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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30. 2018

사람 맘은 참으로 간사하다

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5

사람 맘이 참으로 간사하다. 비행기를 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이번엔 절대 자전거를 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전거를 빌려서 달리고 있으니 언제 그랬냐 싶게 절로 행복해진다. 언제였더라,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거 같은데 자전거를 타고 싶어 무작정 끌고 나왔던 적이 있다. 막상 집에서 나오긴 했는데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기에 도로를 그냥 달렸다. 그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자전거는 나에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뫼베처럼 세상을 맘껏 누빌 수 있도록 해주는 둘도 없는 친구다.                



▲ 자전거를 타고 제주 바다를 보니 기분 짱 좋다.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알게 된 순간 

    

여행을 할 때면 별 생각 없이 ‘도보여행’만을 생각했다. 첫 여행이 도보여행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발씩 번갈아 내딛으며 그 길에서 느껴지는 감상들, 온갖 외로움들, 갖은 고민들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의 도보여행은 그런 점에서 나 자신을 충실히 느낄 수 있던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한 번도 자전거 여행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2011년 제주도 여행은 이와 같은 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경수가 제주도에 가자고 할 때부터 이미 두려움이 싹터 있는 상황이었는데, 거기에 자전거로 여행을 하자고 제안하니 온갖 불안증이 밀려오더라. 나야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 인간인지라, 두 가지 새로운 상황은 나를 짓눌렀던 거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제주도라는 낯선 공간,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하는 여행이라는 이색적인 상황이 바짝 쫄게 만들었다. 이럴 땐 전문용어(?)로 ‘佛알이 확 쪼그라들다’라고 표현해줘야 제 맛이다. 



▲ 확실히 겁이나 두려움은 몸의 반응으로 직각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막상 맘이 맞는 사람과 함께 낯선 공간을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누비고 있으니, 그 또한 묘한 매력이 있더라. 3박4일 동안 제주 곳곳을 돌아 제주시에 도착하고 보니 그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도보여행에선 느릿느릿 발걸음의 속도만큼 세상을 대면하게 되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 여행에선 좀 더 스피디하게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고, 그에 따라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11년의 그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그 다음 해엔 단재학교 아이들과 제주를 일주할 때 아무런 걱정도 없이 즐기며 여행할 수 있었고(물론 그땐 아이들 자전거가 자주 펑크도 나고, 비까지 내리는 악천후까지 겹쳐 힘들긴 했지만, 두려움과 공포는 없었다), 2015년엔 영화팀 아이들과 낙동강에서 한강까지 리얼버라이어티를 만들기 위해 여행할 수 있었다. 뭐든 그러하듯 시작할 때가 힘들 뿐, 막상 해보면 그 다음부턴 전혀 힘들지가 않다.                


▲ 자전거를 타며 찍은 리얼버라이어티. 그만큼 자전거여행은 확실히 매력이 가득하다.




제주의 푸른 바다가 맘을 위로해준다

     

무작정 바다가 보고 싶어 일주도로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하늘엔 구름이 껴있긴 해도 햇살이 따스해서 지금이 겨울인지도 헛갈릴 지경이더라. 그래서 두꺼운 외투는 노트북이 담긴 가방의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깔아놨고 뽀송뽀송한 느낌의 후리스만 입고 달리는 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혹, 장갑이 얇아 손에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떨까 걱정했는데, 손에서 땀이 날 정도로 날씨는 포근했다. 

애월 해안도로를 달리며 모처럼만에 제주의 바다를 만끽했다. 간혹 구름에 가려 해가 안 보일 땐 바다가 나를 삼킬 듯 험해 보이다가도 햇살이 비치면 언제 그렇게 험악했냐는 듯 에메랄드빛의 푸르름을 간직한 화사한 바다색을 드러냈다. 맞다, 이런 제주의 맑디맑은 바다를 보러 지금 여기에 올 생각을 했던 거다. 마침내 그 광경을 내 두 눈으로 담아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행복에도 비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인 거겠지. 바다를 보고 있으니 내 맘은 절로 평온해졌고 불쑥 올라오던 수많은 감정은 누그러졌다. 

이쯤에서 마음을 정해야 했다. 제주시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 길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달릴 것인지 말이다. 막상 달려보니 달릴 만했고 여기까지 애써서 왔는데 돌아가는 건 바보 같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랬다지, ‘남자는 직진’이라고. 물론 이 말에 담겨 있는 성차별적인 생각에 동의하진 않지만, ‘하던 일을 중단 없이 계속한다’는 속뜻엔 충분히 동의하기에 남쪽으로 계속 달리기로 했다.                



▲ 제주의 푸른 바다는 나를 안정시킨다. 이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 여유롭게 마시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제주에서 정말 맛있는 볶음밥을 먹다 

    

그런데 그때쯤 잠시 후회가 밀려왔다. 제주에 와서 늘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자전거 여행을 했었기에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말이다. 

역시 고민하지 않으면 늘 하던 방식대로 살아가고 행동하게 마련이다. 누군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님에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패턴화된 방식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번에도 어차피 자전거를 타고 다닐 거면 저번과는 달리 시계 방향으로 도는 방법도 있었을 거다. 그렇게 했다면 그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다른 방향에서 느껴지는 제주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제주시에서 성산읍까지 가는 정도로 훨씬 수월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됐을 거다. 이미 너무 많이 온 상황이라 후회만 하고 되돌아갈 순 없었다. 



▲ 1120번 도로엔 자전거 길이 없다. 그래도 차가 별로 달리지 않으니 달리기엔 좋다.



