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8
이중섭 미술관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선 이중섭의 연대기 및 주요 은지화 작품들, 그가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아내에게 주고 온 팔렛트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엔 그의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3층은 전망대로 제주의 남해를 시원하게 내다볼 수 있다.
그는 21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문화학원에 다니며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그 학교에 후배로 있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귀게 된다. 그 후 28살에 원산으로 입항하며 한국에 정착하게 되고, 30살이 되던 해에 그녀와 결혼하며 그녀에게 ‘이남덕’이란 한국식 이름을 지어준다. 그때는 1945년 5월로 해방되기 불과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전쟁의 혼란 속에 그는 아내와 두 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제주로 건너와 51년 1월부터 12월까지 단칸방에 머물게 된다. 네 식구가 함께 살았던 방은 몸을 누이면 서로의 체온이 곧바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매우 좁은 방이었다. 그의 은지화銀紙畵에 담겨진 뒤엉킴의 심상들은 바로 이런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내와 두 아들은 그 다음 해(52년)에 일본으로 가게 되고 이중섭은 한국에 남아 은지화를 착안하게 된다. 가족과 떨어지긴 싫었지만 한국의 상황이 너무나 어수선하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때라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생긴 처절한 외로움과 현실의 무력감을 작품을 만드는 일로 해소해야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중섭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던 때에 지인들의 도움으로 미도파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연 것이다. 하지만 은지에 그려진 그림이 춘화라는 오해를 받으며 그의 작품은 강제철거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요즘도 종종 예술작품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쟁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논쟁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작품을 철거하고 아무렇지 않게 낙인까지 찍었나 보다. 그만큼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일방적이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 사건으로 이중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마음의 병을 얻게 되어 시름시름 앓게 된다.
그러다 결국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41살의 나이로 극도의 고립감과 절망감 속에 사랑하는 가족은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가 죽기 바로 전 해에 쓴 편지의 상단부엔 ‘길 떠나는 가족’이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하단부엔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라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중섭의 일대기를 알고 이 편지를 읽으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며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약해져 가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과 함께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살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1층엔 이중섭과 남덕이 가슴 절절하게 나눈 사랑의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기러기 가족 같은 느낌인데 기러기 가족과 다른 점은 그들이야 자신들이 원해서 뿔뿔이 흩어진 반면,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해서 어느 편지 하나 마음을 울리지 않는 게 없었다. 저토록 그리워하고 저토록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절로 와 닿는다.
그들의 그런 절절함이 나에게도 울림이 됐던 걸까?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고, 그렇게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요 근래 맘껏 울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억지로 눈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이 기회를 빌려 맘껏 울어재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뭔가 꽉 막힌 게 뚫릴 것만 같은 시원함이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그러질 못했다. 그 순간 눈물을 꾹 참으며 ‘여긴 사람이 많잖아. 미술관을 나가서 맘껏 울자’라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런데 문제는 눈물이 눈에 맺히던 순간이 지나고 나니 다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결론은 ‘눈물 나올 때 그게 어떤 상황이든 실컷 울고 보자’라는 거다.
난 울 줄 아는 그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게 억울해서든, 행복해서든, 그리움이든, 미움이든 할 것 없이 팔팔 끓는 감정이 있고 그게 눈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암은 「호곡장好哭場」이란 글에서 울음은 칠정七情이 절정에 다다르면 나오는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가슴 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과 같다고 할 수 있지.”라고 말하며 맘껏 울어재낄 수 있는 그 정신을 높게 샀다. 연암의 이 말에 나도 동감한다. 그러니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느니, ‘눈물이 많아선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은 집어치우고, 얼마든지 감정의 결에 따라 맘껏 울어재낄 수 있으면 그뿐이다.
도올 선생은 “대인은 반드시 유머가 있다(『맹자 사람의 길 下』 465쪽)”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을 본떠 “진정한 어른은 반드시 울 줄 안다”라고 말하고 싶다. 울음은 권위로 짓누르고 나이로 짓밟는 무표정한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 미술관에서 울컥 쏟아지려했던 눈물을 귀히 여기고 그때 맘껏 울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의 작품 중 춘화라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은지화는 꼭 봐야만 하는 작품이다.
