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13
어제 저녁에 동문시장에서 회와 김밥, 튀김, 순대, 어묵탕을 사와서 한라산 소주와 함께 먹으며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6년 만에 찾아온 제주지만, 3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일주를 하고 나니 늘 있었던 곳인 양 편하게만 느껴지더라. 이래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나보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사무치게 외로워진다.
살다보면 사무치게 외로운 날이 있다. 가족도 날 달래주지 못하고, 책 읽거나 영화 보기조차 귀찮은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날이면 나는 친구를 생각한다.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까? 그러나 이내 그만두고 만다.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한 공허감을 그냥 두기로 한다, 비어 있는 채로. 얼마간 비어 있는 채로 두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빈 공간을 간직하고 견디는 일이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좋은 친구는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 공간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지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승수, 『거문고 줄 꽂아놓고』, 돌베개, 2006
이렇게 외로움이 사무쳐올 때면 나는 하염없이 전화기를 쳐다보며 전화할 누군가를 찾는다. 나의 외로움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나의 묵은 감정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윗글의 저자는 ‘좋은 친구는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지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 했지만, 난 빈 공간을 채워줄 사람을 찾고 또 찾아다녔다. 그러니 나로 인해 그 사람도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인해 나 또한 공허해지길 반복했던 거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얼마나 빈 공간을 간직하고, 그걸 견뎌내질 못했는지를.
원래 이 여행은 4박 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불현듯 제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비행기표를 예매할 때만 해도 ‘오랜만에 가는 거니 하루라도 더 있다가 오자’라는 마음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까지 두 번의 제주여행이 3박4일 동안 하는 여행이었기에 그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고 모처럼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기에 제대로 누리고 오자는 오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 첫 날 뜻하지 않게 늘 하던 방식대로 자전거 여행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전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 게 문제였다. 상황에 휩쓸려 미친 듯이 달려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단번에 오게 되면서 지칠 대로 지쳤고, 숙소를 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네 번 숙박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님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생각을 바꾸게 됐다. 일요일에 돌아가기로 예약한 비행기를 급하게 취소하고 토요일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다시 예매했던 것이다.
이 순간에 생각해보면 ‘왜 그리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 안달복달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내가 떠난 여행은 줄곧 이랬던 거 같다. 막상 일상 속에 갇혀 있을 땐 어떻게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 몸을 비비꼬지만, 막상 떠나고 나선 금세 질려버려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니 말이다.
그건 국토종단 1년을 기념하여 떠난 벌교여행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몸이 근질근질했기에 『태백산맥』이란 소설의 자취를 따라 벌교로 떠난 거지만, 막상 벌교에 도착하여 몇 군데 둘러보고 ‘아리랑문학관’을 잠시 살펴보니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더라. 천천히 그 순간을 음미해도 되고, 시간도 넉넉했음에도 그러질 못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어떤 순간들에 흠뻑 빠져들지 못하는 나의 지랄 같은 심보 탓이라 할 수 있다. 때론 『끌림』의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처럼 몸을 맡겨 흐를 수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떠난 곳에 달라붙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어 했고, 되돌아온 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떠나고 싶어 했다. 늘 이도저도 아닌 채로 불안해하고 불만족스러워하고 도망만 치려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과연 언제쯤 나는 그 상황에 맡겨 흐를 수 있을까?
아침으론 어제 먹다 남은 것들로 간단하게 먹고 마지막 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제주박물관의 개관시간이 1시간 늦춰졌기에 그곳엔 갈 수는 없었고, 여기서 가볍게 둘러볼 수 있는 김만덕기념관에 가기로 했다. 김만덕 기념관은 제주항 부근에 있기에 자전거를 타고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긴 김만덕이 활동하던 당시의 제주는 지금처럼 번화한 곳은 아니었다. 제주항 부근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김만덕은 이곳에 객주를 열어 장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김만덕(1739~1812) 상과 그 앞에 나란히 쌓아올려 진열된 ‘김만덕 사랑의 나눔쌀’이란 포대자루, 그리고 그 뒤편으론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지은 「탐라로 돌아가는 만덕을 보내며(送萬德還耽羅)」라는 시가 쓰인 유리병풍이 둘러 있더라. 입구에 마련된 이 전시물만 보아도 김만덕에 대한 중요 정보를 얻을 수가 있고 이 기념관의 방향성을 알 수가 있다.
안내데스크에 걸어가니 “여기는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아요. 3층부터 둘러본 후에 내려오시면 되니, 왼쪽 부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세요”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이중섭미술관은 이곳에 비하면 좀 더 아담한 규모의 미술관이었는데 그곳에서 가슴 뭉클한 느낌을 잔뜩 받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야’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곳은 그곳에 비하면 훨씬 건물도 크고 웅장하다. 과연 이곳에선 무엇을 느끼게 될까?
3층에 도착하자마자 김만덕의 생애가 쫙 정리되어 있다. 김만덕(1739~1812)은 영정조 시대를 거쳐 순조 때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영정조 대를 일컬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문학이 꽃을 피웠으며 조정에서도 세력 간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정치도 안정된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이때 김만덕은 제주에서 태어나 자신의 최전성기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순탄한 삶을 살았느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12살(1750년) 때 부모가 돌아가시며 의탁할 곳이 없던 그녀는 기녀와 살게 됐고, 그로 인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18살엔 기적妓籍에 등록되어 기녀가 되어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녀란 천민에 속하는 계급으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물론 시와 서를 익힐 수 있고 그걸 양반들에게 뽐내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다고 천민이란 신분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그녀에겐 울분이 되었을 거고, 자기로 인해 친척들까지 천인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억울했을 거다. 그래서 그녀는 관청에 수시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 노력을 가상히 여긴 걸까? 결국 24살(1762년)이 되던 해에 제주목사가 기적에서 이름을 지우므로 양인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때부터 김만덕은 수완을 발휘하여 건입포구에 물산객주를 차려 장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제주만이 가진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급격하게 보수적인 성리학 체제가 지배하는 사회로 재편된다. 여기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했다는 건 안비밀이다. 이에 따라 여성은 더욱 수동적인 존재로, 남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적인 존재, 늘 가려져 있어야 하는 존재로 차별을 당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니 여성이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 더욱이 장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한계가 미치지 않는 곳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는 땅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농사를 짓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척박한 환경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자연스럽게 생업에 뛰어들게 했고 그로 인해 뭍과는 달리 양성이 모두 평등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만덕이 양인이 되자마자 바로 객주를 차려 장사를 할 수 있었던 데엔 제주의 이런 특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이고, 조선 후기에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상품거래가 활발히 전개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