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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Sep 11. 2018

몸치는 춤이 고프다

2013년 6월 25일(화)

어젠 학교 탐방을 하고 탈디쿠르간을 알아보는 일정이었다면, 오늘은 정식적인 대통령 학교를 체험하는 일정이다. 

카자흐스탄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대통령학교에서 보내온 일정표는 다양한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테니스와 농구 등의 스포츠도 하고, 연극도 하며, 전통춤과 카작어도 배우며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하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알마티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내가 신경 쓸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담당자가 있기에 난 한 발짝 물러서서 아이들이 잘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아 참! 어제 저녁 11시에 A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다. A가 광견병 주사를 등과 팔 쪽에 맞았는데, 등 쪽에 맞은 주사가 어떤 약물인지 궁금하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치료를 받은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떼어서 알려달라고 하셨다. 오늘은 특히 이 부분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재밌게 논다.




몸이 말을 안 들어     


오전엔 연속해서 두 번이나 춤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처음엔 유행곡에 맞춰 남자 선생님이 각 동작을 알려줬고, 다음엔 카작 전통음악에 맞춰 여자 선생님이 각 관절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려줬다. 처음이기 때문에 잘 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누구 하나 박자에 몸을 맡길 정도로 유연한 사람은 없었다. 

춤이란 몸이 경직되어서는 출 수 없다. 긴장이 풀려야 하며 전체적인 흐름에 몸을 맡겨야만 비로소 자연스럽게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몸을 움직여본 경험이 거의 없으니, 몸은 더욱 긴장되고 긴장되니 몸이 뻣뻣해져 동작이 어설프고 어색해진다. 또한 자신의 동작이 어설프다는 것을 인식하니, 더욱 몸은 긴장되어 간다. 그러니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자신의 몸이지만, 낯선 타인의 몸을 대하듯 어색할 수밖에 없다. 여태껏 내 몸만은 ‘나의 것’이라고만 느꼈는데, 춤을 배우며 내 몸마저 ‘타자’일 수 있음을 알게 됐다.               



▲ 오전엔 댄스 댄스 시간이었다. 남자 선생님에게 현대 음악에 맞춰 댄스를 배우고 있는 중.




금지된 사회왜곡된 허용     


그렇다면, 왜 ‘나의 몸’이 ‘타인의 몸(타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단순히 생각해 보더라도, 그게 나의 문제만도 아니며, 단재학교 친구들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애초부터 춤을 출 수 있는 기회가 사회적으로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가장 많이 노출되는 것이 ‘지식 획득으로서의 공부’인 것이지, 어떻게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것인지, 어떻게 몸을 움직여 세상과 소통할 것인지 고민하며 접하게 되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예술의 한 부분인 ‘피아노’나 ‘미술’을 배우는 경우는 있지만, ‘춤’을 배우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부모가 피아노나 미술을 배우게 하는 이유는 ‘예술적인 감각이 있으면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지, 그 자체를 긍정하여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춤이 아이들의 정서발달과 사고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 그때부턴 ‘춤’도 호황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의 ‘춤’이 지금 말하려고 하는, 내 몸을 자기화하는 ‘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 호들갑이야말로 한국적인 교육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여자 선생님에겐 카자흐스탄 전통춤을 배웠다.




춤에 대한 편견     


이런 식의 춤과 예술에 대한 편견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닌 게 분명하다. 조선시대, 아니 그 이전의 시대에도 춤을 추는 사람들은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장녹수 같은 경우도, 기생 출신으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궁중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 출신인데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노래와 춤을 배웠던 사람은 노비출신이거나 기생의 자식일 때나 가능했다는 말이다. 양반들은 춤과 노래를 ‘쌍 것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배우지 않았지만, 자식들도 가르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식이 조선이 망한지, 백 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지금 노래와 춤을 배운다고 ‘쌍 것’이라 표현하지 않지만, ‘그런 거 배우면 지지리 궁색 맞게 산다’라는 말로 여전히 편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편견이 학생들에게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학교에서 소위 춤 좀 춘다는 아이들은 태반이 날라리였으니 말이다. 소풍 때나, 축제 때 그런 아이들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고 있으면, 한 편으론 ‘멋있다’라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론 ‘그러니 니가 그 모양이지’라고 깎아내리기 바빴다. 그 땐 그런 판단이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옛적부터 내려오던 ‘춤=저속’, ‘춤추는 사람=쌍 것’이라는 편견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이런 현실이기 때문에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춤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몸치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이래저래 가슴 아프다. 



▲  신윤복의 '검무'. 춤은 천한 것이었다. 그래서 양반은 그걸 즐겨보는 사람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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