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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01. 2018

주위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벽이 있다

2013년 6월 26일(수)

어느덧 카자흐스탄 일정이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올 때만해도 ‘3주란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이곳에서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중반이 지나고 있다. 무언가 나날이 할 게 있기 때문에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 이 날 저녁은 대관람차가 보이는 운치 좋은 곳에서 양꼬치를 먹었다. 정말 맛있더라.




외국어의 필요성     


해외에 나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외국어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낀단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한국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니 문제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카작인들은 러시아어와 카작어를 함께 쓰며 이야기를 한다. 솔직히 어떤 말이 카작어인지, 어떤 말이 러시아어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이 쪽 언어에 대해서 눈꼽만큼도 모른다. 그러니 어딜 가든 들리는 소리는 ‘잡음’에 불과했다. 어디 그 뿐인가? 거리를 걸어 다닐라치면, 수많은 간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카작 알파벳조차도 모르니, 어떤 발음으로 읽혀지는지, 어떤 가게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귀 있는 귀머거리요, 눈 뜬 봉사가 되고 보니, 더욱 더 외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외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게 ‘사회가 원해서요’라거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해요’라는 식의 접근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외국어는 하나의 열쇠key다.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인 것이다. 한문을 배우고 나니, 우리의 선조나 철학적으로 이름 난 중국의 학자들이 던진 말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사람들의 언어를 듣다보니, ‘과거는 그저 과거가 아니라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처럼 외국어도 전혀 다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나의 인식을 확장하고 편견을 깨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전혀 다른 삶의 지평이 열리며, 숨겨진 내막을 캐낼 수 있다. 그와 같은 열쇠를 얻기 위해 외국어가 배우고 싶다.               



▲ 광고판이 게시되어 있지만, 뭔 말인지 모른다. 그래도 이들의 표정이 다채로워 보고 있으면 웃음이 지어진다.




벽은 넘으라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은 환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부분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건 곧 언어란 것 너머의 근본적으로 인성과 DNA에 새겨진 정보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공통된 지평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반대편에 사는 사람이 쓴 책을 우리가 공감하며 읽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해외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태껏 해외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돈이 없다는 이유를 댔지만, 해외에 나갈 절박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해외여행은 넘어서는 안 될 ‘마음의 벽’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벽을 넘고 나면 그건 결코 견고한 벽이 아닌, 내 의식이 만든 벽임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넘고 나면 별 것 아닌 게 분명하지만 넘어서기 전까진 내 스스로 나를 옭아매어自繩自縛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넘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해외에 나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이제는 알겠다. 벽을 넘어설 때, 비로소 다른 지평이 열린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박동섭 교수는 이에 대해 ‘그랜드 피아노를 집 안에 들여놓기’와 같은 인식의 전환이며, 지평의 확장이었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성 빅토르 위고 「工夫」    


      

이쯤 되니, 예전에 읽었던 이 말도 이해가 되었다. 20대까지의 나는 고향에만 머물려 하는 미숙한 초보자였다. 타지로 나갈 여건이 안 된다는 핑계로 집을 떠나지 않았다. 거기에 빌붙어 있으면 육체적으로 편했기 때문이다. 

그 후 임용시험을 경기도나 광주에서 보며 떠나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도보여행을 하면서, 지나갔던 모든 곳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풍경들에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그제야 스쳐지나가는 곳이 모두 고향과 같이 ‘가슴 따뜻한 훈풍이 부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떠나보고 나니, ‘미숙한 초보자’에서 ‘강인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 와서 12일 정도를 있어보니, 고향이라는 관념이야말로 ‘이상’에 불과할 뿐, 내가 살던 곳도 ‘이상 속의 고향’이 아니며, 내가 만나온 사람도 ‘이상 속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내 의식이 그렇게 느끼도록 조장한 것일 뿐, 어디에도 그런 곳이나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유아적인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어차피 모든 곳이 ‘타향’이고 모든 사람이 ‘타인’이라면, 어디든 떠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만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든 곳이 ‘타향’이기에 ‘고향’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타자’이기에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고향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이 없기 때문에 모든 곳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는 다행스런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지 ‘징크스는 깨라고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을 차용하여 난 이렇게 외칠 것이다. “벽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다.



 ▲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이 공존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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