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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01. 2018

땀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다

2013년 6월 26일(수)

오늘은 본격적으로 금요일에 있을 발표회 때 할 것들을 연습했다. 전통춤의 동작을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했고 카자흐스탄어로 된 연극 대본을 리딩했으며, 새로운 카자흐스탄 노래도 배웠다. 

원래 계획상으론 다음 주 월요일 오후 4시에 발표회를 하고 우슈토베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연습한 것이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에 출발하는 걸로 바뀌면서 발표회 일정도 금요일 오후 4시로 앞당겨졌다. 무려 3일이나 앞당겨지다 보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들도 상황에 떠밀리듯 정신없이 연습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과연 이 짧은 시간에 춤, 연극, 노래를 모두 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시간은 한참이나 부족한데, 너무 많은 것들을 벌여놓기만 한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대통령 학교 측, 특히 담당 선생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기에, 그분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 오전엔 연극연습을 했다. 여기서도 나름 해야 할 일정들이 정해지니, 아이들도 할 게 있어서 좋아한다.




편견의 대변인

     

춤 연습을 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려니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이 맘처럼 움직여지지 않으니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배운 춤은 격렬한 댄스라기보다 몸의 움직임과 떨림에 집중하는 거였다. 어깨만 움직이는 동작, 손을 물 흐르듯 내저어야 하는 동작 등을 따라했다. 어깨만 들썩여야 하는데 저절로 팔까지 같이 움직여지고, 손을 자연스레 휘감아야 하는데 힘이 들어가던지 로봇처럼 움직임이 뻣뻣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힘들다는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소수 학생의 몇 마디 말은 꽤나 거슬렸다. 그 중 더 큰 문제는 몇 명의 말이 은연중에 우리 모두의 말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거였다. 다수의 학생에게도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어, 춤추는 것 자체를 ‘어리석은 짓’으로 폄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 말이 어떤 말인지 들어보자.    

  

“딴따라도 아닌데 왜 이걸 해야 해?”, “여긴 무용전문 학교냐?”    

  

위의 말은 ‘하기 싫다!’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었지만, 어제 여행기에도 썼듯이 몸으로 하는 것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다.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한국사회의 편견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그 편견을 아무런 생각 없이 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의 편견과 하기 싫은 마음이 엉겨 붙어 이런 식의 불만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분위기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 댄스 연습을 할 땐 불퉁불퉁해도 먹을 때만큼은 조용하다. 역시 음식 앞에선 우리 모두 평화주의자^^




단재팀 VS 카작팀단재팀의 황당승

     

오후엔 춤 연습을 조금 더 하고 체육대회를 했다. 50m 이어달리기와 고무 말을 타고 이어달리기, 공을 배 위에 얹고 이어달리기, 터널 통과하며 이어달리기, 다트, 아스크(일 열로 세워놓은 양의 뼈를 맞춰 원 밖으로 밀어내는 게임), 줄다리기를 했다. 당연히 단재팀이 유리할 줄 알았다. 카작팀엔 여학생들도 많았고 특히 아르토르는 초등학생으로 체구도 작았으니 말이다. 그에 반해 단재팀은 건장한 남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연중이는 운동신경도 좋으니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첫 경기인 이어달리기를 할 때부터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카작팀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데, 단재팀은 승빈이를 빼곤 그러지 않았다. 혜린이는 테켈리 여행 때 다리를 삐끗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남학생들은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그렇게 매 경기마다 연패連敗를 하다가, 아스크와 줄다리기에서만 이길 수 있었다. 아스크는 힘 조절이 중요하고 줄다리기는 단순히 힘만 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단재팀이 종합우승을 했다고 체육선생님이 알려주더라. 씁쓸한 승리였다.                



▲ 운동시간에 아주 적극적이며 활기차게 활동하는 카자흐스탄 아이들.




땀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경기가 끝나고 왜 그렇게 설렁설렁했는지 물어보니, “땀나는 건 싫거든요. 그래서 땀이 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어요.”라고 대답한다. 

땀이 나지 않는 선에 맞춰 최선을 다했다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의 학창 시절엔 어떤 일이든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으니 말이다. 내가 원체 운동신경이 없기에 지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팀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뛰어다녔다. 물론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맹목적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진 않는다손 치더라도, 열심히 하려는 사람을 바보 만드는 상황은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승빈이는 최선을 다해서 한다. 그에 반해 다른 아이들은 설렁설렁 한다.




소비주체가 품은 에너지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우치다 타츠루内田樹(1950~ ) 선생의 진단처럼 ‘소비주체’로 세상과 관계 맺기를 시작한 아이들은 더 이상 가시적인 보상체계가 없으면, 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에 합당한 무언가가 답례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체육대회를 하기 전에 ‘분명한 목표’를 이야기했거나, 승리한 팀에게 어떤 상품이 주어지는지 예측 가능한 비전이 주어졌다면, 게임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거 하면 뭐가 좋아요?’라고 물을 때, 그 ‘뭐가’에는 이상적인 것(신체, 정신)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돈, 지위)이 포함된다. 그럴 때에만 설득력을 지닌다. 솔직히 설득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건 ‘거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설득이 ‘이성적인 차원’의 얘기라면, 거래는 이해타산의 ‘현실적인 차원’의 얘기이니 말이다. 스마트폰을 팔려 할 때 어느 정도 가격이 아니면 거래하려고 하지 않듯이, 그처럼 아이들에게 운동도 스마트폰을 파는 것처럼 일정한 보상이 없으면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체육대회에 참가하면서 처음부터 열심히 할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하라고 하니깐 하지만, 혼나지 않을 선에서 하는 척만 했던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된다. 아예 안 하겠다고 엎어지거나, 빠지겠다고 하지는 않으며 혼나지 않을 선에서 하는 척만 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이 보기엔 ‘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혼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눈치를 봐가며 적당선(나태와 최선의 중간지점, 혼남과 안 혼남의 중간지점)에 맞추려 무진 애를 쓰는 것이다. 분명히 긍정적인 반향으로 표출되는 에너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무기력하거나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당장 학생들에게 그런 마인드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그건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에너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거래의 환경이 아닌 증여의 환경과 ‘증여’의 경험을 어떻게 제공하느냐가 교사로서의 고민일 수밖에 없다. 



▲ 우리를 위해 이런 활동들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준 학교 측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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