음식 맛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