우선 재료가 독특하다는 점이다. 담배를 감싸고 있던 은지를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그림을 그렸으니 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미술도구를 다 갖추고 창작활동을 할 수 없던 열악한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스케치를 할 수 있는 도화지도 없고, 색칠을 할 수 있는 물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선 웬만한 창작열이 있지 않다면 대부분 창작활동은 포기하고 다른 생업을 찾아 전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다. 그러니 늘 피던 담뱃갑에 있던 은지를 도화지 삼아 자신의 이상향을 새겨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마치 다산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500여권의 책을 저술한 상황과 쇠귀선생이 편지지나 변변한 필기도구조차 주지 않는 비협조적인 영어의 생활 중에 재생휴지에라도 빼곡히 글(이 귀중한 글이 모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이 되었다)을 써서 외부로 전했던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제반 여건이 미비하다 하여, 상황이 급박하다 하여 꺾을 수 없다. 세 사람 모두 상황은 여의치 않고 도구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뜻을 맘껏 펼쳤다는 부분에선 동일하다.
그 다음은 은지에 그려진 작품들이 매우 개성 넘친다는 점이다. 인체의 비율이나 근육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구 엉클어뜨렸다. 그래서 고개는 늘 뒤쪽으로 돌려져 있고 몸은 매우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입체파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달까. 그런 상황에서 몸과 몸은 서로 맞닿아 있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아마 이런 낯선 느낌 때문이었을까?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그러면서도 사람의 온기가 한가득한 느껴지기에 1950년대 전문가들은 이 작품들을 ‘춘화’라 주홍글씨를 새겼다. 하지만 그건 울음을 잃어버려 생각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이들의 감상평일 뿐이다. 그런 색안경 없이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포옹’, ‘가족’과 같은 작품명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사람의 온기를 맘껏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중섭에게 가족은 맘껏 껴안을 수 있고, 맘껏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따스한 존재였던 거다. 그래서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한 폭의 은지에 과감하게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것 역시 그가 사랑하는 아내 남덕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의 편지는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이라고 시작하거나 “나만의 소중한 감격, 나만의 아스파라가스군(남덕의 애칭, 아스파라가스는 발가락모양을 닮았기에 아내를 ‘발가락군’이란 애칭으로 부름)은 아고리(중섭의 애칭. ‘아고’는 턱의 일본어이니, 이 말을 풀면 ‘턱Lee’라는 뜻이 됨. 아내에겐 ‘발가락’이란 애칭을, 남편에겐 ‘턱’이란 애칭을 붙여준 것임)를 잊지나 않았는지요?”라고 시작한다. 자신의 절절한 감정을 아내에게 표현하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20살 초반부터 사귀었고 결혼한지도 10년이 넘어 소위 이젠 ‘부부가 아닌 남매’로 느껴질 법도 한데도, 이처럼 애틋하고 절절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부럽고 놀랍기까지 하다.
그의 편지 곳곳엔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다. 편지의 내용을 읽기 전에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유쾌하다. 그의 편지는 그림과 글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글은 그림의 의미를, 그림은 글의 의미를 보태주고 확장시켜 준다. 그러니 이중섭의 편지도 하나의 작품이라 보아도 될 정도다. 그 중에 백미는 남덕의 건강을 염려하며 “아스파라가스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가 화 낼 거요. (나) 화내면 무서워요.”라는 씌어 있는 편지다. 요즘에도 누군가 애칭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닭살이 돋는다며 눈빛 레이저를 사정없이 쏘아댈 텐데, 이들은 70년 전부터 애칭문화의 창달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사)한국애칭활성화협회에서 명예 회장직이라도 줘도 될 정도다.
더욱이 그 글 밑에 박명수가 “우씨”하며 하는 듯한 포즈로 이중섭이 화를 내는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요샛말로 ‘혼모노, 레알 진성’ 사랑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우씨’의 저작권이 박명수가 아닌 이중섭에게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요즘에 하도 TV 속 연예인들이 사랑꾼임을 과시하기 위해 거창하고 번드르르한 이벤트만 주구장창하여 ‘왜 이렇게 남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과시하려 하는 걸까?’라고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중섭의 편지는 소박하면서도 정감이 어리고, 투박하면서도 진실하기에 그들의 사랑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맞다, 사랑이란 감정은 저런 단순한 그림만으로도, 몇 줄 되지 않지만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게 진심이라면 이미 그걸로 충분하고 그것 자체로 서로에겐 최고의 선물이 된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나도 모처럼 만에 손편지를 쓰고 싶어지더라.
이중섭 미술관엔 이중섭이 살아 있었고, 나에게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간절함이란 무엇인지?’, ‘힘듦 속에서 꽃 피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하나하나 상세히 알려줬다. 이번 제주여행에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 많이 섭섭하고 아쉬울 뻔했다. 그런 마음으로 이중섭 미술관을 나오니 제주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지만, 가슴 속엔 훈풍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