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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Feb 06. 2018

애쓰지 말고, 고달프지 말고

2018 나 홀로 제주 여행 6

어제 밤 11시쯤에 잠이 들었나 보다. 저녁 7시까지 페달을 밟아 하루 만에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달리고보니 몸은 완전히 파김치가 됐다. 낯선 공간이라 선잠을 잘 법도 한 데도, 몸을 누이자마자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꿀잠을 잘 수 있었다.                



 ▲ 싱글 베드 두개가 놓인 방이라, 아무래도 좀 저렴했던 거 같다. 어쨌든 그 덕에 좋은 곳에서 잘 수 있었다.




비를 맞는 여행의 묘미?   

  

오늘 서울은 영하의 강추위가 이어진다고 하던데 이곳 제주는 어제와 똑같이 영상 4도로 포근하기만 하다. 막상 자전거 여행을 하자고 맘먹었을 때만 해도 ‘겨울이라 추운데 가능할까?’라는 걱정을 했는데, 그런 걱정 따위는 ‘넣어둬~ 넣어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포근하기만 했으니 정말 다행이다.

단지 오늘 저녁엔 비 예보가 있고 내일 오전까지 내린다고 하더라. 과연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느냐가 관건이라면 관건이다. 뜻대로만 된다면 숙소에 도착한 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내일 퇴실시간(11시 30분)까진 그쳐줬으면 좋겠다. 과연 내 뜻대로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행을 떠났기에 모르더라도 가야만 하고 맞닥뜨려야 한다.

나는 비를 맞으며 하는 여행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2009년 이후로 좋아하게 됐다는 표현이 맞다. 2009년에 도보여행을 떠났을 때 목포에서 무안까지 처음으로 흠뻑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그때 왠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왔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비를 맞으며 하는 여행 자체를 사랑하게 됐다.



▲ 2015년 자전거 여행 때 두물머리 중앙선 철교를 건너는 아이들. 빗길 자전거 여행 확실히 재미지다.



여행이란 어차피 닥쳐오는 온갖 것들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순응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늘 도망만 치던 나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도 되돌아볼 수 있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비를 맞으며 걷는 상쾌함, 해방감도 만끽할 수 있다. 솔직히 지레 겁을 먹었기에 도망치는 것이며, 맞닥뜨리긴 버거울 것 같아 도망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재밌는 점은 막상 불안과 두려움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폭풍의 중심은 고요하다’는 말처럼 마음에도 평온함이 찾아오고 불끈불끈 일어나던 조바심도 내려앉는다. 그제야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으니 맘껏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수밖에.

그런 황홀한 기분은 2012년에 제주 일주 중 억수로 비가 내리던 셋째 날에, 2013년에 눈 덮인 천왕봉을 새벽에 오를 때, 2015년에 태풍이 서해를 덮치던 날 격포로 걸어갈 때, 같은 해 낙동강-한강 라이딩 중 마지막 날 비를 흠뻑 맞으며 서울에 입성할 때도 똑같이 느껴졌다. 순탄함만이, 고통 없는 평온함만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아니며, 때론 적당할 정도의 고난이, 여행 중 닥쳐오는 온갖 기상이변이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과연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얼마나 닥쳐올까?          



▲ 눈 쌓인 천왕봉을 새벽에 함께 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이건 둘도 없는 추억이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는 고달프다

     

어제 무리를 한 탓인지 몸은 여기저기 이상 신호를 보낸다. 안장에 사타구니 쪽이 계속 닿다 보니 빨갛게 부어올랐고, 다리엔 쇠라도 달아놓은 양 무겁게만 느껴지며, 왼쪽 무릎은 시큰거리는 느낌이 간헐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전혀 준비하지 않고 온 여행이며, 막상 자전거 여행을 맘먹었을 때도 몸을 풀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이 또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욱신거림이었기에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이 나에게 선사하는 유쾌한 짜릿함, 흥겨운 찌릿함이니 말이다.

원랜 9시 20분쯤 일어나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쉬엄쉬엄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인데, 어찌 되어 먹은 심보인지 아침 6시에 눈이 떠지더라. 이거야말로 ‘얼리버드 고질병’이지 않은가. 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도 빨리 먹는다’라고 했다던데, 우리가 먹을 양은 정해져 있으니 빨리 먹든, 다음에 먹든 중요하지가 않다. 근데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는 일찍 피곤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났으니, 참 이 고질병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자는 건 포기하고 일어나 짐도 챙기고 가계부도 정리하고 씻은 후에 느긋하게 호텔을 나섰다. 시간은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더라.

오늘은 이중섭미술관과 정방폭포에 가볼 생각이다. 이중섭미술관은 ‘알쓸신잡’이란 TV프로를 통해 애끓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가보고 싶었고, 정방폭포는 4.3사건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늘 맘속에 그리며 가보고 싶었다. 어차피 어제 무리를 하며 달린 덕에 오늘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쉬엄쉬엄 둘러보며 가도 될 거란 생각으로 호텔을 나섰다.                



▲ 숙소에서 떠나기 전에 한 컷! 오늘도 신나게 알차게 재미지게.




해장국, 넌 나에게 치욕을 안겨줬어

     

어젠 그래도 간간히 햇살이 비치며 기온도 높아 꽤 덥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벌써부터 구름이 한가득 끼어 있어 서늘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고, 겨울용 외투로 중무장을 했다.





