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의 큰 별이 지다
나에게 노회찬 의원은 외길 인생을 살아간,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신념을 잃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기고만장하지 않는 모습의 사내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노회찬 의원의 아버님은 이북 출신으로 부산에 자리를 잡고 산다.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조금씩 생활이 펴가자 아들에게 클래식을 틀어주며 “이런 것 정도는 들어둬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사람은 누구나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첼로를 배우게 된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2007년에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김어준씨가 노회찬씨를 인터뷰했을 때, 김어준씨는 “어떤 세상을 제시할 겁니까?”라고 물으니,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최근만 해도 모여고에서는 바이올린을 켜서 합주를 할 수 있는 학생에겐 실기시험을 보지도 않고 만 점을 줬던 눈살 찌푸리던 사례도 있었다. 그만큼 현재도 악기는 신분을 가르고, 문화자본을 가르는 증표로 여지없이 맹위를 떨치는 있는 시대에 2007년 당시 노회찬 의원의 이야기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엘리트 코스라 할 수 있는 경기고에 재수 끝에 들어갔고, 고려대에 들어간다. 경기고에선 아주 재밌는 일화가 있다. 그는 이종걸과 함께 10월 유신에 반대하며 반독재 투쟁을 하고 수업거부를 위해 교실문을 닫아걸기까지 했는데,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시 떡잎부터 달랐던 것일까, 아니면 어린 치기였던 걸까?
그 후의 삶의 여정은 광주민주화운동에 충격을 받은 그는 용접공 자격증을 따서 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이때부터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질구레하게 열거하지 않겠다. 그의 영웅담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가 남달랐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고민 속에 만만치 않은 삶 속에서 살아간 뭇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사람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은 일상의 반복을 살아내고 있다. 임용의 길로 다시 들어온 이상,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끊임없는 공부의 길이 행복임과 동시에 불행임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지금은 매서운 무더위와 열대야가 1주일 넘게 지속되고 있고 해도 5시면 떠오르기 때문에 4시 30분 정도면 절로 눈이 떠진다. 그러니 공부할 준비를 하고 점심까지 싸서 학교에 가면 7시면 도착하게 된다. 누가 보면 엄청 부지런한 줄,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줄 알겠지만, 날 이토록 성실한 인간으로 만든 건 8할이 폭염과 일찍 떠오르는 해라 할 수 있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를 뚫고 학교에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예전엔 아예 8시까지 임고반에 출근도장을 찍어야 하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와서 커피를 마시며 5층 중앙로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맛이 있었다. 그러면 지각하지 않으려 차를 타고 오거나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바쁜 여러 아이들의 발걸음을 제3자의 시각으로 여유작약하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건 마치 ‘강 건너 불구경’ 같은 느낌으로, 그들의 힘듦을 통해 나의 대조적인 여유를 만끽하는 악취미다.
해석용 노트를 빼고 공부를 하고 있다가, 자료를 찾아 겸 인터넷을 열었다. 그때 전혀 생각도 못했던, 아니 아직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마치 꿈같은, 마치 농담 같은 기사를 보고야 말았다. 다음 첫 페이지의 첫 줄을 장식하고 있던 기사다. 아주 짧지만 내 눈을 의심하느라, 철렁 내려앉은 내 마음을 쓸어안느라 직접 기사에 들어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기사 제목은 “경찰 ‘정의당 노회찬 의원 투신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막상 보았지만 전혀 믿기지 않았던 이런 상황, 결코 낯설지가 않다. 때론 인정하기 싫은 상황을 들을 때 이처럼 직접 봤지만, 직접 들었지만 ‘에이 설마~’하는 마음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2009년에도 갑작스럽게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얘기를 들은 2009년 5월 23일은 한달 동안 진행했던 국토종단의 마지막 날로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여 둘러보던 날이었다. 기쁨에 젖어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속초까지 가는 길에 그 소문을 들었는데, 그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은 다들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특유의 강단 있는 모습으로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현실이었고 이미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처럼 노회찬 의원의 투신자살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이번엔 정말로 믿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그는 지금껏 여러 고난에도 견뎌왔기에 이런 것쯤은 탈탈 털고 일어날 줄만 알았다.
