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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Sep 03. 2016

정약용, 인생을 말하다

2007 대학생 실학순례 4

마재에 도착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통성명을 하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사람은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하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 그러니 멋쩍을지라도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친해지니 말이다. 그 덕에 나도 두 명의 친구가 한 순간에 생겼고 ‘어색한 사람들과 어떻게 3박4일 동안 지내지’라는 우려는 말끔히 사라졌다.                



▲ 다산유적지에 가서 다산을 만나다.




마재엔 다산 인생의 시작과 끝이 담겨있다 

    

마재는 다산(1762~1836)이 나서 15년 동안 자란 곳이자, 12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1년간 머물다가 유배 후에 돌아와 18년을 살았던 곳이다. 마재에서만 34년을 산 것이니, 다산의 시작과 끝이 오로지 담겨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 다산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죽었다.



다산의 생애는 180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도 이전의 생애는 탕평책으로 정조의 비호를 받으며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던 때이다. 정조라고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수원화성은 다산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수원화성을 만들 때 사용한 거중기를 다산이 고안하여 발명한 것으로 성곽축조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했으며, 정조가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겸하여 화성행궁에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다리를 만들어 그 장엄한 광경이 한강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실제로 다산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마당에 기념탑과 함께 거중기가 떡하니 있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공직자 다산의 대표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 지금 보면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땐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그 덕에 수원화성은 단기간에 만들어졌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핍박이 닥쳐온다. 남인들은 탕평책으로 혜택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고졸 취업 늘어나’라는 기사의 제목처럼 극소수의 남인이 대우받았을 뿐 차별은 여전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단순히 차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기득권 세력인 노론 벽파의 심기를 매우 많이 거슬려서 언제고 제거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인세력의 절대적인 지지자인 정조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기에 태풍 전야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수원화성은 노론의 심기를 무척이나 건드렸다. 지금으로보면 수도 이전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러던 1800년에 정조는 의문의 죽음(정조의 죽음에 대해선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둥, 홧병에 의한 것이라는 둥 다양한 얘기들이 있지만, 지금의 세월호 사건에도 수많은 의문들이 따르듯 그 당시에도 백성들은 그 죽음에 수많은 의문들을 덧붙였다)을 당하게 되자, 노론은 절호의 기회라도 잡은 듯 남인들의 약점인 천주교 문제를 빌미삼아 마침내 피의 복수(신유박해辛酉迫害)를 감행한다. 



▲ 정조는 천주교는 사교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봐서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조 때부터 박해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여파로 남인세력은 완전히 쑥대밭이 됐고, 다산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조선 최초의 자발적 천주교 영세자이자,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1756~1801)과 셋째 형인 정약종(1760∼1801)은 마지막까지 배교를 하지 않아 사형을 당했고,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1758~1816,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흑산도의 수산물을 기록한 책이 있음)과 막내인 다산은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배교를 했기에 사형이 아닌 유배형을 당하게 된다. 

한참 잘 나가던 관료에서, 이젠 비빌 언덕조차 없는 역적으로 인생은 한 순간에 뒤바뀌었다. 이쯤 되면 영화 『타짜』에서 “나도 인생의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본 사람이야”라는 고니의 말이 다산의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이때 다산은 그런 울분을 다방면의 서적을 편찬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풀어낸다.               



▲  다산은 근엄하다. 그가 좀 더 친근한 어조로 말한다면, 아마도 고니처럼 감정 팍팍 담아서 표현하지 않았을까.




여유당그기 뭐꼬?   

  

1800년에 공직생활을 끝내고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는다. 정조가 승하하면서 대대적인 남인 핍박이 펼쳐질 것을 걱정하며 그런 심정을 당호에 담은 것이다. 이 당호야말로 그 당시 다산이 얼마나 심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앞날에 닥칠 우환을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그런 당호를 짓게 된 경위는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적혀 있으니, 지금부턴 그 내용을 살펴보며 그 때의 심정을 유추해보도록 하자.           



어려서부터 세상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의심할 줄을 몰랐고, 커서는 과거공부에만 빠져 돌아볼 줄을 몰랐으며, 30살이 되어서는 지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이 때문에 선을 좋아하여 싫어하지 않았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도 받았다. 아! 이것 또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나의 성품이니, 내가 또한 어찌 감히 운명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是故方幼眇時 嘗馳騖方外而不疑也 旣壯 陷於科擧而不顧也 旣立 深陳旣往之悔而不懼也 是故樂善無厭而負謗獨多 嗟呼 其亦命也 有性焉 余又何敢言命哉 

-丁若鏞, 「與猶堂記」



▲ 여유당에 걸려 있는 편액. 과연 이 당호는 어떻게 지어진 걸까?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지금까지 정신없이 살아오느라 놓쳤던 것들을 떠올리며 일생의 일 막을 정리하고 있었던가 보다. 계속 될 것만 같던 관료 생활이 끝나고 폭풍의 전야 속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 다산은 자신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 자신이 놓쳐온 것들(不疑, 不顧, 不懼)을 돌아봤고, 그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 박노해 시인이 말한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리지지 않는다 /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다(『건너 뛴 삶』)’이라는 시처럼, 과거의 질곡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아픔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운명이라기보다, 성품 때문이라고 한 부분이 눈에 띈다. 그건 선천적인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다기보다, 자기 성향의 문제이기에 삶의 태도가 바뀌면 바뀐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운명론자가 아닌 실존의 철학자인 다산의 면모를 볼 수 있다.                



