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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Sep 19. 2018

춤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

2013년 6월 25일(화)

옛적부터 내려오던 ‘춤=저속’, ‘춤추는 사람=쌍 것’이라는 편견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로 인해 춤을 춰볼 생각도, 리듬을 타며 온 몸에 흐르는 열정을 발산할 생각도 여태껏 해보지 못했다.                



▲ 카자흐스탄 전통춤을 배우는 아이들.




가진 것을 빼앗겨도 무감각한 사회

     

왜 이런 현실을 지금까지 잘도 수긍해왔으면서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걸까? 인간은 세상을 향해 표현하고 표출하는 존재다.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울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이때의 울음은 기혈이 열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세상과 소통을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표현은 현실 세계에 던져진 존재인 이상, 당연히 해야만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가게 된다. 

동적인 표현 영역으론 노래와 춤이, 정적인 표현 영역으론 문학과 미술이 있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문자가 발달되지 않던 시절에도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남겼으며 제의를 하며 밤새도록 광란의 춤을 췄다. 이때의 미술이나 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믿는 신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그걸 함께 수행하는 무리가 운명을 함께 하는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자신을 표현함으로 두려움과 근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표현할 때 두려움은 없어지고, 자존감은 커지며, 공동체의 든든함은 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표현해왔던 것들이 어느 순간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천한 것들만 하는 것이 되었다가 최근에는 전문가만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돈을 조금만 가져가려해도 바짝 긴장하고 악다구리를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당연한 표현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것이다. 

오히려 노래는 가수들이, 춤은 댄서들이 대신 쳐주는 것으로 전문화, 분업화시키면서 정작 자신의 표현욕을 외면하기에 바빴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 보자. 누가 내 대신 코를 푼다고 내 코가 시원해지는가? 누군가의 춤을 본다고 내 몸의 욕구가 충족되는가? 결코 내 욕망은 누군가로 인해 해소되지 않는다. 그건 더욱 더 억눌려져 정작 표현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될 뿐이다. 누구나 같은 삶을 살지만 한국 사람들의 답답하고 눌린 듯한, 그리고 긴장한 듯한 모습에는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 것이다.  



▲ 카자흐스탄 결혼식에서 밤 늦도록 먹고 마시고 춤추며 함께 즐기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춤은 소통이며 창조다   

  

춤을 못 춘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비약적인 논리를 펴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는 모르지만, 난 결코 비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춤과 노래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맘껏 자신을 노래와 춤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며,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 믿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결혼식에서 봤다시피 누구할 것 없이 잘 추든, 못 추든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좀 더 서로에게 개방적인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시로 배움의 뜻을 일으키고, 예로 사회적 각성을 함으로 배움의 뜻을 굳건히 세우며, 음악으로 배움을 완성한다.”라고 말씀하셨다. 

子曰:“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論語』 「泰伯」 8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얼핏 들어선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세 가지(詩, 禮, 樂)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는 사람의 감정을 자기검열 없이 드러내는 장르다. 그러니 사람의 원초적인 좋아함과 싫어함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아는 사람은 선한 것을 좋아할 줄 알고, 싫어하는 것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好善惡惡之心)이 있는 것이고 사람은 그런 마음을 기반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원초적인 느낌에 충실할 지라도 사회적인 규율과 예의에 둔감해서는 사람들에게 ‘별난 사람이네’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한다. 그래서 공자는 예로 서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예란 사회적인 규범, 예절 따위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 말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공자는 지극히 평범한 예의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데에 귀를 쫑긋 세워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예만을 중시할 경우 사람은 경직되고 사고는 굳으며, 사회는 보수화되고 약자를 억압하는 길로 들어선다. 거기서 어떻게 창조적인 역량, 사람다운 미덕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로 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악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악은 사람들과의 소통이며 화합이며 어우러짐이다.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너와 나의 인식의 지평을 맞대고 그 안에서 노닐 수 있어야 한다. 너의 몸과 나의 몸의 공통된 리듬을 맞출 수 있어야만 비로소 어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창조이며 창작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잣대만을 가지고 소통할 수 없듯이, 상황과 사람에 맞게 변통할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결론을 맺도록 하자. 내가 생각하는 춤의 가치는 ‘타자화된 나의 몸’을 ‘자기화’하는 과정이며, 공자가 말한 ‘음악으로 이루’는 과정이다. 그런 가치를 이루기 위해선 우리 사회의 편견이 없어져야 하며, 그와 더불어 아이들이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져야 한다.                



▲ 발표회 전 시간엔 우리들끼리 하게 될 연극을 연습하는 시간이 있었다.




대통령 학교의 예술적인 발표회

     

오후엔 대통령 학교 학생들이 한국 학생들을 위해 발표회를 열었다. 이 학교는 어제 말했다시피 영재 학교다. 한국이라면 치열하게 공부하여 좋은 상급 학교에 진학했다는 걸 자랑삼아 얘기하며, 어떤 창의적인(?) 수업들이 이루어지는지 보여줄 것인데, 여긴 그렇지 않았다. 아주 기본에 충실한 표현의 장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각종 댄스와 다양한 몸동작을 보여주고, 노래까지 불렀다. 그래서 누가 보면 “여기 예술학교군요?”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였다. 이 학교에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몇 분이나 계시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춤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 두 분이었으니, 두 분 이상은 될 것이다. 여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모두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 있다고 한다. 이곳의 문화풍토가 춤에 대해 편견이 없다 보니, 그게 자연스럽게 교육과정으로 녹아 들어간 것이다. 

원랜 발표회 자체가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표회를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메라를 제대로 충전하여 오는 건데,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다양한 발표회 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여러 종류의 춤을 보여줬는데, 하나하나의 춤이 개성만점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했던, 손으로 온 몸을 치며 몸을 움직이는 춤에선 감탄이 절로 났다. 격렬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맘만 있으면 할 수 있고, 저렇게 몸을 여기저기 두드리다보면 몸의 감각들이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군중무群衆舞여서, 동작과 소리가 맞을 때의 통쾌함은 최고이기 때문이다. 저런 걸 배워 아이들과 함께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 재밌는 시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축하잔치라 다들 신나게 즐겼다.




역시나 끄무즈

     

발표회가 끝나고 전통가옥에 끄무즈를 먹으러 갔다. 저번에 알마라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갔었지만 그 땐 처음 맛보는 것이라, 약간 긴장을 하기도 해서 그냥 넘기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오늘은 다시 맛보는 이상, 제대로 음미하며 먹어볼 것이다. 

일주일 만에 다시 먹어본 끄무즈는 여전히 시큼한 맛이 강해서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도록 했다. 하지만 두 컵 째 마시다보니, 그런대로 적응은 되더라. 이것 또한 요거트처럼 먹다보면 어느새 입맛에 맞게 될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학교에서의 화요일 일정도 눈 깜빡할 새에 끝이 났다. 시간도 잘 가고 한 순간 한 순간이 정말 신난다. 



▲ 해맑은 아이들. 그리고 끄무즈는 고민이지만, 이런 분위기만큼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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