나에게 노회찬 의원은 외길 인생을 살아간,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신념을 잃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기고만장하지 않는 모습의 사내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노회찬 의원의 아버님은 이북 출신으로 부산에 자리를 잡고 산다.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조금씩 생활이 펴가자 아들에게 클래식을 틀어주며 “이런 것 정도는 들어둬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사람은 누구나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첼로를 배우게 된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2007년에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김어준씨가 노회찬씨를 인터뷰했을 때, 김어준씨는 “어떤 세상을 제시할 겁니까?”라고 물으니,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최근만 해도 모여고에서는 바이올린을 켜서 합주를 할 수 있는 학생에겐 실기시험을 보지도 않고 만 점을 줬던 눈살 찌푸리던 사례도 있었다. 그만큼 현재도 악기는 신분을 가르고, 문화자본을 가르는 증표로 여지없이 맹위를 떨치는 있는 시대에 2007년 당시 노회찬 의원의 이야기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엘리트 코스라 할 수 있는 경기고에 재수 끝에 들어갔고, 고려대에 들어간다. 경기고에선 아주 재밌는 일화가 있다. 그는 이종걸과 함께 10월 유신에 반대하며 반독재 투쟁을 하고 수업거부를 위해 교실문을 닫아걸기까지 했는데,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시 떡잎부터 달랐던 것일까, 아니면 어린 치기였던 걸까?
그 후의 삶의 여정은 광주민주화운동에 충격을 받은 그는 용접공 자격증을 따서 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이때부터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질구레하게 열거하지 않겠다. 그의 영웅담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가 남달랐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고민 속에 만만치 않은 삶 속에서 살아간 뭇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사람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노회찬씨의 죽음에 이토록 마음이 아프고, 인정하기 싫었던 걸까? 난 노회찬씨와 일면식도 없다. 한 번 만나본 적도, 그리고 어떤 인연이 있었던 적도 없다. 그가 진보정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건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별 관심 없이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최근에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며 수요일을 기다린 적이 있을 정도로 ‘노회찬의 노르가즘’은 그를 매우 친근한 정치인으로 만들었고, 대단히 매력을 지녔지만,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엔 분연히 화를 내며 올곧은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그가 어떤 얘기를 할까 기대하며 듣기도 했다. 김어준은 그를 ‘언어술사’라고 부른다. 기지 넘치게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 촌철살인의, 그러면서도 쉽게 와 닿는 비유를 해주기 때문이다. 삼성 X파일을 공개할 당시에 삼성은 면죄부를 한 아름 안겨줘 놓고선 그걸 밝힌 자신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대자 ‘도둑이야 라고 소리쳤더니, 도둑은 안 잡고 소리친 사람만 소란스럽게 했다는 죄목으로 처벌한 사건’라고 했던 얘기나, 2014년 원세훈 원장에 대한 선거법 무죄 판결을 보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게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한 나라’라고 했던 것들이 그것이다.
정말 그의 죽음으로 분명해졌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민감성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오감을 발달시켜야 한다 등의 말을 했다. 맞다고 본다. 공감할 수 있고 그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고 하나하나 해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 ‘너 하나만 잘 하면 돼’, ‘다른 건 둘러보지도 마’라고 마라는 순간 교육은 자멸의 길로 나가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공감이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가 손해를 보고 더 힘들게만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다. 약자에게 맘을 주고, 소수자들에게 연대를 외치며, 교육의 가능성은 ‘활짝 피어나지 않은 꽃들이 활짝 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하는 것을 괜한 마당발 정도나 이상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노회찬씨가 정치자금법에 연루되어 죽어야만 했다면, 아마 이런 잣대라면 정치인들의 대부분이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웃긴 점은 언제나 완벽하게 더러운 사람들은 더러움을 자신의 능력인 양 자랑하며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만 그걸 부끄러워 죽는다는 사실이다. 윤동주 시인이 말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란 잣대는 왜 늘 깨끗하게 살아왔고 공감하며 살아가려 한 사람에게만 유효하고 무거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