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14
김만덕은 건입포구에 물산객주를 열고 뭍의 물건을 제주에, 제주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뭍에 매매하며 재산을 불려, 요샛말로 하면 ‘성공한 여성CEO’가 되었다.
그러나 그저 장사 수완이 좋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김만덕은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알려지진 않았을 것이다. 흔히 성공한 사업가들의 이야기는 부러움을 자아내긴 해도 만인의 사표가 될 만한 자랑스러움까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던 데엔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요소요소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알알이 배어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그리된 것이라 자부하여 사정없이 돈이란 칼날을 휘둘러 사람을 한낱 종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니 오죽했으면 재벌을 ‘큰 도둑놈’이라 비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이처럼 김만덕도 이런 함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돈에 눈이 먼 장사치냐, 돈과 사람을 대등하게 여기는 상인이냐 하는 것은 평상시엔 절대로 알 수 없다. 위기의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닥쳤을 때,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봐야지만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김만덕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기회는 그녀의 나이 56세(1794년)에 찾아왔다.
그 해엔 제주에 극심한 흉년(갑인흉년)이 들어 제주도는 혼란에 휩싸인다. 조정에서도 그런 내용을 알고 구휼미를 보냈지만 거친 바닷바람에 몇 척의 배가 난파되는 구휼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 이어진다. 제주민 1.800명이 아사로 죽었다고 할 정도이니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알만하다. 제주민들이 천재지변으로 시름시름 앓아가던 이때가 바로 김만덕이 취한 행동을 통해 그의 사람됨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감히 상상도 하기 싫지만 지금 이러한 천재지변이 닥친다면 대기업들은 어떻게 할까? 아마도 사람들의 불행을 호기로 삼아 새로운 사업(이를 테면 고리대금업 같은 것)을 하지 않을까. 이게 단순한 추측만은 아니다. 지금의 대기업들은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삼아 자국민들을 호구로 여겨 외국보다 훨씬 비싸게 가전제품을 팔아치우고 골목상권까지 진출하여 영세상인들을 내쫓으며 기술을 제공했던 중소기업의 기술을 위력으로 강탈하여 파산시켜 버린 전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뿐인가, 취업난으로 제대로 기도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위기 상황을 함께 슬기롭게 헤쳐 나갈까 고민하기보다 그들을 그저 값싼 노동력, 언제든 교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활용하기에만 급급하다. 이들에겐 ‘한 푼이라도 더 벌 궁리’만 있었을 뿐,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수많음 말들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건 돈이 있다고 다 너그러워진다거나,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더 추악해지고, 오히려 더 밴댕이 소갈딱지가 되어간다.
영화 <도둑들>엔 “도둑이 도둑질하는데 뭐가 문제야?”라는 말이 나온다. 그처럼 장사꾼이 돈을 불리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말은 곧 김만덕이 제주민을 상대로 쌀을 비싸게 팔았다고 해도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흉년이 든 다음 해인 1795년에 목포에서 양곡을 사와 제주민에게 나눠줬다. 그것도 거의 공짜로 나눠줬다. 하긴 흉년에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돈 한 푼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일 테니, 이들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쌀을 판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배추가 비싸니 내 식탁에는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올리라”라고 말한 어떤 대통령의 천박한 인식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아니 오히려 직접 두 눈으로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목도했기에 김만덕은 쌀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거나 장난을 칠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그들에게 맘껏 나누어줄 수 있었던 거다.
이런 훈훈한 이야기는 굳이 소문내려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금세 퍼졌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정조는 매우 흐뭇했으리라. 그래서 그녀에게 상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걸 거부한다. 어찌 보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자신은 상을 받기 위해, 기림을 얻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했는데 상을 받게 되면 자신의 진심이 훼손될 것을 알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상을 주는 대신 소원을 말하라고 하니 만덕은 “달리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첫째로 원하는 것은 한양에 들러 임금님이 거하는 곳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이며, 둘째로 금강산에 들러 일만 이천봉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無所願 願一入京都 瞻望 聖人在處 仍入金剛山 觀萬二千峯 死無恨矣 -체제공, 『樊巖先生集』)”는 두 가지 소원을 말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당시 제주엔 출륙금지령(1629년에 실시되어 200여년 간 지속됨)이 내려져 있었다. 제주민이 생계를 위해 육지로 대거 이주하여 제주 경제가 파탄에 빠지게 되자 뭍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고, 뭍사람과 결혼도 못하게 했으며,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만들 때도 뭍까지 건너갈 수 있는 큰 배는 만들지 못하도록 제재했다. 그 법으로 인해 제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태어난 제주에서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김만덕의 소원은 법을 어겨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파격적인 소원이었다. 그런데 역시 정조도 보통 인간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라 명했으니 말이다.