오늘은 제주 서남쪽에 있는 대정읍까지 가자고 맘을 먹었다. 이미 2시가 넘었기에 일주도로를 따라 대정읍까지 가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1120번 지방도를 따라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점심을 먹을 곳이 있나 봤더니, 마땅한 곳이 없더라. 그래서 새벽에 꾸역꾸역 먹은 밥의 힘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저지오름 입구 쪽에 도착하니 중화요리집이 보이더라. 혼밥하기엔 중화요리점 만한 곳은 없기에 들어가 해물볶음밥을 시켰다. 조금 기다리니 해물볶음밥이 나왔는데, 2011년 사람여행 때 군산에서 먹은 볶음밥 이후로 가장 맛있는 볶음밥이더라. 밥과 야채들이 기름에 잘 볶아져 볶음밥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고, 해산물도 가득하여 한 입 베어 물면 행복이 밀려왔다.                



▲ 시장이 반찬이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 맛있는 볶음밥이었다.




커다란 고요함을 간직한 마을에서 헤매다 

    

밥을 먹고 나니 이미 시간은 3시 30분이 넘었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대정읍에 도착하기에 부리나케 페달을 밟았다. 애초에 첫날부터 이렇게 ‘빡시게’ 여행을 할 맘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마치 극기훈련과 같은 여행이 되어버렸다. 

도로표지판에 쓰여 있는 대정이란 한자를 보고 ‘오늘은 정말 저곳에서 자야지’라고 생각했다. 대정大靜은 ‘커다란 고요함’이란 뜻으로 지금의 나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에 대한 불만, 사람 관계에서의 어리석음 때문에 수시로 일어나는 온갖 감정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혼란 속에 고요하기’, ‘외로움 속에 충만하기’, ‘두려움 속에 태연하기’처럼 크게 혼란스러울수록, 애써 고요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니 말이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대정읍에 도착했다. 생각처럼 바다가 훤히 보이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더라. 모텔이 세 군데 정도 보여서 들어가 가격을 확인하니 모두 다 4만원을 부른다. 예전에 도보여행을 할 땐 모텔에 들어가 흥정하는 재미가 있었다. 더욱이 혼자 하는 여행인데 제 가격을 내고 들어가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필사적으로 5천원이라도 깎으려 했고, 그 덕에 대부분의 모텔에선 2만 5천원에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얄짤’ 없더라. 



▲ 커다란 고요함으로 간직한 곳으로 간다. 여기서 쉴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흥정하는 건 포기하고 숙박업소앱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서귀포 신시가지 근처에 3만 2천원에 잘 수 있는 곳이 보이더라. 그곳까지 가자니 이미 시간은 5시 정도 되었고 앞으로 2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해서 첫날부터 너무 무리한 여행을 해야만 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머물자니 모텔 가격도 가격이지만 허름하기에 약간 꺼려졌다.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은 정말 맞는 얘기다. 희망이 있을 땐 사람이 그걸 버팀목 삼아 극한의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지만, 그게 사라지는 순간 사람은 한순간에 무너지니 말이다. 이때의 내가 정말 그랬다. 대정읍에서 잘 줄만 알고 여기까지 열심히 왔는데, 이곳에서 자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할 맛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쯤에서 ‘어차피 가야할 곳이니 오늘 좀 무리를 하면 내일은 서귀포의 이중섭미술관도 가고 정방폭포도 갈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생기는 거잖아’라고 정리했고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옷을 다시 여미고 출발했다.                



▲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다. 오른쪽 산방산을 두고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동작 그만첫날부터 강행군이냐~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맞바람이 불어 자전거가 나가는 걸 막아섰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오며 추위와 함께 자전거도로의 노면 상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할 때 난 줄곧 ‘극단적인 상황,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난 상황에 몰리고 싶다’고 외쳤다. 그래야만 평소에 보이지 않던 내가 보이고, 한 번도 느낄 새가 없던 나의 역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토종단 땐 공주 경천리에서, 사람여행 땐 제천 수산면에서, 자전거 여행 땐 상주에서 그런 경험을 하며 나의 한계와 함께 미처 알지 못한 가능성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이미 잘 곳을 구해놔서 그곳까지만 가면 맘껏 쉴 수 있기 때문이고 그나마 익숙한 곳을 달리기 때문이다. 

서귀포로 가는 길엔 익숙한 장소들이 몇 군데 보였다. 2011년에 경수와 왔을 때 함께 갔던 ‘건강과 성 박물관’도 보였고, 그 때 점심을 먹었던 삼거리 식당도 그대로 보였다. 이미 7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그때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다시 보니 그때의 감정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더라.                



▲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그게 가슴 뭉클하게 한다.




간사하기에 더 애틋한 내 마음

     

중문관광단지까지 통과하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 정도였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첫날부터 강행군을 한 셈이다. 여행이 원래 이처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막상 부딪히며 순간순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정말 모처럼만에 제대로 된 여행을 했다고 할 만하다. 



▲ 중문단지를 지나지만 여기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은 이번에도 즐기지 못한다. 다음엔 이곳을 다녀봐야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 평가하고 느끼는 것일 뿐, 이미 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나니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고 엉덩이 쪽은 욱신욱신 아파오더라. 그런 상황이니 애초에 계획한 ‘4박5일의 일정’은 무리다 싶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일요일에 돌아가는 서울행 비행기표를 취소했고, 토요일에 가는 비행기표를 다시 예매했다. 이로써 4박5일 동안 있으려는 계획은 급하게 변경되어, 3박4일의 일정이 된 것이다. 

역시나 사람 맘은 참으로 간사하다. 집에 있으면 무진장 떠나고 싶고, 떠나보면 무진장 집에 가고 싶으며,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홀로 있고 싶고, 홀로 있으면 누군가든 만나고 싶으니 말이다. 이 간사함을 어찌하리오. 



▲ 여행다운 여행을 뜻하지 않게 해야 했던 첫 날의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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