▲ 다산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니, 의심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 비방이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여유당에 스민 다산의 마음

     

이런 생각 때문에 바로 다음의 문장에선 드디어 ‘여유당’이란 당호를 짓게 된 경위를 말하게 된다.            



노자의 말에 “신중하도다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것처럼, 경계하도다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이라고 하였으니, 이 두 말이야말로 나의 병을 고칠만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반적으로 겨울에 냇가를 건너는 사람은 한기가 뼈에 아리듯 하기에 심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몸에 이를까 걱정하기에 비록 심히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余觀老子之言曰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鄰 嗟乎之二語 非所以藥吾病乎 夫冬涉川者 寒螫切骨 非甚不得已 弗爲也 畏四鄰者 候察逼身 雖甚不得已 弗爲也 

-丁若鏞, 「與猶堂記」


          

우선 이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산이 노자를 읽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걸 인용까지 해놨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실제로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후금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고 난 후에 실질도 없는 북벌론北伐論(오랑캐인 청을 치자)을 외쳐댔고, 중원에서 사라진 중화사상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소아병적인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빠져 들었다. 그때부터 성리학은 교조화되어 주자의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치부되며 터부시되었고 『노자』와 『장자』와 같은 것들은 아예 읽어서도 안 되었다. 



▲ 북벌론은 명분 뿐이었다. 하지만 후대에도이어져 광복 이후엔 북진통일론으로 발전했다. 명분 뿐인 말들이 모든 것을 감춘다.



이런 흐름은 정조에게까지 이어져, 중국에서 넘어온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지금으로 치자면 수필이나, 여행기 같이 일상의 일들을 담은 글)을 써서는 안 되었으며, 정통적인 방식의 철리哲理를 고문체로 담아야 한다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애꿎은 희생양이 연암의 『열하일기』였는데, 그걸 함께 읽어보던 무리에서조차 불로 태우려 했으며, 정조는 연암을 불러 열하일기를 쓴 죄를 씻기 위해 반성문을 빼곡히 적도록 시키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개그도 이런 개그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산은 노자를 읽었고 그걸 인용까지 한 것이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 문체에 따라 군자의 풍모가 정해진다고 믿던 시절, 연암의 글은 천박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장이었다.



실제로 위의 글은 『노자』 15장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15장은 도를 행하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테면 “머뭇거리도다. 마치 겨울의 냇가를 건너듯 / 살피는도다.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 엄숙하도다. 마치 손님인 듯 / 풀어지도다. 마치 얼음이 풀리듯(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라는 식이다. 보통은 어떤 것들을 묘사할 때 직접적으로 묘사하게 마련인데, 이 글에선 직접적인 묘사는 불가능하다고 전제를 한 후에, 이와 같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산은 도를 행하는 사람의 경지를 표현한 이 글을 자신의 방식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할지어다’라는 식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정조란 방어막이 사라진 후에 얼마나 주변에 신경을 썼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 '조심하자'라는 당호를 지었지만, 채 1년도 못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마재에서 맛본 인생의 아이러니  

   

복원된 생가는 원래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다만, 뒤편 언덕에 다산과 숙부인의 묘지가 합장되어 있어서 여기가 다산의 생가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니, 그곳에 이르러서야 찐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 광경을 보면서 하피첩霞帔帖으로 과시했던 끈끈한 부부애의 완결판을 보는 듯했다. 양반이 첩을 두는 것이 당연시 되던 때였음에도, 죽는 날까지 첩을 두지 않았던 다산의 그 마음이 와 닿았다. 



▲ 그나마 부부의 합장된 묘를 볼 수 있으니 가슴이 울렁였다.



다산의 시호는 문신으로서 최고의 시호인 ‘문도공文度公’이다. 이 시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을 땐 천주교를 한 때 믿었다는 이유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다가 죽은 후에야 최고의 시호를 받은 것이니 말이다. 그마저도 다행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사후에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생존의 모욕과 멸시를 어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마재에서 만난 다산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렇기에 ‘잘 나간다고 방자하지 말고, 못 나간다고 서러워 마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다산의 서글픈 삶과는 반대로 한껏 친해진 우리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다음 장소인 수원화성으로 이동했다. 



▲ 아내가 시집 올 때 입은 치마를 유배지로 보내오자, 다산은 아들과 딸에게 글을 써서 다시 보내줬는데, 이게 하피첩으로 남아있다.





목차     


1. 돌아다니는 멍청이를 꿈꾸다

대학에서 ‘큰 배움’이 아닌, ‘작은 배움’만을 탐하다

작은 배움을 탐하다, 작은 틀에 갇히다

집에 있는 빠꼼이가 되길 원하다

집에 있는 빠꼼이가 아닌 돌아다니는 멍청이를 꿈꾸다     


2. 삶이 배반한 자리에 희망이 어리다

삶이 배반한 자리에 서다

삶이 배반한 자리에서 싹튼 ‘지금-여기’ 삶론

실패할지라도, 도전해보다

지금-여기를 축복하는 삶이 만든 기적

     

3. 모든 첫 만남은 어색하다

모르기에 떠나는 여행

‘아기가 처음 만난 세계’를 어른이 되어 다시 느끼다

어색하기에 금방 친해질 수 있다

마재에서 느낀 다산의 향기

    

4. 정약용인생을 말하다

마재엔 다산 인생의 시작과 끝이 담겨있다

여유당, 그기 뭐꼬?

여유당에 스민 다산의 마음

마재에서 맛본 인생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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