이로써 제주사람으로 태어나 바다를 건너 뭍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됐고, 한양은 물론이고 금강산까지 여행하는 최초의 제주도 출신 여성이 될 수 있었다. 교통편도 시원찮은 시대에, 그것도 여성의 여행은 꿈도 꿀 수 없던 시대에 김만덕은 그렇게 여행을 떠난 것이다. 어찌 보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나우시카 같은 진취력과 포용력을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다산은 아래와 같이 만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만덕에게 세 가지 기이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려 한다. 기생의 이름이 적힌 명부에 올랐지만 과부로 죽은 것이 첫 번째 기이함이고, 많은 돈을 지녔지만 기꺼이 베푼 게 두 번째 기이함이고, 바다에 살지만 산을 좋아함이 세 번째 기이함이다.
여성임에도 겹눈동자를 지녔고, 종의 신분임에도 역마의 부름을 받았으며, 기녀임에도 스님에게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딴 섬에 살면서도 임금의 사랑과 하사품을 받았으니, 이게 네 가지 희귀함이다.
아! 작고 왜소한 여자임에도 이런 세 가지 기이함과 네 가지 희귀함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또한 하나의 매우 큰 기이함이라 할만하다.
余論萬德 有三奇四稀 妓籍守寡一奇也 高貲樂施二奇也 海居樂山 三奇也 女而重瞳子 婢而被驛召 妓而令僧肩輿 絶島而受內殿寵錫 四稀也 嗟以一眇小女子 負此三奇四稀 又一大奇也
-정약용, 「題耽羅妓萬德所得搢紳大夫贈別詩卷」
정조도 감각적으로 만덕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건 글로 남겨야만 해’라는 필이 왔을 거다.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한 스토리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만덕의 이야기를 글로 지으라고 명을 내렸고 수많은 문인들이 만덕의 이야기를 지어 그녀의 대담함, 그리고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지혜를 기렸다.
하지만 어떤 글이나 영상이나, 평가나 한 쪽 방향으로만 서술되어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그건 한 인물을 선의 화신으로 만들어 후세를 계도하려는 불순한 목적으로 써진 것일 뿐, 막상 팔팔 끓는 피를 지닌 사람을 제거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성경을 통해 살아있는 예수를 만날 수 없고(못 박힌 후에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처절한 외침에서 잠시 예수가 보이는 정도다), 반인반신화된 박정희의 제사를 통해 살아있는 박정희를 만날 수 없으며, 친서민 이미지로 치장된 노무현의 평가를 통해 살아있는 노무현을 만날 수 없다. 그들 또한 들끓는 감정으로 살았던 사람이기에 어느 부분에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항시 같이 있었고, 여러 상황들에 휩쓸려 자신의 신념을 접어야 할 때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무 완벽한 상으로 어떤 인물을 포장하거나,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어떤 인물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극단적인 평가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때에 따라 갈등도 하고, 힘겨워도 하며, 외로워도 하고, 비난도 듣는 그런 묘사야말로 제대로 사람을 묘사한 거라 생각한다.
만덕전을 쓴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만덕을 아주 멋지고 대단한 인물로 그리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한 인물의 신격화에 다름 아니고 마치 십자가 못 박히기 위해 살았던 예수처럼, 사람들을 구휼하기 위해 한 평생 산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러니 여러 편의 만덕전을 읽다 보면 절로 손발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 우리의 눈에 띄는 건 심노숭의 만덕에 대한 매우 색다른 평가다. 아래에 인용한 글을 한 번 읽어보자.
지난날 내가 제주에 있을 때 만덕의 얘기를 상세하게 들었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으니 이렇게 해서 가지고 있는 남자의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라고 한다. 매번 쭉 늘어놓고 햇볕에 말릴 때면, 고을의 기녀들조차도 침을 뱉고 욕하였다. 육지에서 온 상인이 만덕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이가 잇달았으니 이렇게 하여 그녀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형제 가운데 음식을 구하는 이가 있었는데 돌아보지도 않다가 도에 기근이 들자 곡식을 바치고는 서울과 금강산 구경을 원한 것인데, 그녀의 말이 웅대하여 볼 만하다고 여겨 여러 학사들은 전을 지어 많이 칭송하였다.
내가「계섬전」을 짓고 나서 다시 만덕의 일을 이와 같이 덧붙인다. 무릇 세상의 명성과 실상이 어긋나는 것이 많음을 혼자 슬퍼하니, 계섬의 이른바 만나고 만나지 못하고 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 沈魯崇, 「桂蟾傳」
다른 문인들이 쓴 만덕에 대한 평가와는 180도 다른 평가다. 때론 얼마나 인색했는지, 때론 얼마나 돈을 쫓아 주위의 사람들을 핍박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 글을 읽었다고 함부로 김만덕의 모든 선행을 깎아내리고 돈에 눈이 먼 장사치로 폄하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라는 인간은 좋은 점도 나쁜 점도 함께 지니고 있듯이, 그녀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니 말이다. 오히려 이런 비판을 통해 만덕 또한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지니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살아낸 인물로 느끼게 해주며, 얼마나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해준다. 김만덕은 18세기에 제주에서 태어나 조선반도를 풍미했던 가슴 펄펄 끓는 심장을 지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여성이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