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0일(목)
한때 기독교에 심취했던 나에게 이슬람은 ‘이단’이었고 ‘입에 담지도 말아야 할 종교’였다. 이미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규정한 이상, 내가 아무리 ‘왜 이단인가요?’라고 의문제기를 할지라도 쓸데없는 얘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자유로워지고 나니, ‘이단’이라 생각했던 모든 종교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처음엔 불교가, 그리고 그 후엔 제칠일 안식교나 이슬람교 같은 기독교의 다른 분파의 종교들이 말이다. 그런 종교들이 지금껏 뿌리 내리고 유지될 수 있던 데엔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대통령궁 근처에는 두 곳에 모스크mosque가 있었다. 이렇게 지근거리에 모스크를 두 곳이나 짓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근처에 모여 살 것이며, 그 사람들을 위해선 두 군데의 모스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모스크를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스타나에 설치된 최대 규모의 이슬람 사원으로 대통령궁의 후면에 위치하여 절대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굴심쌤은 양말을 신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 난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왔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떨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 못 들어간다면, 양말을 빌려서라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이슬람 사원의 체험은 꼭 해보고 싶은 강렬한 무엇이었다. 그런데 막상 입구에 다다르니 남자들은 그냥 아무 제재 없이 모스크의 중앙부에 들어갈 수 있더라. 그에 반해 여자들은 가운으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 주변부에 앉아 기도해야 했다.
남녀의 차별이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쓰고 보면 꼭 이슬람교만 이상한 종교처럼 보이지만 이런 식의 차별은 여타 종교들에도 공통적으로 있다. 천주교에서 미사포를 쓰는 것과 유교의 남성 중심적인 제사 예법과 심지어 모든 만물의 불성佛性을 주장하는 불교가 비구니의 피선거권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시대적 한계가 종교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엔 ‘여성은 유혹하는 존재’이며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종속적인 존재’이며 ‘남자의 대를 잇기 위한 수단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세상도 변해가고 있다. 고작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젠 여성도 당당한 주체가 되어 선거권이 있고, 한국에선 최초의 여성 대통령까지 나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여성의 인권 향상이야말로 그 사회의 지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 것이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맞춰 각 종교들도 시대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든, 무함마드든, 석가든 그들이 한 말의 정신을 따라야지, 그 내용 자체만을 붙들고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옛날의 문장을 모방하여 글을 지음을 마치 거울에 형체를 비추는 것처럼 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말하겠다. 좌우가 서로 뒤집어지니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치 물에 형체를 반사시키는 것처럼 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말하겠다. 위아래가 거꾸로 보이니,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말하겠다. 낮엔 난쟁이, 숏다리가 되고 해질녘엔 거인, 꺾다리가 되니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치 그림으로 형체를 묘사하는 것처럼 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말하겠다. 행동하는 데도 움직이질 않고 말하는 데도 음성이 없으니,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끝내 비슷해질 순 없다는 건가? 말하겠다. 어찌 비슷해짐을 추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 천하에 말하기로 서로 같은 것을 반드시 ‘매우 닮았다’고 말하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또한 ‘참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이라 말하고 ‘닮았다’고 말하는 사이에 거짓과 다름이 그 가운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해하더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절대적으로 다르지만 서로 흡사한 것이 있다. 통역과 번역으로 뜻을 통하게 할 수 있고 전서篆書와 주서籒書, 예서隸書와 해서楷書로 다 글을 지을 수 있는 건 왜일까? 다른 것은 외형이지만 같은 것은 정신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것을 종합해보면 정신이 비슷한 것은 뜻이고, 외형이 비슷한 것은 거죽과 터럭이다. - 박지원, 『녹천관집서』
倣古爲文, 如鏡之照形, 可謂似也歟? 曰: “左右相反, 惡得而似也?” 如水之寫形, 可謂似也歟? 曰: “本末倒見, 惡得而似也?” 如影之隨形, 可謂似也歟? 曰: “午陽則侏儒僬僥, 斜日則龍伯防風, 惡得而似也?” 如畵之描形, 可謂似也歟? 曰: “行者不動, 語者無聲, 惡得而似也?”
曰: “然則終不可得而似歟?” 曰: “夫何求乎似也? 求似者非眞也. 天下之所謂相同者, 必稱‘酷肖’; 難辨者亦曰‘逼眞’. 夫語眞語肖之際, 假與異在其中矣. 故天下有難解而可學, 絶異而相似者. 鞮象寄譯, 可以通意; 篆籒隷楷, 皆能成文, 何則? 所異者形, 所同者心故耳. 繇是觀之, 心似者志意也, 形似者皮毛也.”
천주교에서 여자들이 미사보를 쓰는 이유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다.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고, 그런데 반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란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무서워서라도 그 머리위에 그들을 초월하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항상 베일을 덮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니라. (고린도전서 11:7∼9)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로 드러낼 수 있기에 가릴 필요가 없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기에 가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말은 바울이 살던 당시의 어떤 관념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00년이나 훌쩍 지났음에도 여성의 참정권, 인권 등을 인정하는 시대가 왔음에도 여전히 이 말은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만 집착하는 행태를 연암은 ‘겉모습만 비슷한 것形似’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겉모습만 비슷해서는 ‘꼭 닮았다酷肖’라는 말을 듣거나 ‘진짜 같다逼眞’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진짜眞’라는 말을 들을 순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아무 생각 없이 ‘본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중섭의 ‘소’가 훌륭한 그림이어도, 그걸 따라 그려서는 ‘아류작’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종교의 교리나, 사상이라고 해서 과연 이와 다를까?
그래서 연암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求似者非眞也’라고 외치며 ‘겉모습만 비슷한 것’을 추구하지 말고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란 곧 ‘정신’이다. 내용 속에 감춰진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그걸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주어진 말들에 현혹되지 말고, 그 안에 어떤 정신이 숨어 있는지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으로 바울의 말 속에 감춰진 ‘정신’을 찾으려 노력해야 하고, 그걸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슷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진짜’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