아침은 호텔 근처에 있는 미향해장국집에서 먹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해주는 곳인 줄은 알았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문을 열고 들어가 “해장국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얼큰한 맛과 순한 맛 중 뭐로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보통 때였으면 당연히 순한 맛을 시켰을 거다. 누군가는 매운 것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데, 난 매운맛은 질색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날은 추위 속에서 하루 종일 달릴 생각을 하니, 차라리 매운맛을 먹어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당히 “얼큰한 맛 하나요”라고 외쳤다.



▲ 이렇게 밑반찬이 차려진다.  다른 해장국집과는 매우 다른 조합이다.



여긴 특이하게 각 테이블마다 불판이 놓여 있고, 불판 위엔 돼지기름이 올려 있다. 얼마 지나지 않으니 밑반찬과 달걀이 나왔는데 그 중의 한 접시는 매우 특이한 구성이더라. 김치와 무생채, 그리고 콩나물 버무린 게 한 접시에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왜 다른 반찬들은 각 접시에 나눠져 있는데, 얘네들은 한 접시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달걀을 보며 ‘해장국이 얼마나 매우면, 미리 위장을 풀어놓으라고 이렇게 삶은 달걀까지 주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식탁 모서리에 달걀을 내리쳤다. 그런데 아뿔사~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달걀 껍질만 깨져야 정상인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껍질이 깨진 곳으로 허여멀건한 속 내용물이 밑으로 쭉 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 이건 삶은 달걀이 아닌 날달걀이었던 거고, 그 순간 ‘나 완전히 새 됐어♬’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다. 서빙을 하던 친구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 달걀은 가운데 놓인 불판에 구워서 후라이로 해 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리고 불판에 저기 놓여 있는 밑반찬들도 구워서 먹으세요. 달걀 새로운 걸로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깔끔하게 정리해주더라. 이런 치욕을 안겨 준^^;; 해장국은 난생 처음이야~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 얼큰해 보이는 해장국이 마침내 나왔다. 그리고 불판엔 달걀과 함께 야채까지 넣어 볶고 있었다. 그 어느 진수성찬 부럽지 않은 냄새가 솔솔 풍기며 침샘을 자극한다. 마침내 해장국도 한 숟가락 떠 먹어보고, 볶은 김치도 한 입 먹어봤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둘 다 사정없이 매웠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해장국은 순한 맛으로 시킬 걸 그랬다. 그랬으면 나름 매운 정도가 알맞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먹어야 했기에 해장국을 한 숟갈 떠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를 반복하며 천천히 먹어야 했다. 그러니 아침밥을 먹는데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더라. 맛있게 음미하듯 먹고 싶었는데, 완전히 실패!                



▲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맛있어 보이나, 이거 이거 너무 매운 것 투성이잖아.




서귀포로 가는 아름다운 길

     

해장국을 먹고 가는 길엔 이마트와 제주월드컵경기장이 보이더라. 이 이마트로 말할 것 같으면 2011년에 왔을 때 땀을 흘린 상태에서 맥주 한 캔과 꼬치를 사서 만찬을 즐겼던 추억의 장소다. 갈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시는 맥주의 맛이란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비길 수 없는 최고의 맛인데, 오늘은 그와 같은 황홀한 경험을 할 순 없었다. 지금이 아침시간이기도 했고, 날씨까지 어둡고 서늘하여 전혀 맥주가 끌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음 여행엔 이곳에서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는 영광을 기약해보며 앞을 향해 달렸다.



▲ 아침을 먹고 내려가는 길엔 멀찍이 바다와 함께 월드컵경기장이 보인다. 경치 정말 좋다.



지금까지 두 번의 제주 여행 중에 서귀포를 지날 때 일주도로로만 가며 서귀포는 둘러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었다. 이러니 여행은 한 번 간 것만으론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물론 2012년에 왔을 땐 아이들에겐 이중섭미술관을 둘러보고 저녁거리를 사오도록 했지만, 교사인 나는 서귀포 시청 쪽에 자리를 잡고 편히 쉬었으니 역시나 둘러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때 아이들이 사온 쌀의 비닐이 터져 꽤 많은 양이 쏟아지는 바람에 아이들과 함께 쏟아진 쌀에 대한 애도송을 부르기도 했던 웃픈 에피소드가 추억으로 남아 있다.  



▲ 쌀 하나로 우리들의 즐거운 놀거리가 생겼다. 역시 우린 살아 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이중섭미술관’을 목표로 잡았고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지도로 검색해보니 일주도로가 아닌 다른 길을 알려주더라. 일주도로 바로 밑에 있는 길로 조가비박물관과 서귀포 예술의 전당을 지나는 길이었다. 다행히도 이 길은 어제와 오늘 달린 길 중 최고의 길이었다. 오른쪽으론 제주의 남해가 손에 잡힐 듯 곧바로 보이고, 왼쪽엔 한라산의 웅혼한 자태가 한껏 드리워져 맘껏 감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로를 달리며 제주의 바다와 제주의 산을 이렇게 동시에 볼 수 있는 길은 흔하지 않다. 그러니 서귀포를 지날 예정이라면 이 길로 꼭 가라, 아니 매우 천천히 두 번 가라~  



▲ 이 루트로 서귀포에 가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거기서 얼마 달리지 않으니 이중섭의 작품이 전시된 길이 나오더라. 속도 감속 안내판엔 이중섭의 소가 그려 있고 “절대감속 황소가 놀랄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더라. 그걸 보니 마침내 이중섭 월드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중섭의 세계와 접속하기 일보 직전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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