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韠의 ‘궁유시宮柳詩’
이미 이 시에 대한 내용은 이안눌이 쓴 「용산의 달밤에 기녀가 故 인성 정철의 사미인곡을 부르는 걸 듣고 바로 읊어 조지세 형제에게 준 시龍山月夜 聞歌姬唱故寅城鄭相公思美人曲 率爾口占 示趙持世昆季」의 감상 부분에서 짧게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선 잠시 언급만 했기에, 이번엔 시가 재앙이 된다는 ‘詩禍’를 중심으로 다뤄보기로 하자.
우선 권필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는 게 중요할 거 같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단서는 이정구나 장유가 쓴 『석주집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정구는 ‘그의 기운은 우주를 좁다고 여겼고 눈으론 천고의 옛 사람들을 없는 사람인 듯 여겼으며, 그의 포부는 살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했고 장유는 ‘그의 사람됨은 훤칠한 이마와 커다란 입, 사이가 먼 미간으로 겉모습은 위대했고 기상은 호탕했다.’라고 평했다. 이정구는 그가 가진 기상을 인상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면, 장유는 겉모습을 형상하며 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묘사를 통해 장유라는 사람은 풍채도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했으며 그런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기상도 어느 것에 구애되지 않을 정도로 호탕하고 거침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인간상을 꼽으라면 공자의 제자인 자로나 삼국지의 주역인 관우, 조선시대엔 연암 정도가 떠오른다. ‘거를 것 없이 확 내지르는 컨셉’이 매우 유사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하면 세상과 부딪히기만 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서서히 삶을 마감해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권필도 시재가 뛰어났고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으며 여러 번 벼슬에 나갈 기회도 있었지만, 그에게 세상일이란 한낱 아귀다툼으로 보였던가 보다. 그런 것들을 극구 사양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찍이 과거시험은 보려 하지도 않았고 고관대작의 집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시재를 높이 사며 그와 어떻게든 함께 일을 하고 싶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정구다. 권필은 이정구의 도움으로 그나마 선조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지며 권력에 한 걸음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4년의 기록엔 “원접사 이정구가 그의 시재를 선조께 추천하며 벼슬하지 않은 이로 제술관을 충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조께서 신하에게 권필의 시 수십 편을 취할 것을 명하였고 그의 시를 보게 되자 아름답고도 뛰어나다 여기셨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덕에 권필은 원접사 이정구의 제술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배석할 수 있었고 사신에게 시재를 맘껏 뽐낼 수 있었다.
권필에게도 이정구의 그런 마음들이 정말로 귀하게 여겨졌었나 보다. 그러니 권필은 평소에 늘 “이정구 상공이야말로 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상공이 아니시라면 나의 문집에 서문을 쓸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선조 때 이름이 알려졌고 선조는 그의 재능을 귀하게 여겨 여러 벼슬자리를 주었지만 그는 극구 반대하다가 겨우 어린이를 가르치는 벼슬인 동몽교관만을 수락하고 짧은 시간 동안 벼슬생활을 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선조는 물러났고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동법 시행 같은 것은 조선에 꼭 필요한 정책들이었다. 임란으로 완전히 망가진 조선을 광해군은 세자의 신분으로 전국을 누비며 민심을 수습했고 그런 노력의 결과로 임금으로 즉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이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농단을 하고 있었고 그게 너무도 눈에 거슬렸던 권필은 위에 제시한 시를 지은 것이다. 1구에선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인 유희분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으며, 2구에선 그런 유희분에게 아첨하여 벼슬자리 하나라도 따내려, 이권을 하나라도 따내려 애쓰는 권력자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저 시를 ‘宮柳詩’라 부르는데, 유희분은 저 시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이건 완전히 나를 엿 멕이려 지은 시구나’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기지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 발휘되는 법이다. 그는 광해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권필의 시에서 말한 ‘궁류’라는 두 글자는 실로 중전마마를 드러내어 꼭 집어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광해군은 크게 화를 내며 잡아들이라고 말한다.
잡혀온 권필은 “임숙영이 전시의 대책에서 헛소리를 많이 하여, 제가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경치가 좋은 날에 사람들은 뜻을 얻은 듯 행동하나, 벼슬도 없던 숙영은 어찌 이렇게 멋대로 위험한 말을 하나?’라는 것이 본래의 뜻입니다.”라고 항변했지만, 광해군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중죄로 다스려 엄한 형벌을 내리려 한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급하게 말렸고, 광해군도 그런 말들을 조금은 받아들여 곤장형만 내리고 귀양을 보내게 했다.
광해군의 히스테리와 권필의 죽음
이번 사건으로 여러 곳에 마음을 쓰며 몸도 약해진데다가 곤장까지 매우 심하게 맞고 나니, 그는 자기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결국 자신이 쓴 시 한 편이 자신을 죽게 만든 것이기에, 이를 ‘詩禍’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정황을 알기 때문에 장유는 “선조는 권필의 명성을 듣고 지었던 시를 궁궐로 들이라 명하였고 크게 칭찬하셔서 포의임에도 원접사인 이정구를 돕도록 하는 데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정치는 혼란스러웠기에 권필은 자주 곧은 말로 고관대작의 심기를 거슬렀고 마침내는 유언비어에 걸려들어 시로 인한 필화사건의 재판에 연좌되어 죽었다. 그러다 지금의 인조가 등극하셔서 모 관리로 추증하길 명하셔서 권필의 곧은 도가 활짝 펴질 수 있도록 했다.”라고 평가했다.
시 한 편이 대역죄마냥 다뤄졌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가슴 아픈 얘기다. 왜 광해군이 그 당시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언젠가는 한 번 탐구해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권필은 그렇게 안타깝게 죽었지만, 그를 기리던 이정구, 이안눌, 장유와 같은 지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남아 여전히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으니 다행이다. 떠난 그곳에서도 맘껏 시재를 펼치며 호탕하게 한바탕 웃어재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